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제19편 영별그날>②도흥별천목탁소리-32
천복은 보덕과 앞날이 엇갈리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였다.
“도대체 불자님과는 이승이 아니면, 함께할 저승이 없겠군요. 이 좋은 세상을 까까머리에 청춘의 기름지고 보드라운 향긋한 머릿결을 단 한번이라도, 불자님께 흐뭇이 보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소이다!”
정녕 그녀는 여자로서 남자에게 젊음의 향기를 선물하고자하는 욕기가 없지 않은지, 역시나 아쉬워하는 거였다.
“내가 열여섯 살에 조혼한 뒤, 그 이듬해 꿈을 안고, 도선암에 들어가 끝내는 꿈을 접고 나올 무렵, 인수보살께서 극성스레 어린 갱두보덕을 공양채 선방에 밤마다 가두고 흘레붙여 내 정수가 보덕의 처녀수와 만나 만덕을 태었으니, 비록 이승을 떠나더라도, 장차 도흥별천 경산의 유택아래 지흥엄마 만덕엄마... 나란히 누워 천현지황(天玄地黃)하겠소이다! 보덕스님.”
그는 차마 혈육이 있는데, 비록 비구니라 하더라도, 다비하지 말고, 무덤을 짓자는 말이었다.
“오호호, 불자님, 소승은 어미 인수보살께서 밤마다 지켜보는 데에서 피를 섞던 일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라요. 그로 하여 도선암의 여대(女代)가 소승까지 끝나고, 남대(男代)로 바뀌었으니, 이변이 아니라, 정변(正變)이 아니겠어요? 불자님 뜻을 받들어 백골이 진토 되더라도 함께해요! 불자님!”
보덕이 문득 남자의 품을 파고드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피맺히는 인연이 아닐 수가 없었다.
“보덕스님!”
그의 입에서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뺨에 열기로 엉기었다.
드디어 긴긴해가 서녘으로 추락하는데, 붉은 노을이 강심을 자줏빛으로 곱게 물들이었다. 남자가 보덕스님을 품에 안고 일어서자, 그녀는 마냥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하였다.
“오호호, 불자님, 더 넓은 세상이 보여요! 오호호.”
그녀는 팔을 뻗치고 어디론가 손가락질하면서 붉은 노을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 멀리 산과 강이 보이지요? 여기가 바로 극락이오! 아하하.”
천복도 그녀와 덩달아 더 넓은 산과 강이 보일 거라면서 여기가 바로 극락이라고, 웃음을 터뜨리었다.
“오, 그렇군요. 당신의 뜨거운 품안이 바로 극락입니다!”
그러나 보덕은 남자의 품안이 극락이라는 걸 보면, 남자의 눈과 여자의 눈은 시야에 광대함과 협소함이 달랐다. 그는 보덕을 아기처럼 안고, 산을 내려오다가 금순네 집 뒤란에 곱게 만개한 찔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이미순이 달려오더니, 천복을 끌안고, 울먹이었다.
“아즈씨, 방검 쟈혀거, 자미나기 놀았어요. 흐-흑!”
천복은 그녀가 끌안자, 함께 부둥켜안고 말하였다.
“할 수 없어. 날마다 아침엔 이층으로 와야 해!”
“오호호, 그려요! 여보.”
천인호가 아래 바깥마당에 서서 싱글벙글 웃어 보이고 있었다.
보덕은 준희의 방으로 들어간다며, 안으로 사라지고, 이미순은 천인호의 손을 잡고, 그네가 기거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는 경산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자, 경산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경산은 의자에 꼿꼿이 앉았다가 그가 들어서자, 마침 몸을 일으키는데, 석순이 부축하여 침석에 눕히고 있었다.
“으자이 오래 앉었기더 어렵다거 허셔라오!”
“그러시겠지. 앉은자리가 폭신해도, 오래 앉아있으면, 박여서 짓눌리거든요.”
천복은 반듯한 얼굴로 누운 경산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이되는 거였다.
태어나 젖먹이 적부터 경산을 따랐던 그였다. 오죽이면, 정읍댁이 그를 낳아놓자, 여섯 달쯤 젖을 빨다가 지지하다면서 나오지도 않는 경산의 젖을 빨고 자라면서 경산이 바깥출입할 때에는 줄곧 고집스레 따라다니고는 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경산에겐 팔팔한 동혁과 동수 아들 형제가 있었으나, 천복이 열 살도 못되던 해 예기치 않은 전쟁으로 그림자도 남기지 아니하고, 사라진 거였다.
그로부터 쇠털만큼이나, 수많은 날들을 얼마나 먼 길을 경산의 손을 잡고, 방황하였는지를 되살려보면, 기구망측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신령님, 소리읎이 우시네여!”
석순이 깜짝 놀라 낮은 목소리로 외치더니, 손수건을 손에 쥐고 달려들어, 그의 뺨을 타고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을 닦아내고 있었다.
“할-머-니!”
그는 목구멍에서 토사물이 역류하는 목소리로 할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그는 경산께 더는 건넬 말이 없었기에 할머니란 대명사만 격하게 외쳐 부를 뿐이었다.
첫댓글 가는 세월이 무심하겠지요
전쟁때 헤어진 큰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서 혼령으
로모셔졌지만 작은아들은 무소식에 행방불명인지
라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였지만 그도 이제는 지쳐
서 무심한 세월만 흘려보낸거죠. 두현씨의 보쌈만
아니었다면 독신녀로살아갔겠지만 그게그렇듯쉬
운 일인가요. 그리고 사나운 팔자는 어딜가든피할
수가 없지요. 사람의 운명이란 피할수도없고 거역
할수도없죠. 그래서한탄만나오고뉘우치기만하게
되지요. 게다가 세월은 유수와같이 흐르는데 모든
일이 인력으로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