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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서 느껴지는 경건함의 정취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한복판에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들러볼 법한 건축물이 있다. 화려한 금색 돔으로 한껏 멋을 낸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당이다. 러시아-터키 전쟁 참전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 거대한 성당을 둘러보고 성당 입구를 나서면 그 앞의 작은 정원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산책을 하며 여기저기 구경을 할 수도 있다.
이 성당에서 걸어서 10분 이내의 거리에는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현대 미술관, 오페라 극장 등 현지인들의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도 있고, 정치의 중심지로서 국회와 대통령궁, 정부청사 건물이 모여 있는, 이른바 불가리아의 다우닝가도 있다.
이전 공산주의 시절에는 소피아의 각 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직업군이 따로 있었는데, 이곳은 주로 화가, 음악가 등 예술가들이 살았던 지역이다. 이 모든 볼거리는 바로 넵스키 성당이 위치한 넵스키 광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광장의 한편에는 무명의 용사를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이 불꽃의 맞은편에 소피아 시립미술관의 정원이 보인다. 이 정원 광장에는 멀리서 보면 잡동사니가 가득 올려진 테이블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앤티크 시장이 있다. 크지 않은 이 시장은 소피아 시에서 정말 특별한 장소이다.
1986년 소피아 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한 ‘열린 아틀리에’가 이 시장의 시작이었다. 이후에 젊은 예술가들이나 무명의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태어 팔기 시작한 것이 현재까지 시장으로 남아 있다. 이 시장은 불가리아가 불과 얼마 전까지 사회주의 국가였음을 상기시켜 주는 몇 안 되는 장소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서 파는 물건들은 정말 다양하다. 어설픈 솜씨의 무명 화가가 그린 풍경화에서부터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기념품까지 다양하게 구경하고 살 수 있다.
불가리아가 사회주의 국가였음을 떠올릴 수 있는 스탈린, 레닌과 지브코프(1989년까지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의 초상화뿐 아니라, 시대가 변했음을 보여주는 오바마, 푸틴의 초상화나 인형을 볼 수도 있다. 독일제와 러시아제 앤티크 카메라, 어느 군인의 어깨에 붙어 있었을 견장이나 훈장에서 옛 시절의 향수를 달랠 수도 있다.
다른 한 귀퉁이에서는 불가리아의 다양한 이콘화를 팔고 있다. 9세기 보리스 황제 시대에 기독교를 수용한 불가리아는 오늘날까지 정교를 국교로 하고 있으며 약 60%의 인구가 정교를 믿고 있다. 꼭 종교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불가리아인에게 이콘화는 정체성과 믿음의 상징이며,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시기를 함께 견디게 해 준 버팀목이다.
신앙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집집마다 벽에 한 점 정도의 이콘화를 걸어두는 불가리아인이 많다. 주말마다 예배를 하지는 않아도 자가용 안이나 지갑, 가방 속에 이콘화를 넣고 다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콘화(ikonopis)는 ikona(성상, 聖像)에 izpisvam(그리다, 표현하다)이 더해진 말로 동방 정교의 종교화를 주로 일컫는다. 이콘화는 3~5세기 카타콤베라고 불리는 지하 묘지에 그려진 이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래로부터 그리스인들은 어떤 이미지 속에 신비롭고 마술적인 속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유사한 신들을 묘사한 이미지가 실제의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이 비잔틴의 이콘에 내재된 것이다.
이콘이 ‘우상숭배’의 오명에서 벗어나 동방정교의 교리신학 속에 통합되는 과정은 기독교 형성 전후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잔틴 제국은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부터 이미지의 법률적인 대리물의 속성을 기독교적인 이미지, 즉 신성의 체현과 같은 기독교적 상징물의 특성으로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잔틴 이콘화의 양식은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등 주변국의 이콘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불가리아 이콘화의 전통은 864년 황제 보리스 1세가 기독교를 수용한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 생겨났다. 초창기에는 주로 비잔틴 제국의 이콘화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다가 불가리아적인 전통이 조금씩 혼합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가 플리스카(681~893)로 수도를 옮기고 다시 프레슬라프(893~972)로 천도한 긴 시간 동안 불가리아의 이콘화 전통은 더욱 독특한 고유의 기법을 더하게 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세기에 발견된 이콘 ‘성 테오도르 스트라틀라트’이다.
이는 단단한 나무 판에 금박이나 색깔을 더해 바탕을 드러내는 다분히 비잔틴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도자기 기법을 이콘에 가미한 것이다. 자기를 퍼즐처럼 제작하여 하나의 형상을 완성하지만, 밝고 경쾌한 바탕 색감을 더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형태의 이콘화였다. 그러나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는 재료의 특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이후 12~14세기 제2불가리아 왕국 시기에 이콘화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양식의 변화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는 민중적 스타일의 보다 대중적인 이콘화와 귀족을 중심으로 한 궁정 스타일의 이콘화, 두 가지 스타일이 있었다. 특히 궁정 스타일은 비잔틴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예술의 영향을 받은 보수적인 터르노보 학파의 귀족적인 스타일이 유행했다.
14세기 말부터 약 오백 년간의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에 이콘화는 기독교, 슬라브 문자와 함께 불가리아 인의 정체성을 느끼게 해 준 중요한 요소였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부흥운동을 하던 이 시기에 이콘화는 보다 민중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밝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고, 시대에 맞는 의상을 입은 인물을 배치하고, 불가리아 역사 속에 등장하는 왕이나 성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콘화가 많아졌다. 또한 이콘을 그림뿐 아니라 목각하여 이코노타시스(성화로 된 벽, 제단 쪽에 병풍처럼 마련되어 있는 이콘을 거는 곳)나 설교단, 교회의 문을 장식하기도 했다.
제2차 니케아 공회의(787년)는 구세주와 하나님의 어머니, 천사들, 성인을 묘사한 이콘화를 공경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도그마(기독교적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이콘화는 항상 신학적 의미에 부응하면서도 예술적 이미지와 품격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콘화는 가장 보수적인 예술로서(예술이 인간의 생각과 상상을 펼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면 ‘보수적인 예술’이란 용어는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표현에 제약이 있었다.
예를 들면 개별 성인을 표현할 때 포즈는 어떠해야 한다든가, 성경의 다양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성물을 배치해야 하고, 어떤 색상을 써야 하며, 어떤 회화 기법으로 그려야 한다는 등의 제약이 많았다.
먼저 이콘화의 바탕이 되는 보드는 비잔틴 시기에는 사이프러스 나무로 만들거나 러시아에서는 소나무로 만들었다. 위에는 석고를 살짝 입히거나 미세한 금박을 씌우기도 했다. 그림 위에는 아마씨유로 광택을 내어 색깔을 보호하고 프레임은 금과 은이나 보석 장식으로 화려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콘화는 대개의 경우,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체의 비율을 의도적으로 위반한다. 전체적인 포즈는 감상하는 이의 시선보다 좀 더 높게 하여 이콘화가 감상자를 굽어보는 시선처리가 많다. 이콘화의 인물은 보다 날씬하게 묘사되고 손가락과 손톱은 길게 처리된다.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의도가 없는 이상 대부분 옷에 가려지는 경우가 많다. 얼굴은 실제 인체보다 길고, 이마는 높게, 코와 입은 작게, 눈은 실제보다 크고 길게 묘사한다.
풍모도 이콘화가 묘사하는 대상에 따라서 엄격하게 제한이 된다. 예를 들면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황금의 입’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기독교 교리 설파에 힘을 썼다)는 금발의 머리와 짧은 수염으로 표현해야 한다. 또 성 바실리우스(‘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로 쓰기도 한다)는 검은 머리와 지적인 면모가 풍기는 긴 수염으로 표현한다.
1 성 바실리우스의 이콘.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 있다. 2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이콘. 터키 이스탄불의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에 모자이크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콘으로 ‘황금의 입’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화려한 금색이다. |
이콘화에 들어가는 색깔 역시 영적인 표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금색은 하나님의 빛, 흰색은 그리스도의 순결, 푸른색은 하나님의 말씀, 녹색은 젊음과 생기 등을 상징한다.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옷은 푸른색으로 묘사되고, 때로는 성모 마리아의 옷이 보라색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배경은 균등하게 표현되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림자를 넣지 않고 광대뼈나 코를 밝게 해 명암을 표시할 뿐이다.
사람들은 좌절하는 순간에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불가리아인들은 이콘화 앞에서 기도를 한다. 이콘은 그리스도 이콘, 성모 마리아 이콘, 삼위일체 이콘과 성자 이콘 등 다양하지만, 여기에서는 불가리아에서 영험(?)하다고 소문난 이콘화를 몇 가지 소개한다.
1. 트로얀 수도원의 성 모자 이콘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하는 이콘은 슬라브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이콘이 아닐까 한다. 슬라브족은 대지를 어머니로 간주했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으며 더구나 대부분의 슬라브족 민중들이 이교도적인 자연신과 융합된 ‘이중 신앙’ 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성모 마리아 이콘은 더욱 인기가 있었다.
트로얀 수도원은 불가리아 중부 오레샤크(Oreshak)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17~19세기에 지어졌다. 이 수도원은 다마스쿠스의 요한에게 일어난 기적과 연관이 있다. 그는 비잔틴 황제 레오 3세가 이콘화를 우상이라 하여 금지하자, 황제의 뜻에 반하는 주장을 해 미움을 샀다.
이때 황제는 벌로 그의 오른손을 잘라버렸는데, 잘린 손을 들고 성모에게 기도하자 손목에서 다시 손이 자라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은으로 만든 손을 성모상에 봉헌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수도원의 성 모자 이콘에는 은색으로 된 세 개의 손을 가진 성모가 있다. 이 이콘화의 기적으로 1837년 일어난 지진과 전염병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되었다고 하여 병의 치유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2. 성 니콜라이 수도원의 이콘소피아 시내의 한가운데 위치한 이곳에는 성 니콜라이의 이콘화가 있다. 이곳에 대한 전설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1월 30일 독일 편에 섰던 불가리아에 미국이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3,000여 개의 건물이 파괴되고 150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사망한 소피아 시 폭격에서 대부분의 문화유적이 파괴된 가운데 성 니콜라이의 이콘이 그려진 벽만 무사했다고 한다.
30년 전에 은으로 된 손 장식이 추가된 이 이콘 앞에서 재앙이나 불운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결혼을 앞둔 커플이 많이 기도를 한다. 이 이콘이 엄청난 재앙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겠지만 결혼생활을 무사히 지켜내려는 커플들의 바람을 들어주고 있다.
2008년 11월, 소피아의 이 작은 시장은 한 차례 위기를 겪었다. 시장 상인들의 계약이 갱신되지 않아 이 지역을 떠나라는 통지를 받은 것이다. 상인들은 탄원서를 만들어 소피아 시청에 제출했다. 2제곱미터 자리마다 150레바(80유로가량)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데 거의 150여 개에 이르는 노점이 이 세금을 지불할 예정이므로 계약을 유예해 달라는 것이었다.
소피아 시는 이 시장이 넵스키 성당 광장에 위치해 있어 보행자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해체하고자 했다. 이콘화와 예술품을 파는 상인들은 자리에 남고 다른 앤티크 제품을 판매하는 노점은 해체될 예정이었지만, 시장은 위기를 극복하고 아직 유지되고 있다.
시장이라는 것은 생명력이 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때로는 번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쇠퇴하기도 한다. 오늘날 넵스키 성당 앞의 시장은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곳은 더 이상 아니다. 3월 1일 바바 마르타(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는 불가리아 명절), 노동자의 날(5월 1일), 크리스마스를 제외하면 한가한 관광객만이 이곳을 배회할 뿐이다.
발행일 : 2017. 03.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