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뭇한 이야기 실화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이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전방에 근무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사병의 실수로
수류탄 사고를 당해 한 쪽 팔을 잃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 중 대학에 다닐 때 사귀던
여자 친구가 병원으로 병문안을 온데서
그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몇 번이나 망설이고 기회를 엿보다가
여자 친구에게 “팔이 없는 나를 지금도 좋아하느냐?” 고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물었다.
반신반의 하면서 묻는 질문에 여자 친구는
“나는 너의 팔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너를 좋아했기 때문에 팔이 있고 없고는
상관하지 않는다.” 는 대답을 얻었을 때
정말로 천지를 다시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 친구는 그 때부터 병원 근방에 방을 얻어놓고
병원엘 드나들면서 간호에 간호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그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한 팔이 없는 사람의 팔이 되어야 하는
딸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의 딸에게 그 남자를 포기하고
새 길을 찾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랬더니 그의 딸은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 아버지가
한 팔을 잃으신다면 엄마가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 말에 아버지도 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남자와 사귀는 것을 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제대하여 한 팔이 없는 것만큼
더 큰 노력을 하여 린스와 샴푸를 합친 효과를 내는
하나로를 개발했고 20세부터 80 세까지
사용할 수 있는 2080 치약을 개발하고,
영상통화를 가능하게 한 앱을
개발하는 등의 업적을 세워통신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그가 바로 조서환 前 ktf부사장, 前 애경산업 이사
현재 세라젬헬스앤뷰티 대표 조서환씨의 이야기이다
그의 수기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다. 어찌나 공부를 잘하던지 초등학교 때 그 사람 성적을 앞선 적이 없다. 어린 마음에 ‘저 애와 결혼하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고교 졸업 직후 육군3사관학교에 입교했을 때는 연애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고1 때부터 펜팔 친구로 지낸 우리는 편지를 엄청나게 주고받으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지 얼마 안돼 오른손을 잃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입원해 있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렇지만 머리와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을 보이려니 덜컥 겁이 났다. 한 손이 없는 상태로 그녀를 어떻게 만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머릿속에 세 가지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첫째, 나를 본 순간 놀라 도망칠 것이다. 둘째,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엉엉 울 것이다. 셋째,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내 가슴이 미어질 것만은 확실했다. 연락하자니 두렵고, 안 하자니 보고 싶고. 하지만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인지라 힘들게 연락을 했다. 그녀가 왔을 때 내 왼손엔 링거가 꽂혀 있고, 오른팔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양손을 쓸 수 없어 어머니가 떠주는 밥을 먹고 있었다. 고향 뒷산에 흐드러지게 핀 산도라지꽃색의 코트를 입은 하얀 얼굴의 그녀가 통합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그 모습이 눈부시게 예뻤다. 그런 그녀가 날 본 뒤 아무 말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세 번째 시나리오가 맞았다. 병실 안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어머니는 밥을 먹여주다 멈췄고, 병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야기하라며 자리를 피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 탓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존심보다 더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만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나.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불쌍해 보일 내 처지보다 저 사람이 왜 그렇게 안타깝고 딱해 보이는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짧은 시간에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날 사랑하느냐고 묻고 싶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보내줘야 하는데 누가 나만큼 사랑해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말없이 바라만 보기를 30분째. 용기를 내어 겨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나 사랑해?”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지금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천사 같았다. 세상을 다 얻어도 이보다 기쁠까. ‘불행의 깊이만큼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만 정말 그때 느꼈던 행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왼손만 가지고 이 예쁜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텐데. 이건 너무 이기적이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만 보내줘야 한다.’ 나는 “얼굴 봤으면 이걸로 끝내자”는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그러자 아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진 당신에게 내가 필요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부턴 당신 곁에 내가 있어야 해요.” 이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큰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그때부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불굴의 거인’이 깨어났다. 모태신앙인 아내는 날 위해 매일 새벽 기도를 했고 나는 링거를 꽂은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했다. 항상 아내는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며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이후 내 인생의 목표가 된 아내는 지금까지 매일 소중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 사업상 힘들 때도 꼭 아내와 상의한다. ‘백발백중’ 명답을 말해 하나님 음성처럼 듣고 산다.
[펌글]
♠ 국숫집 할머니의 따뜻한 나눔 ♠
서울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엔 ‘옛집’이라는
허름한 국숫집이 있습니다.
달랑 탁자 4개뿐인....
주인 할머니는 25년을 한결같이
연탄불로 진하게 멸치국물을 우려내
그 멸치국물에 국수를 말아냅니다.
10년이 넘게 국수값을 2천 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무한 리필.
몇 년 전에 이 집이 SBS TV에 소개된 뒤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연을 말했습니다.
“15년 전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고
아내까지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용산역 앞을 배회하던 저는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구걸했죠.
그러나 가는 음식점마다 저를 쫓아냈고,
저는 잔뜩 독이 올라 식당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국숫집에까지 가게 된 저는
분노에 찬 모습으로 자리부터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나온 국수를 허겁지겁 먹자
할머니가 그릇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더니 국수와 국물을 한가득 다시 내줬습니다.
괜히 콧등이 시큰하더라고요
허겁지겁 두 그릇을 먹어 치운 후,
돈이 없어 계산도 안 하고 냅다 도망쳤습니다.
이 때 할머니가 쫓아 나오면서 저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냥 걸어가, 뛰지 말고, 다쳐!“
-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중에서 -
할머니의 따뜻한 나눔에
사내는 세상에 품은 증오를 버렸답니다
- 추운 겨울,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
첫댓글 초겨울 첫눈이 오고 쌀쌀한 바람이부는 하루 보내고 카페에 훈훈한 글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마지막 가는 12월에 한해를 돌아보며 행복하게 보내세요.건강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