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의 유래-16】
1931년에서 1945년 사이의 강제 집단 이민 시기
이 시기는 일본이 중국 동북 3성을 대륙 침략의 전략기지로 구축하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중국에 이주해 온 조선인 가운데는 이전 시기처럼 자유 의지로 이주한 사람도 많지만, 그보다는 일본의 침략 정책에 의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훨씬 많았다. 이들 조선인 대부분은 중국 동북 지역 개발을 위한 일본의 이민 정책에 현혹됐거나 혹은 강제로 이주된 경우였다.
1931년 9월 18일 밤,일본군은 심양에 주둔한 중국 수비 부대를 습격하고 심양을 점령하였다.
이어 요녕과 길림 두 성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11월에는 흑룡강성으로 진군했으며 거의 3개월 만에 중국 동북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리하여 중국 동북 지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1931년 만주사변 후 일본은 중국 동북 지역의 식민 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을 관할하고 동시에 한반도로부터 조선인을 집단 이주시키는 사업을 추진했다. 새로 이주하는 조선인에게 조선총독부는 주민증을 발급해 주고 이주 후에는 집단 부락에 거주하도록 하고 통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적극적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1931년에 63만 명이던 조선인의 수가 1936년에는 85만 4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일본은 1932년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집정으로 추대하여 만주국 건국을 선언하였다.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의 방침을 모두 제정하였고 일본인이 요직에서 제정된 방침을 집행하였다.
일본 관동군은 만주국 중앙 각부로부터 성과 현에 이르는 각 행정 기관에는 중국인을 관리로 등용하고 일본인을 차장으로 임명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통치를 실행하였다.
만주국이 수립된 후 만주국내 조선인의 법적 지위가 변하였다.
조선인은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어 일본 영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치외법권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만주국은 일본인.만주인.조선인.몽골인.중국인 5족의 화합 개념을 내세웠으나 민족별로 차별했다.
만주국내에서 조선인은 일본과 만주국의 이중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인은 중국인보다 더 나은 법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1930년대 초 일본은 중국 동북 지역과 몽골 식민 통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조선인을 동원하여 중국 동북 지역의 농업 자원을 약탈하고자 했다.
이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15년 동안 조선 농민 30만 세대(150만 명)을 이주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1932년 8월 일본 관동군은 조선인 이민 대책 요강과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에 대한 통제 방침을 세웠다.
이 방침은 조선인의 항일 투쟁을 탄압하며 조선 농민의 공산화를 방지하는 정책이었다. 일본은 중국 동북 지역을 한반도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조선과 중국 동북 지역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정신적 연대감과 공동의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의 서사'와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조선인만의 동질성 강조나 유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금하였다. 1932년 만주국이 건립된 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인 학교에 대한 관리를 더욱 강화하여 조선인에 대한 동화 정책을 철저하게 실시했다.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2급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요하였고, 조선인 학생은 인문 과목보다 기술이나 실업 과목을 장려 받았다.
일본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조선 민족주의 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의 온상인 민족주의 학교를 약화시키거나 강제로 폐교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 결과 많은 조선인 학생이 조선인 학교에서 일본이 후원하는 학교로 전학했다.
일본인 경제적으로 중국 동북 지역을 개발하고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1933년부터 간도 항일기지 주변 지역과 산간 지구에 흩어져 거주하던 조선인을 강제로 이주시켜 집단 부락을 건설하고 게릴라군이 활동하는 지역을 무인지대로 만들었다.
일본은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식민 통치가 비교적 안정되었다고 생각하고 중국 전체를 일본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변'을 발동하였다.
일본은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 전쟁 동안 중국 동북 지역에 병참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민 정책을 3대 국책의 하나로 삼았다. 일본은 조선인을 매년 1만 호씩 이주시켜 동북 지역의 토지개발에 투입시켰다. 중국 동북 지역 각지에 산재한 조선인을 지정된 구역에 이주.정착시킴과 동시에 조선에서 매년 이민해 오는 1만 호를 각지에 배치하였다.
이리하여 1941년~1944년 사이에 조선 농민 6만 4,887명이 중국 동북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후 '일.만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과 통치 기구를 통합한 만주국이 1938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페지하고 여러 민족을 직접 통치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만주국 통치 아래 만주국 국민이 되어 만주 정부의 통제를 받는 한편 민족 언어 사용권을 박탈당하고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조선인이 1860년대~1945년에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한 과정을 보면 이주 초기 조선인은 주로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동북 지역 이주 조선인의 분포 상황에서 이들의 출신 지역을 살펴보면 두만강 연안의 연변 지구와 인접한 목단강 지구에는 함경도 출신이 많았고 압록강 연안의 요녕성에는 평안도 출신이 많았으며 흑룡강성에는 경상도 출신이 많았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먼저 건너온 조선 북부 사람이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 가까운 곳을 차지하고 뒤늦게 건너온 남부 사람이 흑룡강성이나 내몽골로 이주한 것이다.
1910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중국 동북 지역 거주 조선인의 출신도별 순위는 함북.평북.평남.황해.경남.경북.강원 순이었다.
연변의 경우 1910년까지 이주한 조선인 대다수는 함경도 출신이었다. 함경도 농민은 구릉지 경작에 익숙했기 때문에 구릉지가 많은 연변에 정착할 수 있었다.
1910년 이후부터 벼농사 기술을 가진 조선 남부 사람들이 연변으로 이주해 와서 논농사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압록강 건너편 지역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평지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인이 이미 거주하였기 때문에 길림성. 흑룡강성.동몽골로 벼농사에 적합한 지역, 인구 밀도가 낮거나 중국 정부와 일본의 박해가 적은 지역을 찾아 다시 이주하였다.
자연 조건이 다른 지역에 비해 열악한 함경도와 평안도 주민이 가장 일찍,그리고 가장 많이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에는 한반도 남부 사람들이 다수 이주했다. 더욱이 철도가 개통되어 중국 동북 지역이 직접 연결되자 조선 이주자들은 철도를 이용해 곧바로 심양으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요녕성과 흑룡강성 각지로 이주해갔다.
두만강을 건너 연변에 도착한 조선인도 다시 철도를 이용하여 영안과 길림 지구로 이주하였다.
현재 동북 3성과 내몽고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출신 지역 분포를 보면 함경도 출신 자손이 가장 많고 다음이 경상도 세 번째가 평안도 순이다.
이 세 도 출신의 조선인들은 다른 도의 사람에 비해 수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그들만의 집단 거주 지역을 형성하였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