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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이준형의 보물상자 : 7월의 주목할 만한 새 음반들>
해야 하는 일이 조정이 안되는 지금 비올을 놓친것은 안타깝지만 어쨌든 테오르보를 건졌고 파헬벨의 모르는 곡 또한 이채로웠다.테오르보 소리는 형언할 수 없지만 류트소리같기도 기타소리같기도하며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1.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70~1827)
교향곡 2번 D장조 op.36 중 4악장 Allegro molto
- 사이먼 래틀(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5:59)
베토벤에게 있어서 1802년은 그의 삶에 있어서 유례없는 생산성을 기록한 시기가 막 시작되는 한 해였다. 아마도 베토벤은 이러한 특별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네. 매일매일 나는 내가 하려고 했던 것에 가까이 가고 있네. 그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느끼겠지만, 정확히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겠네.” 또 다른 한 친구에게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긴다. “나는 음표 안에서만 살고 있네. 한 작품이 잘 끝나지 않은 채, 다른 작품이 이미 시작되고 있네. 내가 일을 하는 방식은 3~4개 작품을 한꺼번에 진행시키는 것이네.” 이 시기는 베토벤에 있어서 작품과 삶에 대한 열정이 어느 때보다 강렬한 시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는 청각 상실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고, 베토벤 자신도 이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청각 상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자 베토벤은 엄청난 절망을 느끼고 1802년 10월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기에 이른다. 베토벤은 자신의 심리 상태를 알고 있었고, “운명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운명이 자신을 짓누른다고 느끼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던 이 시기에 〈교향곡 5번 ‘운명’〉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시에 진행시키고 있던 작품 가운데 완결된 작품 중 하나였던 〈교향곡 2번〉은 이러한 베토벤의 심리가 위트와 유희적인 에너지로 탈바꿈한 곡이었다.
베토벤은 1803년 4월 5일에 이 작품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다. 〈피아노 협주곡 3번〉과 오라토리오 〈올리브산의 그리스도〉도 이 자리에서 함께 초연되었다. 이날의 리허설은 아침부터 장장 8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자리에서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 후작은 고기와 와인을 보내서 지친 연주자들과 가수들의 배를 불려놓은 다음, 오라토리오를 한 번만 더 연주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리허설이 그렇게 길어졌던 것은 리히노프스키 후작의 횡포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교향곡 2번〉을 비롯해 베토벤의 신작들을 선보인 이 연주회에 대한 평은 엇갈렸다. 〈교향곡 2번〉은 당시 이미 인기를 끌었던 〈교향곡 1번〉과 비교되었고,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 비평가는 이렇게 신랄하게 이 곡을 쏘아붙였다. “〈교향곡 1번〉이 〈교향곡 2번〉보다 훨씬 훌륭해보인다. 〈교향곡 1번〉은 가벼운 주제로부터 발전됨에 따라서 힘이 덜 드는 반면, 〈교향곡 2번〉은 너무 새로운 것을 추구한 나머지 별로 놀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교향곡 3번 ‘영웅’〉에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베토벤다운 음악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향곡 2번〉과 〈교향곡 3번〉 사이의 시간적인 격차가 〈교향곡 1번〉과 〈교향곡 2번〉만큼 크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향곡 2번〉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이미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있었다.
1악장의 서주는 그 길이와 깊이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교향곡 2번〉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느린 서주부는 그 자체로서도 매우 다채롭다. 화성적으로는 대담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고, 마치 〈교향곡 9번〉의 시작을 예시하는 듯한 d단조의 유니슨을 비롯한 다양한 음악적 특징들이 드러나고 있다. 장대한 서주가 마무리되면 생동감 넘치는 빠른 부분이 시작된다. 전반적으로 1악장은 순수함과 변덕스러움이 공존하고 있다.
2악장 라르게토는 달콤한 악센트가 베토벤의 언어 안에 새롭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악장이다. 〈교향곡 1번〉에서 베토벤은 이미 스케르초적인 악장을 쓰면서도 보수적이게도 ‘미뉴에트’라는 이름을 붙였었지만, 〈교향곡 2번〉에서는 처음으로 3악장에 ‘스케르초’라는 이름을 붙인다. 3악장은 문자 그대로 ‘농담’같은 유희적인 3박자 계열의 음악을 들려준다. 마지막 악장의 열정적이면서도 코믹한 특징들을 담고 있다. 1악장과 2악장에서 보여주었던 베토벤적인 장대함 대신 마지막 악장에서 베토벤은 고도로 압축된 형식의 절차를 선보인다. 마지막 악장에서 우리는 〈교향곡 2번〉이 18세기의 후반의 세련된 희극의 전통 안에서 자신만의 혁명을 성취하고 있음을 관찰하게 된다.
marin marais - les voix humanes, 1701
비올라 다 감바는 흐리멍텅하면서도 암울한 사운드가 인상적인 악기다.
특히, 전자 악기로는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암울한 음색은 뭔가 원초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바이올린, 첼로와는 달리, 비브라토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도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하다.
비올은 르네상스 시대의 류트와 마찬가지로 6현(4도 음정현 2개, 장3도 음정현 1개, 4도 음정현 2개)이며 목에 거트로 된 줄받이가 달렸다. 크기에 따라 트레블 비올(알토보다 다소 높은 음역을 지닌 비올), 테너 비올, 베이스 비올로 나뉘었는데 맨 아래 현을 각각 d, G(또는 A), D로 조율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 더블베이스 비올(베이스 비올보다 한 옥타브 아래로 조율했음)이 생겼다.
줄받이가 달려 마치 개방현 같은 투명한 음색(비올이 자랑하는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맑고 깨끗한 음)을 낼 수 있었다.
16세기 후반까지 합주, 베이스 독주, 작은 베이스 비올(비올라 바스타르다)인 리라 비올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비올을 위한 음악이 많이 작곡되었다. 왼손으로 2~6개음에 달하는 화음을 집을 수 있어서, 거의 다성음악에 가까운 음악을 연주할 수도 있었다. 17세기에 기악 작곡의 양식이 변해서 소프라노 음역에서의 표현적·성악적인 음향이 강조됨에 따라 테너 비올과 트레블 비올이 바이올린의 그늘에 가려 쇠퇴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비올의 몸통에서 나오는 콧소리 닮은 텅 빈 소리를 멀리하게 되었다.
반면 베이스 비올은 16세기 중엽 이후 복잡한 독주 디비전(division : 17~18세기에 유행한 음형 장식의 일종으로, 선율을 빠른 음형이나 악구로 분해하는 기법이며, 특히 영국에서 하프 연주자가 연주하는 고집저음 위에서 비올이나 플루트 연주자가 고집저음을 주제로 즉흥적으로 꾀한 장식적인 음형변주를 뜻함)의 레퍼토리를 발전시켰다(→ 디비전 비올). 17세기말경 디비전의 인기가 줄어들자 표준 크기로 된 독주용 베이스 비올인 비올라 다 감바(이것은 다른 형태의 비올을 사용하지 않게 되자 베이스 비올의 동의어로 쓰이게 됨)가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독주 악기로 등장하게 되었다. 독주용 베이스 비올은 18세기까지 독일과 프랑스에서 계속 사용되었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맨 아래 7번째 현(보통 A'로 조율)을 추가했다.
그밖에 다른 곳에서 비올라 다 감바가 계속해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지속음을 내어 하프시코드를 반주해서 듣기 좋은 화음을 냈기 때문이었다. 바로크 시대에 하프시코드와 비올라 다 감바는 한데 어울려 계속저음용 악기로 사용됨으로써 바로크 기악 합주에서 화성적 토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새로운 고전 양식의 작곡가들이 악보에 상성부 기악 성부들의 화성을 완전히 표시하게 되자 비올은 이제 쓰임새가 없어져서 더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한편 20세기에 와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음악 연주가 다시 인기를 얻게 되자 새롭게 복원되기도 했다.
Robert de Visee (c.1650-1725), 로베르 드 비세- 바로크 프랑스의 기타, 테오르보, 류트의 대가
Robert de Visee (c.1650-1725)
Robert de Visee (c.1650 - 1725)의 출생과 가족 관계에 대한 사항은 그리 알려지 바가 없다...그러나 그의 성(姓)(family name)으로 미루어 볼 때 포르트갈 출신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잇다...Francesco Corbetta 에게 배운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1680년경에 루이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정의 실내악 연주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가수로서 , 작곡가로서 류트, 테오르보, 기타 연주자로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있다..1709년 royal chamber의 가수로 지명되었으며 1719년 왕의 기타 선생"Guitar Master of the King" (maitre de guitare du Roy)으로 임명되엇으며 아울러 궁정의 비올 연주자로서 활약했다고 한다...
그의 스승이었던 Francesco Corbetta 와 더불어 가장 저명한 프랑스 바로크의 기타 작곡가가 되었다...비세는 2권의 기타를 위한 작품집을 썼으며 1682년 루이 14세에게 헌정되었다..두권의 책 가운데에는 12곡의 모음곡이 포함돼 잇으며 그는 또한 바로크 류트와 테오르보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앙상블을 위한 다양한 소품들 역시 작곡했다..
Suites Pour Theorbe
Robert De Visee
Pascal Monteilhet
테오르보’는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발명된 악기이다. ‘류트’와 같이 보컬에 부속되거나 반주 악기로 사용되었던 것이, 소리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으면서부터 이젠 하나의 독립 악기로서 클래식 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히 커졌다 하겠다. 17세기 작곡가 ‘비세’의 테오르보를 위한 조곡은 이런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테오르보 특유의 음색을 가장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앨범에서 테오르보 연주자 ‘파스칼 몬테일헷’은 바이올린과 비올의 선율과 조화를 이루어 비세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Pieces De Guitare Baroque - Robert De Visee
Tombeau De Robert De Visee - Andre Jolivet
Christian Rivet
로베르 드 비제는 프랑스 태생으로 기타연주자, 테오트보 주자, 가수, 그리고 작곡가로 루이 14세의 왕실 연주자로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는 12개의 조곡(組曲)과 갖가지 잡다한 소품들이 있다. 이 앨범에는 당시 잘 사용하고 있던 궁중 무곡 형태의 알레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 등과 경쾌한 가보트, 미뉴엣, 부우레등을 담고 있다. 맑고, 투명한 기타로 듣는 무곡은 새로운 즐거움을 준다. 그의 동시대 작곡가인 큐리, 쿠프랭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통보 tombeau:죽은 사람을 추념하기 위해 쓰여진 곡) 형식으로 프랑치스크 케빈의 무덤이 있다. 졸리베의 로베르 드 비제의 추모 앨범이 무척 인상적이다.
본음반은 바로크 기타로 연주된 비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잇으며 음반의 중간 부분에는 앙드레 졸리베의 로베르 드 비세의 무덤이라는 작품이 현대 기타 연주로 수록되어 잇다.. 아울러 음반의 후반부에는 비세의 작품으로 그의 스승에 대한 회고와 추모의 마음을 담고 잇는 Francesco Corbetta의 무덤이란 제목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비세의 코르베타에 대한 통보와 졸리베가 비세를 기리는 두개의 통보가 각각 바로크 기타와 현대 기타의 연주록 수록되어 잇는 것이다..두곡의 작품은 멀고 긴 시간의 간극 만큼이나 그 분위기가 다르며 졸리베의 작품이 흔히 그렇듯 무조적이며 대단히 기교적인 작품으로 되어 잇다.. 졸리베의 작품, "비세의 무덤에서"는 졸리베에 의해 쓰여진 비세에 대한 매우 현대적인 언어의 추모사이다..
Theorbe
5. 요한 파헬벨 (1653~1706)
파르티아 5번 C장조 중 Ciacona
- 글리 인코그니티
(3:15)
파헬벨의 캐논말고는 아는게 없었던 내게는 더 듣고 싶었지만 중간에 잘려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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