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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혀를 지키는 자
잠 21:19-24
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20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21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22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
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24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잠 21:19-24 / 아내와 맨날 싸우고 성질 돋우며 사는 것보다는 사람 살지 않는 한적한 빈들에서 혼자 사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20) 슬기롭게 사는 이의 집안에는 값진 보화가 그득하겠으나 미련하기 짝이 없어 어리석게 사는 이는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두 내팽개친다. 21) 할 수 있는 한 이웃에게 바로 대하고 한결같이 따뜻하게 대해 주는 이는 생명을 얻고 존경을 받는다. 22) 슬기로워야 싸움이라면 귀신같이 잘하는 전사들이 지키고 있는 성읍이라도 쳐들어 올라갈 수 있고 아무런 염려 없이 든든하다는 요새라도 허물어뜨릴 수 있다. 23) 입조심하는 이, 말조심하는 이, 어려운 일이 닥쳐도 아무런 염려가 없다. 24) 남 깔보며 우습게 여기고 스스로 난 체하는 자들을 일컬어 교만한 자, 거만한 자라 한다. 하는 짓마다 건방지고 무례하니 그럴 수밖에.
같은 주제들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이는 지혜자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만큼 지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반복되어 강조되고, 내 삶에서 훈련되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19-20) 19절은 9절의 반복입니다. 결혼 생활의 환경적인 요건이나 물질적인 조건보다 배우자와의 화목에서 오는 마음의 평안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0절에 지혜 있는 자의 집에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다는 것은 언제 발생할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을 대비해 늘 귀한 보배와 기름을 예비해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그것을 삼켜버렸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먹고 소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의 집에는 언제나 마르지 않는 풍요가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21-22)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깊이 관계하면서 진실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인자) 하나님의 뜻대로(정의)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보상이 있습니다. 이 보상은 미련한 사람이 얻을 결과인 죽음, 패망, 수치와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받을 보상은 생기 넘치는 매 순간의 삶(생명), 하나님께서 그를 옳게 여기심(공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강한 자존감(영광)입니다(21).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견고한 성이나 많은 군사가 아닙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빼어난 전술이요, 지혜입니다. 전쟁 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매일의 삶에서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22).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23-24)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말은 내 인격을 담는 그릇입니다. 슬기로운 언어생활이 내 삶을 지킵니다. 더 나아가 환난에서 나를 건져냅니다. 절제된 말, 상황에 맞는 말을 연습하시기 바랍니다(23). 하나님을 무시하면 사람을 무시하게 되어 있고, 이렇게 교만한 태도로 살아가면 인간관계가 늘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사람을 존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24).
적용: 우리의 언어생활이 성결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과 성품이 드러나게 해 주소서!”
小貪大失[소탐대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다.-신론. 작은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인드가 소심하여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며 속을 태우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마인드가 대범하여 작은 일 따위에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정작 해야 할 일을 놓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이에게는 미래에 대한 준비가 있지만 우둔한 자는 아예 미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야 참이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려 살아가는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잠언 21:23-24
오늘도 우리에게 귀한 날을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오늘도 귀한 주님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잠언 21장 23절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 혼을 지켜 고난들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고난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난이 오는 가장 큰 이유는 중 하나는 자기 입과 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해보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신중하게 말하고, 지혜롭게 말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잘해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부활을 선포한 결과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 말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우리의 입과 혀를 지켜서 침묵한다면, 이러한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 함께 디모데후서 2장 2,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신실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진리의 말씀이 계속해서 전파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예수님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입을 열어 진리를 말하게 되면, 반드시 고난이 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난은 피하지 말고, 견디어 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단지 고난이 없는 안락하고 평안한 육신의 삶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르고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인생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고, 잘 피할 수 있는가, 그 비법을 배우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학교에서, 내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어떤 종류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잘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당하는 고생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으로 받는 고난을 선택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고난이 올 때, 단지 괴로워하기만 하고,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와 성숙함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친히 우리들을 가르쳐 주시기 원합니다.
이제 우리 다시 잠언 21장으로 돌아와서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교만한 진노 가운데 행하는 자를 가리켜 교만하고 건방져서 비웃는 자라고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교만한 진노 가운데 행하고, 또한 두 번째로, 건방져서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때로는 진노하고, 때로는 웃습니다. 그러나 그 진노와 웃음의 근거는 그의 높아진 마음에 있습니다. 진노할 때는 자기 자신이 무시를 당해서 자존심이 상했을 때이고, 비웃을 때는 남들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겸손하기를 원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겸손하게 낮은 자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가르쳐 주시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잠언 21:16-31/ 하정완 목사
우리가 지혜 있다고 말을 하지만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상처입히고 깊은 절망에 이끌게 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에 대하여 인상착의를 설명하여야 할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 저는 그분이 발을 약간 절었던 것을 토대로 설명하였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지혜의 한계였습니다. 후에 그분의 아내로부터 저의 표현에 대하여 심한 항의를 받았을 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혜로운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늘 실수와 실패에 노출되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우리에게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입과 혀를 보전하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21:23). 이처럼 언어에 대한 중요성에 대하여 성경은 수없이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언어에 성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얘기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에겐 말에 실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그렇다면 우리의 이런 실수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말의 실수가 없고 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 한다면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잠21:30).
미국에서 암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원종수 권사는 만일 억울한 일을 당하고 무시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새벽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물론 그 새벽에 하나님에게 모두 다 말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언어를 가진 사람이 되려한다면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훌륭한 정치가로 평가받는 사람들 중에 다니엘 웹스터에게 어떤 사람이 어려운 문제 해결을 위해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웹스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로 하여금 그 문제를 가지고 하룻밤만 잠자게 해 주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혜로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는 법들을 배우기 시작한다면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이 문제를 가지고 당신 앞에 겸손히 나아가게 하소서".
잠언강해
잠 21:16-20
오늘은 잠언21:16부터 보겠습니다.
(잠 21:16)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여기서 명철이라는 말은 지혜로움, 혹은 진리를 말합니다. 즉, 지혜로움이나 진리의 길을 떠난 사람의 운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 진리의 길에서 떠난 사람의 결국은 뭐냐?.....사망이다라는 말입니다. 진리에서 떠난 어리석은 사람의 결국은 비참한 죽음입니다. 사람은 진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바른 길을 선택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게 지혜로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 즉 진리를 버리고 산 사람들의 결국은 비참함으로 마칩니다.
진리 속에 살던 사람이 진리를 버리면 진리 가운데 살지 않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합니다. 착하게 살던 사람이 악하게 살면 더 악날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던 사람이 신앙을 버리거나 배교하면 다른 안믿는 사람보다 더 악날하게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도해 보면, 교회에 좀 다녔다는 사람이 교회를 버리고 떠나면 교회의 가장 큰 적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인생 말로는 비참하게 끝납니다.
그러면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차이가 뭐냐?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의 가르침을 멸시하고 그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지혜가 가르쳐 준 길을 가기 싫어합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의 길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 길을 끝까지 인내하며 갑니다. 그리고 결국 승리의 삶을 사더라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진리를 사모하고, 진리의 길에 서는 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17절 말씀은 가난하게 되는 이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잠 21:17)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왜 가난하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방탕하면 가난해집니다. 공동번역에는 연락이라는 말을 향락이라......그렇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항상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게 돼 있습니다.
특히, 그런 사람의 특징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데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기름은 기름진 고기를 말합니다. 기름진 고기는 반드시 먹는 고기만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사치를 말하기도 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술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로 술집을 찾아다니죠. 술집에는 몸파는 사람도 있고, 돈을 물쓰듯 쓰야 합니다. 또 그런 곳은 여흥을 팝니다.
우리가 흔히 춤추러 다니는 클럽 같은데는 여흥을 즐기는 곳입니다. 거기는 술도 팝니다. 나중에는 술에 떡이되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사치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술은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됩니다.
술로 망하는 사람은 많이 봤어요. 술 좋아해서 인생 좋아지는 경우는 거의 못 봤습니다. 술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드는 제일 조건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귈 때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절대로 사귀면 안됩니다.
세 번째 18절 말씀입니다.
(잠 21:18)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이 말이 좀 어려운 말인데, 쉽게 풀이하자면 이런 말씀입니다.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즉, 악인은 의인을 구할 대속물이 되고 궤사한 자는.....궤사한 자가 누굽니까? 궤사라는 말은 말로 남을 꽤는 사람 즉, 사기꾼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기꾼은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정직한 사람의 대신. 뭐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이나 장관이라는 말이 아니라 대신 한다는 말입니다.
사기꾼은 정직한 사람을 대신하게 된다. 이것도 앞에 말씀과 같이 악인은 의인의 대속물이 되듯이 사기꾼도 정직한 사람의 대속물이 된다....그 뜻입니다.
이것을 의역하면, 악인이나 사기꾼들이 정직한 사람, 의로운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하지만, 그 악한 사람들의 모의한 모의로 의인이나 정직한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들이 죽는다는 그 말입니다.
한마디로, 악인이 의인을 잡으려고 덫을 놓은 그 덫에 자기들이 걸려 죽는 걸 의미합니다.
이런 예가 성경에 나오죠. 어딥니까? 에스더입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과 모르더개의 이야기 아닙니까? 하만이 모르더개를 죽일려고 계획을 짭니다. 그래서 모르더개를 성벽에 나무에 달아서 죽일려고 날짜까지 다 정해놓고 나무까지 다 준비해 놓습니다. 그런데 결국 누가 그 나무에 매달려 죽습니까?
그 악한 꽤를 냈던 하만이 그 나무에 달려 죽고 그만 죽은게 아니라, 그 아들 10명이 모조리 참살당해서 죽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은 선한 사람, 의인을 함부러 대하다가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런 사람들의 대속물로 삼아버리시겠다는 말씀이 바로 18절 말씀입니다.
그래서 항상 악한 사람은 자기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일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성경에는 악인이 의인을 죽이려고 모함하다가 반대로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진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19절 말씀입니다.
(잠 21:19)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 말씀은 이미 지난번 잠17:1절에 비슷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잠 17:1)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얼핏보면 독신주의자들이 좋아할만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하나님은 가정을 이루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가정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다투며 성내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보다는 혼자 사는게 낫다........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낫다......그래서 독신주의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반려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혼자 사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주는 핵심은 그겁니다. 서로 잘 맞는 사람과 사는게 중요하다.......그 말입니다.
돈보고 결혼하거나 배경을 보고 결혼하면 실패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과 사느냐가 중요하지. 돈이나 재산보고, 그 사람의 학벌과 배경을 보고 결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다.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결혼전에 그 사람을 잘 알고 결혼해야 합니다. 냉철하게 봐야 합니다. 그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만 앞세우고 결혼했다가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이 사람 아니면 죽고 못삽니다.그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중에 살아봐요 죽고 못사는지, 같이 살아보면, 웬수도 이런 웬수가 없다.......그러면서 후회합니다.
학벌 인물 배경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보면 안됩니다. 사람을 봐야해요.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어떤 인품과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떤지 그걸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그걸 알기 위한 방법이 하나 있어요. 친구를 보면 알아요.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요. 꼭 그사람과 사귀고 싶으면 친구들을 만나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나와요.
마지막으로 20절 말씀입니다.
(잠 21:20)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이것도 역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비교한 말씀인데 무엇에 관한 말씀인가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가져야할 가치가 뭔지를 알고 그것은 준비해 놓고 있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은 다 우습게 알거나, 함부러 써버린다는 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금 당장 가치 없다고 다 없애버리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고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를 잘 준비하는 그런 지혜로움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