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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선택
잠 22:1-6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1-6 / [가난한 이를 착취하는 것들] 수많은 재산을 긁어 모으는 것보다 명예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고 이웃을 따뜻하게 대하고 아껴 주는 것이 은과 금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2) 이 세상엔 재산 많은 부자와 가진 것 없어 가난하게 사는 이가 다함께 섞여 살지만, 이들을 지으신 분은 여호와이시다. 3) 조심성 있는 사람은 위험한 일을 만나면 자기 몸을 피하지만, 미련한 숙맥은 그것을 보고도 계속 걸어가다가 마침내 화를 자초하고야 만다. 4) 여호와 두려운 줄 알아 겸손히 그분을 모시고 살면 재산과 명예와 생명을 얻는다. 5) 비뚤게 살아가는 자는 그 앞길에 올가미가 즐비한 가시밭길 뿐, 자기 목숨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은 그 가시밭길을 비켜서 지나가리라. 6)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지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라. 나이 먹어 늘그막에도 그 가르침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여기서 솔로몬은 대조를 통해 더 나은 가치를 제시합니다.
재물보다 명예(1-2) 솔로몬은 자신의 영적인 가치관에 따라 재물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라고 교훈합니다. 재물은 보이는 물질로, 명예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반영합니다. 재물은 인격과 상관없이 얻을 수 있으나 명예는 오랫동안 존중받는 인격의 산물입니다. 은이나 금으로 명예를 쌓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쌓을 수 있기에 명예가 재물보다 소중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는 극명한 차이를 드러냅니다(눅 16:20-31). 그러나 이들 모두 공통분모를 가집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들 모두를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근거해 재물이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3) 슬기로운 자는 선견지명으로 재앙을 예견하고 피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위험을 감지할 능력이 없어서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겠습니다(행 27:10-11).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4-5) 겸손과 경외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며 경외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패역한 자의 길에 있는 ‘가시와 올무’는 역경에 대한 비유입니다. ‘패역한 자’는 마음이 비뚤어진 자를 의미합니다(11:20; 12:8). 패역한 자는 지혜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 악으로 달려가다가 역경을 만납니다(1:16).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경고를 받고 가시와 올무를 피해 안전한 길로 나아갑니다.
아이에게 가르치라(6) ‘가르치라’(히. 카낙)는 ‘바치라’는 뜻입니다. 물건이나 사람을 하나님께 바칠 때 이 단어가 종종 사용됩니다. 부모는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심정으로 경건한 아이로 훈육해야 합니다. 이렇게 훈련받은 아이는 잠시 바른 길에서 떠날지라도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적용: 위의 목록들을 당신에게 적용해 보고 당신이 과연 지혜로운 사람인지 평가해 보세요.
성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기여하고 나라와 민족에 기여하고 인류에 기여하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일을 할 때 그가 참으로 성공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더라도 나 아닌 타인에게 기여하고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 설 교 >
어느 초를 사시겠어요?
잠언 22:1–6 / 김상복목사
두 주 전에 일본 중고등학생 열 명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저를 찾아와서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아마 영어훈련을 겸해 저를 찾아온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여기에 큰 초, 중간 초, 작은 초가 있다. 그 가격이 모두 같다면 너희는 어떤 초를 사겠는가?” 한 아이는 중간크기의 초를 사겠다고 합니다. 예쁘기 때문이랍니다. 작은 초를 사겠다는 아이는 자기 방이 작아서 작은 초가 맞을 것 같다고 했어요. 제가 목사님 8백 명과 사모님 1천2백 명의 모임에서도, 다른 평신도 모임에서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큰 초를 사겠다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한국 사람이 현실적입니다. 똑같은 가격이면 큰 초를 사서 오래 쓰는 것이 맞습니다.
어린 아이 한 명에게 전도하는 것은 큰 초를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위해서 같은 노력을 들이고 훈련을 한다고 할 때, 어린 아이를 잘 키워 놓으면 그 아이가 70, 80년 동안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 가정에 축복이 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4-14 Window’ 즉 4~14살까지의 어린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제일 쉽게 열고,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믿고, 쉽게 헌신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생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간증문을 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4살 때 예수를 믿은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명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그가 4살 때 잠을 자는데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어 놀라 잠을 깼답니다. 너무 무서워 엄마 방으로 달려 들어갔어요. 엄마가 그 아이를 끌어안고 물었어요. “왜 무섭니?” “천둥소리가 너무 커서요.” “앞으로는 두려워할 필요 없어. 예수님이 네 마음속에 계시잖아.” 엄마는 아이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네 마음속에 영원히 함께 하시면 어떤 일이 있어도 겁낼 것이 없단다. 지금 예수님을 네 마음에 초청할래?” “그럼요!” 그날 밤 어머니의 기도에 따라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셨습니다. “나는 그 이후로 오늘 이 시간까지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신학교에 왔습니다.”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들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그들이 고등학교, 대학교에 가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하도록 해야지 부모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스무 살이면 늦습니다. 4살부터 14살까지는 금방 알아듣습니다. 마음이 깨끗하잖아요. 예수님도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자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단순한 신앙, 아이와 같은 믿음이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어른들 가운데 세워놓고 “이 아이를 보라. 이 정도 돼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고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온 교회가 아이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위하고 잘 양육하는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기를 원합니다. 아이 하나를 잘 이끌어주면 일생을 낭비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이웃과 교회를 섬기며 사회에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출산율이 매우 낮습니다. 작년에 전 세계에서 아이를 제일 낳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 가정 당 1.08명을 낳습니다. 자기를 대체시켜 놓지도 않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나와 내 아내를 주셨는데 나와 아내를 대체할 수 있는 자녀 두 명도 낳지 않아서 이 세상에 손해를 끼치고 끝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1:28) 하셨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을 많이 증가시켜 이 땅을 변화시키고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공헌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받은 것보다 더 감소시키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출산율이 지금처럼 계속되면 2500년에는 한국 인구는 33만 명만 남는다고 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문화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아서 5백년 후에 우리 후손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부부에게 사무엘의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아이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기를 갖고 싶어 성전에 가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한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야 말로 행복한 아이입니다. 평생 행복한 자녀가 될 것입니다. 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원하는 것도, 출산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중에는 자녀를 이미 다 출산하신 분들이 많지만, 앞으로 우리의 아들딸들이 결혼해서 낳을 손자손녀를 위해 미리 기도하고 계획하여 예수 믿는 젊은이들의 가정에 많은 생명의 열매들이 있기를 원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127:3-5).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을 영적으로 잘 키우고 무장시키면 자신과 그의 가정과 가문, 사회, 국가에 큰 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한 사람이 태어나서 결혼을 하면 최소한 3대(代)를 책임지라고 합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잘 알고 마음에 두며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랑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먼저 ‘나’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나도 부모님처럼 저렇게 하나님을 섬겨야지!”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세대인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그분을 예배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몸부림 치고 수고하는 결과는 “네가 복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삶으로써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 축복과 번성의 은혜가 나의 세대에 먼저 나타나고 우리 후손들에게도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훈련하라”고 했는데, 무엇을 훈련하는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자기 사랑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위사람을 섬기는 모습이 여러분 속에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위사람들로부터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나서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저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라”고 하는 소문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가치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라고 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1절).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걸을 때나, 어디 있든지 우리의 삶을 통해서 가치의 우선순위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성공도 선택, 실패도 선택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작은 것부터 좋은 선택들을 해 왔습니다. 좋은 것을 선택하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고,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눈을 키웠습니다. 악과 선 중에서 선을 선택할 줄 압니다.
좋은 것이 있는데도 나쁜 것을 선택했다면 스스로 불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그저 좋은 것을 선택했다면 그것도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 늘 선택해야 합니다. 숙제를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 아침밥을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거짓말을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 좋은 친구를 선택할 것인지 나쁜 친구를 선택할 것인지, 열심히 공부할 것인지 대강대강 할 것인지, 작은 일에 충성할 것인지 큰일에만 충성할 것인지, 늘 선택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인생도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물질을 선택했다가 물질도 명예도 잃고 가문에 수치를 안기고 사회의 비난을 받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앞으로 가장 좋은 선택을 꾸준히 하시기 바랍니다. 또 “금은보다도 은총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선택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셔서 언제나 최선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옵소서.” 너무 중요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꾸준히 하면 망합니다. 작아도 꾸준히 좋은 선택을 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십니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2절). 우리를 우리의 모습으로 지어 주셔서 우리가 우리 된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요, 나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요,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의 최고의 목표로 알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지혜를 추구하도록 아이들을 훈련시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제가 참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지식도 중요하지만 지식 위에 지혜가 있습니다. 지식은 들어갈수록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지혜는 작은 지식을 가지고도 어떻게 인생을 효과적으로, 성공적으로, 축복되게 사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자손들에게 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어떤 자에게 주십니까?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이 모두 지식보다는 지혜에 충만한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세상에서 일류학교 나온 사람들만 성공합니까? 일류학교를 졸업하고도 헤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아는 60세가 넘은 마취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일이 들어오질 않아요. 마취과 의사는 혼자서 병원을 개업할 수가 없습니다. “잠 좀 주무시고 싶으신 분 오십시오!”라고 할 수 없지요. 외과 의사가 일을 줘야 할 수 있는데 60세가 넘은 분에게 일을 주지 않아요.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저를 찾아 오셨어요. 제가 그때는 40세 밖에 안 됐습니다. 그런데 60이 넘은 분이 제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웁니다. “제가 00의과대학을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나만큼 의학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외과 의사들이 저에게 일을 주지 않아서 겨우 응급실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선생님, 일류의과대학 1등으로 졸업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모자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외과 의사들과 잘 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만 강조했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공부를 안 하셨습니다. 사람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의과 책을 보고 공부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그 정도 지식이면 충분합니다. 남은 생애에 전적으로 사람 공부를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지식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지혜가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잘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지혜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나 손자들을 돌볼 때 지혜로운 아이가 되게 해달라고 그 귀에 대고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지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은 지식시대입니다. 지식이 넘쳐흘러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책 10권만 사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정보 검색을 하면 전 세계의 정보가 다 나옵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3절).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입니다. 자손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주여, 이 아이를 예수님처럼 키워주시옵소서. 건강하고 지혜롭게, 사람과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으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만 사랑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 받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도 사랑을 받고 총애를 입어야 합니다. 어떻게? 책을 읽고 배우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자녀가 좋아할지, 남편이, 아내가, 친구와 동료들이 좋아할지 평생 부지런히 배워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지식은 조금 부족해도 우리 자녀들이 지혜로 이 땅에서 축복받고 성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면 모든 좋은 것을 받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4절). 하나님이 없으면 교만해집니다. 자기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똑똑하고 잘 되고 성공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면 그 결과가 첫째는 재물, 둘째는 영광, 셋째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땅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후손들이 어릴 때부터 가르쳐 줘야 합니다.
다음에는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자와 무시하는 자가 다름을 가르쳐야 합니다.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5절). 이 땅에서도 자기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영혼을 계발하고 풍요롭고 성숙하게 만들려고 꾸준히 노력하면 고생이 덜 하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언제 훈련해야 하는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6절). 우리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과 자신을 사랑하고,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선택할 줄 알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 보다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자시요 아버지이심을 믿으며 살고, 지혜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외함으로써 겸손하게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고, 영혼을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서 평생 낭비와 방황이 없고, 쓸데없는 고난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의 축복과 이 땅의 축복을 함께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부모가 먼저 그 삶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본이 되며, 지혜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치고 성공적인 방법과 더 나은 가치를 가르쳐서 부모가 이 땅에서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그 자손들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영원히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누리게 되길 원합니다.
명예와 은총
잠 22:1 / 김종택 목사
>>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렇게 산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도 명예를 지키며 살고싶은데 도저히 사정이 그렇지 못해 그냥 살아남기 위해 불법도 저지른다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그러한 인생관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벌기 위해 신앙 양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를 생각하면 우리가 생존을 위해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거지 나사로는 남몰래 죄를 범하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나사로가 맘만 먹었다면 극단적 수단을 통해서라도 돈벌어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 남자도 몸팔고, 젊은 여자도 몸팔아 돈벌어 살아남은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보다 더한 죄를 범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차라리 남의 집 대문에서 구걸하며 살지언정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천국에 갔던 것입니다. 그는 먹는 게 부실하여 몸이 점점 허약해져 병들어 죽은 자입니다. 나사로를 인간취급하지 않았던 부자는 아마 너무 잘 먹어서 성인병으로 급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는 지옥에 갔고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어거스틴이 과거 자신의 문란했던 생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을 때 ‘주어 읽으라’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성경을 들어 펼쳐 읽었는데, 그게 바로 로마서였고, 그 내용은 음란을 비롯한 모든 더러운 행실을 버리고 깨끗한 새 삶을 살라는 거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따라 그대로 행하여 자신의 모든 더러운 과거의 삶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기독교 세계의 기둥과 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저의 신앙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목소리도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습니다. 고 3 여름방학 때 제가 점심 때 쯤 교회 안에 있었는데, 밖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말 가운데 어느 한 아이의 말이 제 귀에 들어왔습니다. “주일에는 일하지 않는대.” 이 말이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주일에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에 할 일이 정 없으면 그냥 푹 쉬었습니다. 대학 때 기독교 써클에 들어가서 주중에도 엄청나게 시간을 많이 뺏기고, 교회의 청년부 예배를 포함해 수요 예배와 주일의 모든 정규예배도 빠짐없이 드려서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도 주일에 절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주일날 공부 안 해서 엄청나게 손해 봤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저의 결연한 신앙태도가 제게 많은 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주일에 제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모든 장래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더군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자!’ 여러분, 어설프게 신앙생활하며 반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게 되면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아예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비로소 강 같은 평화가 임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했던 것은, 제 어떤 친구는 한달 전부터 미리미리 엄청나게 공을 들여 시험을 준비하고도 시험지를 받으면 앞이 깜깜해지고 지금까지 외웠던 게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고 제게 불평을 늘어놓더군요. 그런데 저는 시험 전날 부랴부랴 요약 준비하여 같은 시험을 봐 A+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는 특별한 경우이고 이런 저런 이유로 저는 D0에서 A+까지 학점의 폭이 매우 넓습니다. 인격의 폭이 그만큼 넓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저는 F는 단 한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세월을 아껴야지요.)
여러분, 신앙은 한 순간의 결단입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우리는 먼저 돈보다 명예를 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명예와 건전치 못한 체면을 혼동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자기가 양반입네 하고 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처자식들 쫄쫄 굶긴 적이 있습니다. 돈 버는 것을 천히 여긴 죄로 많은 고생을 한 것이지요. 세상에서 정말 귀한 일은 열심히 일해 처자식 먹여살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거룩한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불의한 재물을 얻기 위해 양심을 팔지 말라는 말입니다. 명예는 영광스런 이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러나 발람은 많은 재물을 따라가려다 나귀만도 못한 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를 보세요. 그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었고 그에게 선물을 받아도 그리 흠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그것을 받으면 여러 선지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나아만의 선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뭘 받으시기보다는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에서 기쁨을 누리시는 분임을 이방인 나아만에게 알려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로부터 병고침을 받고 가져온 온갖 귀한 물품을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에게 답례로 주었다면 그에게 더 이상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가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값을 지불했으니 관계가 끝났다는 말이지요. 물건값을 치르고서도 여전히 상점 주인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값을 지불하면 자유로운 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엘리사는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먼 길 찾아온 나아만에게 은혜만 베풀고 대가는 받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높이는 효과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인들 같으면 얼싸 좋다 하고 선물을 받았을 터인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엘리사는 그 좋은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나아만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고 엘리사의 하나님을 자기 신으로 섬기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나아만이 봤을 때 분명 엘리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뭘 받으시기보다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나아만이 황송해 하는 태도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이게 다 돈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속깊은 하나님의 종 엘리사의 작품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은 돈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돈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겠다는 목회자는 반성해야 합니다. 어느 도시 기독교 연합회에서 유명한 부흥회 강사 목사를 초빙하여 연합부흥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사 목사는 무리하게 교회를 크게 지어놓고 큰 빚더미에 앉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이 강사 목사가 부흥회 설교 전에 실행부 목사님들에게 사례비 흥정을 했는데, 주최측에게 힘에 겨울 정도의 금액을 요구하더라는 겁니다. 그렇게라도 돈을 벌어야 교회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봅니다. 돈이 웬수입니다! 예수께서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성직자가 병을 고쳐주거나 축복기도 해주면 안됩니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해야 합니다. 돈을 받아 하나님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판단되면 그것을 받으면 안되지요. 우리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명예는 바로 ‘돈보다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하며 산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돈을 벌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평신도나 성직자는 정말 치욕적인 인간입니다. 기독교인 딱지를 달고 세상 사람들의 돈을 떼어먹거나 사기치면 안됩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선지자 사무엘을 도움을 청하러 찾아갔을 때 약간의 예물을 준비해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종이 그것을 함부로 거부하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왜냐하면 평신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종에게 예물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무슨 권한으로 그 제물에 퇴짜를 놓습니까? 따라서 혹시 교회에서 아주 가난한 평신도가 큰 예물이든 작은 예물이든 하나님의 종에게 드리면 하나님의 종은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고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엘리사의 경우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의 선물을 사양함이 나아만의 신앙을 더 견고케 하고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 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경우는 이와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가 돈보다 명예를 더 사랑할 때 우리는 열심히 벌어놓은 돈을 가지고 선한 일에 사용합니다. 여러분의 돈이 여러분을 선한 자로 만들어 여러분의 명예가 자손 천대까지 미치게 하십시오. 귀한 향유를 예수께 부어드린 여인처럼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데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데 여러분의 재물을 많이 쓰면 여러분의 이름은 세상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영예로운 이름이 됩니다. 역사를 보면 기근 때 사람들이 굶어죽는 상황에서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많은 자들의 목숨을 구한 선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가 돈보다 명예를 더 사랑한 자입니다. 여러분 중에 해외 선교사님들에게 많은 후원금을 대주시는 분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돈보다 명예를 더 사랑하면 그게 가능합니다. 영예로운 이름은 우리의 영원한 면류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사랑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은이나 금은 누구나 다 아는 것들이고,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은총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은총이란 ‘나에 대한 호감도’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은총은 grace라기보다는 loving favor입니다. 엘리사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지요.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자기가 제공하는 선물을 사양했을 때 그에 대한 굉장한 호감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구두쇠보다는 넉넉하게 베풀 줄 아는 자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돈보다 명예를 더 중시하는 자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이 후히 넣어주는 상점 주인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낮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자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빚을 면제해 주는 자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번 돈을 사회에 기부하는 자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이익을 사원들과 함께 나눌 줄 아는 사장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사랑하라는 말씀은 돈 문제로 나에 대한 타인의 호감이 달아나게 하지 말라는 말이고, 나에 대한 타인의 호감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재물을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생각지도 않은 도움을 받기도 하고, 인격이 좋은 사람으로 점점 소문이 나서 선거 때 좋은 자리에 당선되기도 합니다. 돈을 멋대로 사용하여 타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이렇게 돈을 사용하여 타인의 인심을 얻으면 얼마나 지혜로운 자입니까? 우리가 금이나 은보다 나에 대한 호감을 더 사랑한다면 진정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불법적 경제행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누가 불법을 저지르는 자에게 호감을 가집니까? 사람들이 우리에게 많은 호감을 갖고 존경하면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호감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하나님의 호감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감보다 금이나 은을 더 사랑하는 자는 죄를 지으면서까지 돈을 긁어모으려 할 것입니다. 호감보다 금을 더 사랑하는 자는 가난하게 살 때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보다 금보다 은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되도록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복보다 영적인 복을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1억짜리 수표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을 더 사모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며 우리는 더욱 기뻐해야 합니다. 1억짜리 수표보다 하나님의 계명이 더 귀해보여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여러분의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돈이나 금보다 명예와 은총(타인의 호감)을 더 사랑할 때 재물이 우리에게 복이 되며 그 재물로 인해 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한 자가 됩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재물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바른 재물관을 견지하시어 하나님께 인정받고 더욱 큰 복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재물보다 명예를
잠언 22:1- / 홍종일 목사
잠언의 뜻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훈계가 되는 짧은 말’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잠언이란 말이 ‘비교하다, 다스리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 책이 주로 선과 악, 지혜자와 우둔한 자, 하나님을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비교를 통하여 인생에 교훈을 주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붙은 모양입니다.
잠언서 일장에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되어 있지만 잠언서의 저자는 한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의 잠언을 지은이는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히스기야가 후대에 솔로몬의 잠언을 모아서 기록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원저자는 솔로몬이지만 편저자는 히스기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 말고도 여러 저자의 글들이 모여 있습니다. 잠언서를 보면 제목 쪽에 아굴의 잠언이니 ‘르무엘 왕을 훈계한 잠언’같은 소제목이 나오지만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지혜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지혜를 적어 놓았다는 겁니다. 여하튼 잠언서에서 솔로몬이 지은 총 375개의 경구가 있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볼 말씀은 360에서 363번째의 경구입니다.
자, 잠언서에 대해서는 이만큼 살펴보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재물보다 명예를
먼저 1절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원문을 살펴보고 연구를 하지 않아도 한눈에 뭔가 인생의 현기가 보여지는 그런 글입니다. 오랜 삶의 지혜가 들어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물’이나 ‘은’이나 ‘금’은 모두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같은 뜻입니다. 부요함, 부자가 됨이란 말입니다. 명예는 원문으로는 ‘이름’을 말합니다. 이름.
유대에 이름은 단순히 아무개라고 부르는 호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와 평판, 특질같은 복합적인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라고 하면 구국의 장군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만으로도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명예는 사람들의 평판이나 인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돈 벌어서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라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1절 하반절에는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은과 금보다 은총을 택한다는 말에서 은총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호의나 좋은 평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이거 설교시간이기는 하지만 그냥 전래동화니까 그 뜻만 생각합시다. ‘나뭇꾼이 저수지에 도끼를 빠뜨려서 울고 있을 때 산신령이 나타나서’ 로 시작되는 전래동화에서 산신령이 나뭇꾼을 보고 정직하다고 칭찬하면서 금도끼하고 은도끼까지 같이 챙겨주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부자가 될려고, 돈을 벌려고 불법에 탈법에 온갖 잔머리를 굴리기보다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한 자가 되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모든 길흉화복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자에게 하나님이 상을 주십니다. 포상, 정직에대한 포상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끔가다가 ‘아무개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받는 자가 되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물질에 관대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너무 남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고 은혜를 베푼다면 우리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인정하셔서 더 큰 일로 맡기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옜날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돈은 잡으러 가면 도망간다”
물질에 관대하고 정직한 이를 당연히 사람들도 높게 평가하고 그의 덕을 칭송할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아들이 칭찬을 받으면 부모가 기뻐하듯이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기뻐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고 만드셨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해서 칭찬받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마음에 흡족하시면 우리에게 아낌없이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재물이나 금은을 쌓아놓아도 우리 하나님이 한번 흔드시면 삽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악업으로 쌓은 부가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시키면 어쩔겁니까?
천벌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마지막으로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오해한 것이므로 머쟎은 때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토정비결에 보면 3가지 재수가 나옵니다. ‘재수 좋다’의 재수가 아니라 재해를 말하는 겁니다. 관재수, 손재수, 구설수. 사람들의 말이 쇠도 뚫는다는 말 혹 들어보셨습니까?
아이고 아무개는 못쓰겠다 어쩌겠다. 천벌을 받을 * 이런 식의 말이 얼마나 무서우면 쇠도 뚫는다는 말이 나올까요?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택하고 당장의 물질보다 사람들의 평판을 택하기를 바랍니다. 명예라는건 정말 지키기 어렵습니다. 요즘 고위 공무원들을 임명하기 전에 하는 청문회를 보면 참 많이 웃기지요.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여서 고위 공직의 후보자가 되었지만 그 동안의 삶이 까발려지고 난도질당할 때 민낯이 드러날 때 그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비난을 듣는 후보자들의 얼굴을 한번 보셨나요?
자칫하면 한자리 하지도 못하고 일생동안 쌓아올린 명예가, 이름값이 그대로 추락하고 오히려 수욕을 받을 수 있지요. 저야 뭐 한자리 할만큼 유명하지도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청문장에 섰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니 하나님의 심판정에 서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평판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 기독교인 중에서도 인생을 제대로 살지 않았다가 나중에 망신을 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본 기억이 납니다. 이름은 관두고 어떤 분이 대법원장 서리가 되었습니다. 국회에서 통과만 되면 대법원장이 되는 겁니다. 이제까지 대법원장이 되려고 국회에서 투표를 했지만 통과하지 못한이가 아무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분도 무난히 통과될 걸로 생각했겠지요. 비록 언론에서 그 사람의 결격사유를 늘어 놓아도 그 정도 흠이야 사람이라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솔직히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모릅니다. 그래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국회 투표에서 그만 떨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제 기억에 남는게 뭐냐면 그때 마침 그가 다니던 교회의 예배 중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기자들이 예배를 마치고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예배당 앞에서 묻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그는 묵묵부답이었답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투표가 진행되던 순간에 뭐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에게로 연결되어 집니다. 우리가 잘하면 그가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습니다. 자행자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궁정에서 공을 세우면 우리가 상을 받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습니다. 단순하지만 명확합니다. 하나님에게 용서는 있을 수 있지만 잘못했는데 오히려 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요즘 많은 교인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그 능력이 무서워서 그를 경외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복 받으려고 믿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복이 중요하지 바른 생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정에서는 바른 생활 사람이 되는 것이 물질을 얻어 부유해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람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신외지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돈이고 뭐고 이건 다 ‘나머지’에 들어가는 겁니다.
물질은, 은과 금은 사람이 살기위해 필요한 것이지 은과 금 때문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자본주의에 세뇌되어서 은금을 지상 제일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던져서 이름을 사십시오. 재물을 던져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십시오.
2. 빈부가 함께 거하나
2절에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속에서 우리는 인생이 가난하나 부하나 모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결코 전혀 다른 인종이 아니고 동일한 인류라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입니다. 평등이 여기 들어있습니다.
뭐 옛날에는 사실 신분에 따라 차별했지 빈부에 따른 차별은 사실상 별로 없었지요. 단지 돈을 아주 밝히는 유대인들은 그때부터 돈이 곧 신분이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조선시대 중인들 중에서 양반보다 더 부자인 자들이 많았습니다. 역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밀수를 하면서 부를 축적한 이들이 많았지요. 그러나 신분상 중인이기 때문에 큰갓 대신에 반갓을 쓰고 기왓집이 아니라 초가에 살아야 했고 벼슬길에 나서지 못했다가 요근래 들어서 재벌이라고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떠받드는 분위기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런 뻔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게 있습니다. 뭐냐면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나쁘고 압제하는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라고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잠언에서 특히 부자들을 사악한 자의 전형으로 묘사한 일이 많습니다. 아마 당시 실제로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사기를 치거나 압제하거나 부당하고 불법적인 일로 부자가 된 자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가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사람이고 욕먹을 자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라고 해서 반드시 그가 선한 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뿐만 아니라 부한 자도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떨어져서 별개로 살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함께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사는 동네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어차피 한 공동체에서 서로 교류하며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부자도 빈자도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빈부를 우리 하나님이 내신 것입니다. 인생의 길흉화복이 모두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3.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3절에 보면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여기서는 슬기로운 자의 신중함과 어리석은 자의 경솔함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원래 잠언서가 항상 대비를 통해서 교훈을 주는 경구들을 적어놓았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그런데 슬기롭기 때문에 신중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신중했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어리석은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경솔했기 때문에 어리석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슬기로운 자니 어리석은 자니 이렇게 관념상 나누지만 항상 슬기롭고 항상 어리석은 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중함과 경솔함이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나누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의 ‘슬기롭다’는 말의 원뜻에는 ‘약삭빠르다’ ‘교활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물론 지혜롭다는 말로도 쓰입니다. 그리고 ‘해를 받느니라’는 말에는 아주 깊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잠언서가 성경이 되는 겁니다.
궁금하시지요? 도데체 무슨 소리를 하는고?
‘해를 받는다’는 말에는 ‘벌금을 부과받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불법을 저질러서 그 벌로써 벌금을 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지요?
예, 이렇게 보십시다. 우리가 슬기롭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닏. 그런데 지금 아무 생각없이 본능에 맡기고 쾌락에 탐닉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잊어버리고 마치 오늘만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의 공과에 따른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재빨리 태세를 전환하고 바른길로 가는 겁니다. 어리석은 자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들어도 귓등으로 듣고 무시하고 이대로 가면 멸망이 코앞임에도 타성에 젖어 그냥 내일 바꾸지 다음주에 바꾸지 하다가 정해진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겁니다. 경고를 듣고도 내일 내일 하다가 그렇게 살다가 심판을 받는 겁니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곤욕을 치르는 겁니다.
그게 바로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나누는 기준입니다. 우리네 인생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우리네 삶의 공과에 따른 하나님의 상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괜찮다 괜찮다 복준다 문제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바로 알고 회개함으로 다가올 심판을 막는 것이 바로 슬기로운 자의 본질입니다.
예루살렘성이 포위됙 남은 모든 국토가 점령된 상태에서도 괜찮다, 승리한다는 소식만을 강요한 유대의 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 같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삶의 지혜를 따라 손실을 막고 더 부자가 되고 약삭빠르게 행동해서 출세하고 이런걸 지금 말하는게 아닙니다. 여기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이 계심과 그가 상과 벌을 주심을 알고 믿고 이걸 피하느냐 아니면 ‘무슨 하나님이 있기는 뭘있어?’ ‘심판은 뭔 심판?’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서 부득부득 멸망길로 가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습니다.
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겸손하기는 한데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사람, 사람은 참 좋은데... 예수만 믿으면 더 바랄나위가 없는데...”
이런 말은 신앙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겸손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자기의 신념을 의지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해서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필요없다고 여기는 교만한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앞에도 당당한 의인이므로 예수의 대속이 필요없다고 여기는 교만한 자입니다.k
비록 겉모습에 겸손으로 도배를 해도 그 내면은 지극히 교만한 자입니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고 내가 지낸 행위가 너무나 공명정대하므로 예수의 변호가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자입니다. 보혜사 예수를 부인하는 자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떻게 승소할 수 있을까요?
우리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피흘림에 대한 감사로 시작합니다. 그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인정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인생이 모두 죄인이라고 믿습니다. 큰 죄도 있고 작은 죄도 있고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을 수 있지만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가 없다면 우리는 죄인으로 판정되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바르게 산다고 살았고 남을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에 부족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여 이 죄인을 용서하시옵소서! 그리스도의 보혈공로로 이 죄인을 구속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해서 아버지를 경외하며 아버지의 가르치신 법도를 좇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여호와를 경외함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겸손입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붙이면 이렇게 됩니다.
아버지여 제가 아버지의 그 전능하심과 거룩함을 보오니 저는 너무나 부족한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시고 그 피로 저의 죄를 씻으사 구원하심을 감사합니다. 솔직히 제가 일생을 아버지의 법을 지켰고 형제를 사랑했고 아버지의 일에 헌신했지만 그걸로는 도저히 아버지께서 저에게 베푸신 은혜를 갚을 수 없나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때요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겸손이 되는 겁니다. 처음 성령받는 표시는 바로 회개의 눈물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령 충만의 표시는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추악한 날같은 죄인도 구원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내 행위를 자랑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수고하고서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런게 바로 겸손입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감사를 알려고 하면 먼저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이 그냥 온 게 아니라 그 전에 처절한 고통과 수욕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우리를 위해 이겨내신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그걸 느껴야
비로소 우리는 그가 나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느끼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이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이신 예수의 몸이 무슨 고통을 느끼겠냐? 괜히 요식행위지 무슨 십자가 고통이 그렇게 참지 못할만큼 이겠냐?
요즘 말로 하면 예수의 몸이 아니라 예수의 아바타가 유희로 인간 코스프레를 한거지 그게 뭐 그렇게나 힘들겠냐?
‘토리노 성의’라는거 혹시 들어보셨나요? 그거는 가짜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짜는 가짜지만 당시의 십자가 형벌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진실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 당대의 것은 맞는 모양입니다.
토리노 수의를 보면 사람의 형상이 흐릿하게 찍혀 있습니다. 아마 사람 몸에서 나온 기운이나 진액 기름정도로 찍힌 형상입나다. 그래서 이 수의, 시체를 감쌌던 천조각에 사람의 형상이 새겨진 이유가 뭐냐고 한때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뭐라고 결론을 내렸는고 하니 인간의 온갖 진액과 고통이 만들어낸 기나 그런 것같은 현상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답니다. 이 수의에 한 사람의 형상이 마치 기름으로 그린 것처럼 찍혔는데 이걸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했더니만 그 몸에 빈틈이 없이 채찍에 맞은 자국이 있더랍니다. 그리고 두손과 두발에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이 있고 머리에 뭔가에 찔린, 마치 가시면류관을 씌운듯한 흐릿한 기름 도장같은게 있더라는 거지요. 저도 사진을 봤는데 솔직히 그걸 보는 순간에 그 사람이 당했을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바로 느껴집디다.
그냥 못자국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이미 실신할 정도로 채찍으로 수도없이 갈긴 겁니다. 그 당시의 채찍에는 가죽끈의 끄트머리에 납같은게 달렸답니다. 그래서 채찍을 휘두르면 이게 사람의 몸에 감겼다가 풀리면서 사람의 살점을 움푹움푹 패이게 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살점이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회초리를 맞는 것 같은 고통에다 살점이 떨어지는 고통으로 이미 몽롱하게 되는 겁니다. 일종의 가사상태... 인간고통의 극한까지 가는 겁니다. 거기다 그 모욕감은 정말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게다가 든 배신감은 또 어떻습니까? 이걸 다 겪으시고 비로소 부활의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사망 권세를 깨신 겁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므로 사망이 그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사망 권세에 사로잡혀 이걸로 위협하는 사탄의 손아귀에 좌우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없는 죄인들의 행렬을 보다 못해서 우리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고 하나님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고통당하게 하셔서 죗값을 치르는데 조금도 반칙이나 특혜가 없도록 조치하신 것이지요.
이걸 알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진실 앞에서도 내가 잘나서 구원받았고 내가 잘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지요. 절대로 없습니다.
이제 본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그 은혜에 감격해서 그 은혜에 감사해서 주를 섬기고 그의 명령을 지켰는데 내 아버지 하나님은 거기에 보상까지 더해 주십니다. 재물과 영광과 생명.
1절을 다시 보세요.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재물을 택했다면 아무것도 없었을 터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과 그의 사랑과 헌신 앞에서 겸손하자 명예에다 재물까지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게다가 여기 생명이라는 말은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쓰여졌습니다. 우리 식으로 생명들, 생명이 한두개가 아니라는 거지요.
히브리어로 이렇게 쓰이면 그냥 단순히 목숨이 붙어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원기왕성하고 건강하고 즐겁고 활기차며 사랑받고 사랑하는 그런 생명, 생명력이 왕성해서 주변 사람들이 그와 접하기만 해도 기쁘고 힘이 넘치게 되고 위로 받고 그리고 또 주어진 사명을 완벽하게 잘 완수하게 되는 그런 멋진 생명을 말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tv에 나오는 공익광고의 모델 있쟎아요, 그런 외면에다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내면을 가진 안팎이 건강하고 충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을 보상으로 주신다는 겁니다.
제가 돈이 별거아닌 것처럼 설교하지만 우리는 인간인고로 어느 정도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여 그의 사랑에 감사하고 또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낼 때 재물 때문에 곤란을 겪거나 걱정하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을 경외할만 합니까?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항상 겸손하고 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제가 잘고있고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에 아마 틀림없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혹 교만하여 나도 모르게 우쭐하여 선 줄로 생각하여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은 신자를 넘어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특히 이 정관에 마귀의 세력이 아주 셉니다. 앞산에도 뒷산에도 절이 있지요? 게다가 바닷가에는 유명한 굿당이 있습니다. 참 척박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영광이 그 찬란한 빛이 비춰서 이 정관 땅의 어둠을 물리치는 부활의 아침을 무사히 잘 맞이하도록 겸손하고 조심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겸손하고 감사하는 일주일을 보내시고 다음 주에 부활의 영광에 기쁨으로 참예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겸손의 가치!
잠언 22:1-5 / 崔仁根 牧師
성 부라더 로렌즈 수도사는 어느 날 제일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수도원에 원장으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가 문제 많은 수도원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수도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노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입니다. 노수도사는 즉각 이 수도원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노수도사는 "네! 그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노수도사는 한 달, 두 달, 석 달, 계속해서 접시를 닦았습니다.
접시 닦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부임한 초자라고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대단했습니다. 석 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 차 나왔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쩔쩔매며 감독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감독의 눈에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하고 파송했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啞然失色(아연실색)했습니다.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수도사의 죽기까지 낮아진 겸손의 도를 따라 그렇게도 문제투성이였던 수도원이 가장 모범적인 수도원으로 변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잠 22:4 /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바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겸손의 가치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치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과연 그 무엇이 이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 있을까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성 어거스틴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 같은 말 하나를 남겨 두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스승님, 신자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겸손이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도 겸손이네.” 그렇다면 세 번째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로 겸손이네.”라고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의 가치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겸손의 가치를 알고 겸손한 성도가 될 수 있도록 가슴 깊이 오늘의 말씀을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하면 재물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잠 22:4 /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우리들이 누리는 재물은 우리들의 능력과 재주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착각하지만 제대로 하나님과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는 결코 그렇게 주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에 대해 선언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신 8:16-18 /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이와 같은 재물 얻을 능력을 겸손한 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재물까지 가진다면 더 교만하여져서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할 줄을 하나님께서 친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깊이 깨달아야 할 한 가지 보배로운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재물을 누리고 싶다면 무조건 겸손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년이 지나도 동일하며 변하지 않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이렇게 우리들을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가 재물의 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들어 줍니다. 재물은 이렇게 겸손하게 무릎이라도 꿇고 순종하는 충성스러운 일꾼들에게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잠 8:21 /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듯 하나님은 오만하고 교만한 자들에게 재물을 주셔서 더욱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것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여 무엇을 주든지 이웃들과 나누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 성도들에게는 이처럼 재물을 주셔서 곳간에 가득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눅 6:38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이웃들과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재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캐나다 밴쿠버 북쪽에 유명한 휴양지 휘슬러라는 곳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스키로 유명하고 여름에는 골프로 유명한 곳입니다. 어느 날 저녁에 20대 젊은 남녀가 북쪽 우거진 산림 속으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곰이 나타나서 여차친구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달려들어 사생결단 곰과 싸우며 여자를 도망가도록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사투 끝에 곰은 물리쳤지만 곰에게 얼굴을 맞은 청년은 얼굴 한쪽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엉덩이와 허벅지 살을 떼어내 얼굴에 이식하며 30여 차례 이상 수술을 받았으나 얼굴은 너무나도 징그럽고 무섭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자 친구마저도 무섭다면서 떠나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굳은 신앙으로 디시 일어섰습니다. 그러한 얼굴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문을 닫아 버리고 두 번 다시 보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진실과 겸손 그리고 믿음이 인정을 받아 결국에는 캐나다에서 최고의 외판원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겠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의 좌절하지 않는 믿음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겸손을 보시고 풍성하게 복을 내려주셨기에 그토록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 년이 지나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은 재물을 얻는다고 하셨으니 우리 모두 겸손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축복으로 재물을 누리시게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겸손은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잠 22:4 /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본문에 등장하는 “영광”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는 “Honor”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을 가장 쉽게 해석하면 “영예, 존경, 상”입니다. 다시 말해 겸손하면 영예를 얻게 되고 존경을 받게 되며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 있어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최고의 영광인 하늘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거의 관심도 가지지 못하는 겸손이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용서하시고 부르신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다 바치고 난 다음 생의 마지막 순간에 바로 이 상 받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딤후 4:6-7 /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와 같은 축복은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겸손하여 성도들의 사랑을 받으며 겸손하여 사명을 은혜롭게 감당하는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자라면 바로 겸손한 자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최고의 덕목은 바로 온유와 겸손이었기 때문입니다.
마 11:29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지만 작금의 교회를 들여다보면 이렇게 겸손한 성도들을 참으로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목사를 쫓아내고 목사의 뺨을 때리는 장로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겸손해지십시오. 제발 낮아지십시오. 제발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결국은 그 대가를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손들이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완벽한 사도도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악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와 같은 악한 자들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해 두고 자손만대에 저주꺼리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딤전 1:19-20 /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주의 종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만큼 교만한 자들은 이처럼 비참하게 사탄의 종노릇이나 하다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대로 겸손하고 하늘 상을 받으며 오고 오는 후손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사제지간이 되고 주 목사님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시던 조만식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조 장로님은 오산학교에서 교장으로 있을 때, 주 목사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조 장로님이 예배시간이 지나도록 손님과 이야기 하다가 교회에 들어오셨습니다. 주 목사님은 설교를 하다가 "조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시오."하고 호령을 했습니다. 이럴 때 보통사람 같았으면 그냥 나가든가, 의자에 앉아서 목사에게 욕을 하며 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 장로님께서는 그대로 서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주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는 "서 계시는 조 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오."하니 기도하시는데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시 한 죄를 용서하옵소서."하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서서 예배를 드리신 장로님을 본 교우들은 큰 감동을 받고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장로님의 신앙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자존심과 인격의 손상을 당하셨을까요? 그러나 기도와 순종으로 극복했을 때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빛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미덕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사로운 자존심을 세우지 아니하고 나를 통하여서 하나님과 목사님께서 성도들을 교훈하시려나보다 하고 묵묵히 순종하고 따를 때 이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조 장로님의 믿음의 덕을 기리는 후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겸손은 생명을 얻게 합니다
잠 22:4 /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겸손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급박하고 무서운 세상인 것 같습니다. “밤새 안녕” 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범죄도 많고 사고도 많아 하루하루 무사하게 지나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구나 싶을 정도입니다. SNS에서 나타나는 한 이야기가 현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여유도 없는 동생이 언니 생일에 값비싼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깜짝 놀란 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이렇게 비싼 것을 어떻게 사왔니? 네 형편을 내가 아는데...”하고 나무라자 대뜸 동생이 대답하였습니다. “언니, 내일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몰라. 오늘 할 수 있을 때 나는 뭐든 다 하고 싶어. 오늘 밤에 내가 죽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라고 말입니다. 한 번쯤 곱씹어 볼 만한 말입니다. 전 부인이 아이도 볼 겸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전 남편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오라는 곳으로 찾아가 아이도 보고 저녁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녁상의 밥에 졸피뎀이라는 수면유도제를 넣어 남편은 밥을 먹자 말자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그 때 전 부인은 그 남편을 죽여서 여러 토막으로 나누어 작은 가방에 넣어 다니며 곳곳으로 흩어버렸습니다. 범인으로 잡혔지만 죽은 전 남편의 시신은 결국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30대의 고유정입니다. 더운 여름날에 시원한 샤핑몰로 나갔다가 떼 죽임을 당했습니다. 간호사가 병실에서 환자를 간호하다가 창으로 날라 들어온 총알을 맞고 절명하였습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멀쩡하게 달리다가 옆에서 튀어 들어온 자동차로 인하여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습니다. 시애틀에서 총영사로 많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내고 임기가 끝나 핀란드 대사로 나가셨던 문덕호대사가 암 진단을 받고 2주 만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부 전도왕으로 한국에서 초청하기 힘든 가장 인기 있는 장로 2위에 올라 한국과 미국으로 집회를 다니던 종의 친구 반봉혁 장로는 제약회사를 가지고 있고 엄청난 부자였으나 암으로 6개월 만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이런 일들은 옛날에는 소설의 소제로나 쓰여지던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 드린 이 모든 일들은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정말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켜주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생명 하나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시 121:5-7).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이 말씀을 대비해 보니 이러한 축복을 받을 사람은 아무나가 아니고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라는 덕목은 단순하게 성도들이기 때문에 가져야 할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의 반대인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생명 줄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잠 6:16-17 /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잠 8:13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 16:5 /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위의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면 그는 곧 망한 사람이요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잠 15:25 /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잠 16:18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8:12 /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위 말씀과 같이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가장 무서운 죄악은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명을 담보로 겸손한 자를 독려하시고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교만하지 마시고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변화를 추구하지 아니하는 그것이 바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을 죽이고 끊임 없이 기도하고 노력하고 힘써야만 하는 귀한 덕목입니다.
이태리의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라고 하면 20세기의 제일가는 교향곡 지휘자입니다. 베토벤 심포니를 제일 많이 지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지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연주를 앞두고 여러 달 전부터 그 음악의 진수를 익히면서 오묘한 신비를 체험한 뒤에야 지휘봉을 잡는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번 심포니 곡은 전에 여러 번 지휘하신 곡인데 왜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까? 우리가 거의 다 외우다시피한 곡이 아닙니까?" 그러자 선생이신 토스카니니 지휘자가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야, 아직까지도 이 곡조의 신비를 다 파악하려면 나는 아직 역부족이야." 이것이 바로 세계에서 제일간다고 하는 명지휘자의 겸손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운전하는데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사고율이 더 많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전도요원하다고 하는 겸손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태도는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 자신이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사도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입니다.
약 4:6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늘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하고 주의 종을 존경하며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늘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필리핀이 아름답고, 명랑한 나라가 되려면 공무원의 부패와 부정을 근절해야한다고 외침으로써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던 막사이사이는,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루손도의 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이는 일이 없이 자라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고 겪고 느끼는 필리핀 민족의 슬픔과 불행을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야 하겠다는 높은 생각과 거짓 없고 올바른 사람이 되겠다는 그의 결심은 자동차 운전수 노릇을 하는 동안에도 옳지 않은 동료들에게 물들지 않게 했습니다. 착실하고, 근면하며, 성실한 그는 결국 양코 버스회사의 지배인이 되었고, 제2차 대전 후에는 국방 장관, 마침내는 대통령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의 연령은 겨우 46세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그는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소박하고 겸손하였습니다. "나의 직책은 대통령이지만, 나의 마음은 이 나라의 한 병사이다." 이것은 곧 막사이사이가 늘 품고 있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늘 백성들과 같은 처지에서 살고, 같은 곳에 있었으며, 같은 생활을 하고, 또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그가 골똘히 생각한 것은 이 나라의 백성들이 고생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공무원들이 권력을 사사로이 이용하고 권세를 악용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폐단을 없이 하기 위해 그는 공무원들의 재산을 모조리 등록하게 하여 부정한 뇌물을 받아 부해지는 일이 없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대단히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첫째 공무원들로 부정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정부를 믿게 되어 말할 수 없이 부패 했던 정치가 맑고 깨끗한 정치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했던 그가 불행하게도 비행기 사고로 조난당하였을 때 필리핀 뿐 아니라 전 세계 인민이 다 그의 조난을 슬퍼하였습니다.
막사이사이상( Ramon Magsaysay Award)은 필리핀의 전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리기 위해 1957년 4월 제정된 국제적 상을 말합니다. ‘아시아의 노벨상’으로도 불립니다. 1978년 장기려 박사가 받았고 한국에서는 김활란, 김용기장로 등 여러 유명인사들이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겸손하였던 막사이사이를 기념하고 후세들에게 길이 전하기 위한 아시아의 노벨로 지금까지도 권위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입니다. 오래 전에 막사이사이는 떠났지만 지금도 진정한 백성들의 가슴 속에 막사이사이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진정한 겸손의 가치요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 살아 있는 복된 삶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겸손에 관한 위인들의 명언을 몇 가지 기록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플라벧-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겸손하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아는 자들은 교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로말카-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요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러스킨-영국의 작가, 비평가 훌륭한 사람을 아는 방법은 곧 그가 겸손한 마음을 가졌나 아니 가졌나를 보아서 알 수 있다.
주님을 경외하는 아버지
잠 22:1-6 / 김경호 목사
요즈음 아버지 부재의 시대, 아버지 상실의 시대를 말합니다.
하긴 지난 번 복제양 둘리 이후 숫컷(남성)의 존재 이유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남성이 씨를 뿌려야 새생명이 만들어졌고 생명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남성이 갖었었습니다. "아버지 날 나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제 양 이후 현대 과학은 숫컷의 생식 세포없이 바로 암놈의 체세포에서 핵을 분리하여 수정하는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숫컷 없이도 생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남성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말하는 것은 아마 여권이 신장되면서 추락하는 부권에 대한 향수와 경제위기로 인해 그나마 경제력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했던 아버지들의 몰락을 말하는 것일 겝니다.
아버지들은 "처자를 먹여 살린다" "남자는 일, 여자는 가사"라는 역할 분담의 전제 아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역설해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남성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이 생각되는 석기시대의 수렵 채집 민족을 살펴보니 그들이 취하던 식량의 70%는 여자들이 캐내는 뿌리 채였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활이나 그물을 손질해서 새나 물고기, 짐승등을 잡아 왔는데 사냥이 그리 용이치 않아서 대개는 빈손으로 들어오기가 일수였다는 것입니다. 하긴 저도 낚시 잘한다는 사람들이 맛있는 매운탕 책임진다는 말에 속아 좇아갔다가 배만 쫄쫄 굶고 온 기억들이 있습니다. 석기 시대에도 사실 주된 식량은 여자들이 캐온 고구마등의 뿌리나 채소를 먹고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줄 곳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남성들은 환상을 집어던지고 자신들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혼자의 일은 그만 두겠어, 제발 여자도 한 몫 해다오." 그들을 피부양자의 한사람이 아니고 동반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남성도 너무 과중한 생계의 부담을 혼자만 질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살고 싶은 방법을 택해서 살자. 회사는 필요한 만큼의 급료를 받는 곳이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맡은 일을 재조정 해야합니다. 어머니도 사회에 진출하고, 아버지도 육아에 관여 해야합니다. 여성들은 육아를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아이"를 발견하기에 남성보다는 보다 성숙한 생각을 갖는다고 합니다.
대개 남성다움, 남성, 사나이라는 용어들 뒤에 따라오는 무용담은 마치 깡패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파렴치한 말들이 이어지거나, 아니면 온갖 창조적이고 능동적이고 좋은 가치들은 전부 남성이라는 가치 안에 묶어 놓습니다. 그러나 여성, 현모양처, 모성이라는 이미지 다음에는 서비스, 봉사, 순종, 고분고분, 인내 등의 가치가 따라옵니다. 거기다가 아름다움을 갖추고 섹시함까지 갖추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여성은 독자적 인격적 개체로 여겨지기 보다는 남성을 위한 도구적인 성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관과 여성관은 적어도 우리교우들은 모두 벗어 던져야 합니다.
얼마전 아내의 생일날이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집안에 바쁜 일로 생일을 챙기지 못한 채, 그날 저녁 시민단체의 수련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사실 오늘은 내가 여기 있으면 안되는 날이다. 케익이라도 같이 잘라야 하는 날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 한분이 "오늘 아침 사모님 미역국은 끓여드렸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무슨 미역국?" 했더니 자기는 이제 까지 아내의 생일날 한번도 거르지 않고 미역국을 끓여 대접을 했노라고 하며 "목사님 당연히 그렇게 하실 줄 알았는데... "라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더니 미역국 끓이는 법에 대해 제게 필기하라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저는 하루 늦었지만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곤지암까지 차를 타고 나가 미역국 재료들을 사가지고 국을 끓였습니다. 상당히 잘 끓인 국이었습니다. 그날 아내가 많이 감탄을 했더라면 제가 매일 국을 끓일 수도 있었는데...."(일동 웃음)
저는 교회에서 남신도들하고 이런 프로그램을 하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차린 식탁"이란 제목 아래 희망하는 남신도 몇이 계획해서 아내를 초청하고(혹은 아들이나 딸을 함께 초청해도 좋습니다) 예쁘고 정성스런 식탁을 마련해서 내 놓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모여 무슨 음식을 만들까 회의도 하고, 당신은 잡채하고 당신은 탕수육을 하고, 저는 미역국을 확실하게 끓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분담하고 함께 연구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일, 결과가 어땠든지 간에 그 음식을 먹으며 품평을 하는 일, 음식을 먹으며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생각해 멋들어진 파티를 준비하는 모임 말입니다. 어때요,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남성들이 이렇게 요리하고 음식 만드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아내가 도자기일로 바쁜 때도 제가 어느날 집에 있노라면 끼니 때가 되서 밥을 차려 주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고 "아, 내가 짐 덩어리가 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남자가 늙어서 밥도 못하고 음식도 못하고 빨래도, 청소도 못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남에게 폐를 끼치고 짐 덩어리가 되는 것이지요. 남성들이 이런 기본적인 가사일도 익혀야 합니다.
언어마저도 상당히 다릅니다. 남성은 주로 명령언어를 씁니다. 명령언어는 회사나 직장에서 주로 쓰는 말로서 가장 간단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밥줘, 몇 시에 깨워 줘, 자자..."이런 말들입니다. 이에 비해 여성의 언어는 정서언어들입니다. 이것은 우뇌적 감각,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말이나, 직장에서 좋았던 일,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 누구네 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둥 하는 말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들인데 아내와 딸이 앉아서 아주 심각하게 이런 말을 듣고 맞장구를 치는 것을 보고, 아빠들은 "참 할 일도 없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구나" "이 꽃 참 예쁘지?" 이런 말들은 특별히 의미없는 이야기 들입니다. 이런 말들은 어떤 사실을 전달하거나 내용이 있는 말들은 아니지만 어떤 말보다도 더욱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말들을 통해서 "저 사람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구나" "나를 받아 주는 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이런 말들은 서로간에 서먹서먹함을 허물어 주고 서로 친구가 되게 해주기도 합니다.
사이토 사토루라는 일본의 정신과 의사는 오랬동안 가족 상담을 해왔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가족 기능연구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 시대에는 "강권적 힘의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요즈음은 "온순함"의 이미지로 대처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온순하고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새로운 규칙이 가족 한사람 한사람의 생생한 욕구나 욕망이 표출되기 어렵게 만들기 쉬우며 이것은 또 다른 억압으로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고 합니다. 핵가족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나 자녀가 다 정신적으로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미성숙의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사이토 선생은 사랑이 부족한 결손가정에서도 많은 문제들이 생기게 되지만 일본 사회 안에서는 일반가정에서 과잉 사랑으로 인하여 더욱 많은 문제들이 생기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이토 선생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3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품에 앉는 것(holding)입니다.
갓난 아기가 있는 집에서 "아이 울리지마, 내일 아침에 일찍 회의에 나가야 돼" 라고 하는 아버지는 실격입니다. 이 때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서성이며 "당신은 조금 자도록 해"라고 해야 합니다. 품에 안는 기능은 주로 어머니의 기능이지만 아버지가 아내에게 대하는 태도에 따라 어머니가 자신 감 있게 아이를 품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아버지가 육아에 대해 참여하라고 했더니 손발은 하나도 까닥하지 않으면서 "어머니에게 들어보니 이렇다 더라""집안 살림은 이렇게 해야한다"는 식의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몹시 귀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편은 의외로 자신이 매우 좋은 아버지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식들의 행동에 한계를 설정하는 일입니다(Limit Setting).
핵가족 등에서 흔히 보는 예로 욕구 충족이 과도하게 일어날 경우 사람은 겉잡을 수 없이 됩니다. "밥먹어라" "잠자라"하는 말들은 한계를 설정하는 말인데 이런 기능은 아버지가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쪽에서 이런 주문을 하는데 다른 한 쪽에서 "그럴 필요 없다"고 아이의 편을 들면 안됩니다. 아이가 과도하게 욕망을 충족시키게 되면 아이는 "어디까지 괜찮은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끝없이 요구하게 되는데 부모로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는 결국 "화"를 내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의 한계' '부모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그는 곧 부모에게서 실망하고 부모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 아이는 자신의 한계를 설정해 주는 환상적인 부모를 그리면서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자극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물건훔치기, 공갈, 폭력등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이토 선생은 일본사회에서 부모를 살해하고 학원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아이들을 분석한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사랑의 결핍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상적이고 사랑을 많이 받은 가정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이들의 비행은 부모를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지워주고 적절히 욕망을 제한시키는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줍니다.
사이토 씨는 아이들에게 적절한 욕구불만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창조력을 갖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이라는 사회가 약간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보다 경제력이나 사회적 현상이 조금씩 앞서서 나타난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매우 주목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까지 사랑이 만능의 해결인 처럼 이야기하는 우리사회의 풍토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의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켜주려 한다면 결국은 아이를 부모를 배반하는 패륜아로 만드는 것이기에 아이에게는 어느 정도까지는 욕망을 충족시키더라도 "그 이상은 안된다. 여기까지다"라는 분명한 선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이토는 프로이드의 "문화 속의 불만"이라는 글에서 프로이드가 욕망을 단절하는 것으로 문화가 창출된다고 하는데 주목할 것을 요구합니다.
셋째는 자식 떼어 놓기입니다(Detouchment).
교육학자 융크는 어머니와 자식의 밀착된 관계를 끊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은 자식의 정신적 발달을 방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절시키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의 단절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포응과 적절한 한계설정이 이루어진 다음에 행해져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 부부간의 관계가 안 좋게 되면 어머니는 매우 쓸쓸한 느낌을 가지고 자식을 감싸 버립니다. 옛 신화에서 거대한 용을 살해하는 창조의 이야기들은 어머니를 딛고 일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사춘기는 아이들이 육신의 부모를 떠나 사회적 부성을 찾는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가 자식의 대학입시에 열중한다면 아버지는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이 인생 전체로 보아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에서 문제를 이해시키거나 토론을 함으로 아이들이 적절한 시기에 가정이나 부모의 울타리를 떠나 사회라는 큰 틀 속으로 순항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협조해 주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라야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 시기에 부모에 대해 반항하지만 그러면서도 더 큰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부모가 자신감을 북돋우어 주고 "너는 할 수 있어" "그래도 괜찮다"고 격려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교회 성서학당에 나오시던 양선생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는 정년 은퇴를 한두해 남기신 분이셨는데 한번은 성서학당에서 함께 수련회를 갔습니다. 참석자 대개가 젊은 부부 중심이었습니다. 양선생님이 제 옆에서 한숨을 몰아 쉬셨습니다. 제가 무슨 걱정이 있으시냐고 묻자 자신의 사정을 말했습니다. 본인은 신앙을 가진 분이었는데 믿지 않는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자유로운 분이라 신앙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치 않고 아내더러 교회에 나갈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되니 더욱이 신앙에 소홀하게 되었고 자신도 아주 교회에 나가는 것이 서먹해져 믿지 않는 사람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부인이 불교의 열렬한 신자가 되었고, 아주 맹렬한 신자가 되어 양선생님과 많은 의견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생각과 종교의 차이로 집안의 불화가 잦아지게 되면서 큰 아들이 유사 기독교의 사이비 종교에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앙적 문제가 나오면 온 가족이 양보없는 논쟁을 하다가 서로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딸은 이런 모습이 싫어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어 집안의 색깔을 다양하게 하는데 한 몫을 보탰습니다.
양선생은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 이예요. 제가 나이가 먹고 애들이 머리가 크니 아버지의 권위 같은 것이 통하지도 않고, 누가 무슨 의견을 내면 서로 딴판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기만 하니 자연히 집 안에서의 대화도 끊기게 되고 식구들이 매일 얼굴은 맞대지만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그저 단순히 한 지붕 아래 모여 있을 뿐입니다. 서로 비위를 긁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제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으로서 단지 집안에 필요한 물질이나 대어주면 다 되는 줄로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집안에 가장 중요한 정신을 세우지 못했어요.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빼어 놓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며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와 크게 뉘우치지만 돌아보면 제 인생은 실패입니다. 지금 저기 아이들과 부부가 함께 손잡고 수련회를 가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니 더욱 제 실수가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아마 저 젊은 부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은총 속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이 긴 고백 속에서 새삼 크리스천의 가장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새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잠언은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1절)"고 합니다 또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4절)"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유교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등의 덕목을 말합니다. 그러나 퇴계 선생님은 그 모든 덕목 중 가장 뛰어난 덕이 경(敬)이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인자를 베푸는 것보다 그를 경외하는 것이 분명 한수 위이지요. 남에게 예를 지키는 것보다 그를 존경한다면 예가 문제이겠습니까? 신 없는 유교에서 공경하고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정신인가를 안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상이나 부모는 오히려 그 자녀가 그 한계를 빤히 알 수도 있습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우주를 사랑과 공의로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는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 5-6절은 "자기 영혼을 지키는 사람은 그런 길을 멀리한다.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아버지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버지, 자신과 가족의 영혼을 지키는 아버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도의 물질생활
잠 22:2-3 / 이성희 목사
잠 22:1-3, 약 5:1-6
사람의 물질관은 그 사람의 가치관이며 인격입니다. 성경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돈을 가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은 항상 중립적인 것입니다. 돈은 가치를 알 때에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바르게 사용할 때에 물질은 축복이 됩니다. 바르게 사용하지 못할 때 물질은 저주가 됩니다. 테레사 수녀는 "물질이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적 물질관을 통하여 성도의 바른 물질생활을 알아야 합니다.
1. 물질을 쌓아두는 부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부자가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부자였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재임할 때에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부유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물질을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부자를 배격합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합니다.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합니다. 곡식이 많은 부자가 쌓을 창고를 짓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성도는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물질을 착취하는 도둑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5:4에는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고 합니다. 노동의 착취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24:15에는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의 원리는 노동의 품삯을 당일에 반드시 주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이 것을 말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철저히 반대합니다. 내 물질이 아까운 줄 알면 다른 사람의 것도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의 것이나 공공의 것을 마구 쓰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3. 물질로 마음을 살지게 사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5:5은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고 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물질로 인간의 마음을 살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물질로 마음을 살지게 하려는 것이 사치라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쓰지 말고 적으면 아껴 써야 합니다. 최근에 신용카드 불량자가 많아졌습니다. 우선 쓰고 보자는 사치한 마음이 불량자를 만듭니다. 사치는 점점 심해집니다. 돈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은 돈이 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물질의 노예입니다. 물질에 우리의 마음이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을 쌓아두기 위하여 쌓아두지 말고 쓰기 위해 쌓아두어야 합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한다면
잠 22:4-6 / 조성일 목사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 목사님의 어머니는 수산나 여사 입니다. 이분은 자식을 19명이나 낳아서 키웠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머니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자녀들이 세상 죄악에 물들지 않고 그렇게 틀림없이 청결한 신앙 교육을 시킨 비결이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을 받고 그 수산나 어머니는 대답하기를 "첫째는 성경이요, 둘째는 채찍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가르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가르치지 않으면 기초를 제대로 쌓지 않은 건물과 같이 위태한 인생이 됩니다. 어렸을 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튼튼하고 아름다운 인격이 형성되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며, 자녀가 잘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한다면”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한다면,
1. 어려서부터 겸손히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 본문 잠22:4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면 재물과 영광과 생명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신약 본문 딤후1:3에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신임과 사랑을 받은 디모데는 조상 때부터 대대로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배운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대영 박물관에는 강철같이 단단한 돌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는 작은 새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돌이 단단해 지기 전에는 작은 새가 디뎌도 발자국이 날 정도로 물렁물렁 했었다고 합니다. 그토록 물렁한 돌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단해져서 지금은 큰 코끼리가 밟아도 발자국이 생기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는 단단한 돌이 된 것입니다. 어린이의 마음은 굳어지기 이전의 물렁물렁한 바위와 같은 상태입니다.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는 누가 무슨 자국을 남기든지 그 자국은 그대로 새겨집니다.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겸손히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을 가르치면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 주님 영광 위해 존귀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기능 교육을 시키고,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좋은 학문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신앙교육이 우선입니다. 자녀에게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 주일성수를 가르치고, 예배를 가르치고, 기도와 찬송을 가르치고, 헌신과 봉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르쳐 놓으면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바른 인생의 길에서 떠나지 않고 바르게, 아름답게,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혹 다른 길로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오고야 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비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한 바입니다. 전12:13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했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솔로몬이 인생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귀중한 사람의 본분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알지 못하고 막 사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가족 다섯 명을 도끼로 살해한 고재봉이 사형을 당하면서 ‘내가 조금만 먼저 예수님을 알았다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탄식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그나마 뒤 늦게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예수 믿게 전도한 사람이 무려 1800명이라고 합니다. 죄를 짓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했습니다. 시128:1-2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도록 가르치는 부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거짓 없는 진실한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 본문 잠22:4에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했습니다. 거짓과 죄악의 패역한 길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지만 하나님은 거짓 없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광장에는 종교개혁 선구자 얀루스의 동상이 있는데 거기에는 "진실을 배우며, 진실을 사랑하며,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양보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진실을 지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시15:1-2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했습니다.
미국 웨스트 포인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는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합니다. 크든 작든 생도가 거짓말을 했으면 24시간 안에 거짓말한 것을 고백하고 반성문을 써야 합니다. 24시간이 지나도록 거짓말을 숨기다 탄로가 나면 퇴학입니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미국사회의 지도자로 훈련시킵니다. 기독교인은 육사생도보다 더 철저한 훈련과 관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좀 부족해도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녀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진실의 길을 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나무는 어려서부터 굽혀져 자라면 다 성장한 후에는 다시 곧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굽은 나무는 좋은 재목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게 자란 사람이라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쓸모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 본문 딤후1:3-5 에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동역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실한 동역자일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냄새나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사람도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성경을 기록했다거나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한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출신도 예루살렘도 아니고 아시아의 한 시골 루스드라였고 위대한 스승 밑에서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바울 사도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신실한 동역자가 된 것은 위대한 믿음의 외조모와 믿음의 어머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믿음의 가문에서 좋은 신앙을 잘 배워서 바울 사도에게 꼭 필요한 유익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좋은 믿음의 가문에서 좋은 신앙을 배운 것입니다. 그가 지닌 거짓 없는 믿음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중적이지 않는 믿음이고,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거짓 없는 진실한 신앙을 물려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 본문 잠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이라는 선물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 하는 길, 구원 얻는 길,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줍니다. 마땅히 행할 길 가운데 가장 귀한 길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많은 계명의 요약이 10계명에 나타나 있고, 가장 큰 계명이요, 계명의 핵심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삶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모는 주님을 본받아 살면서 자녀가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위로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부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 하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귀한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도 아니고, 권세 있는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며. 힘이 센 사람도 아니요, 오직 사랑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자녀라고 해서 함부로 악담을 퍼부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말을 해야 합니다. 축복의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격려의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어떤 청년이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면서 부정적이고 반항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어서 그 원인을 추적해 보니까 그 부모는 그 청년이 어린 시절 공부를 잘해도, 착한 일을 해도 도무지 칭찬해 줄줄 모르고 타박만 하고 트집만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할 때는 칭찬도 해주고 사랑도 베풀어 주어야 그 아이가 성장해서 남을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서신서 본문 딤후17-8: 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했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와 복음을 위해 기쁨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됩니다.
'고려은단' 사장 조규철씨는 24살 때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다가 목사님께 인사를 하다가 윗 주머니에서 담뱃갑이 떨어 너무 창피해 담배를 끊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번번이 작심삼일이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는 다시 결심하고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마다 기도하면서 은단을 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금연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떳떳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생각하던 중에 은단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배 소비도 줄고 국민 건강에 이익도 불 수 있는 사업이라 생각했습니다. 1943년 당시 거금 50원을 들여 일본인이 경영하던 은단 공장을 인수했습니다. 6.25전쟁이 이후 1955년 서울 제기동에 '고려은단 제약회사'를 세워 국내의 굴지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집이 있는 신촌 봉원동 연대 뒷산에 교회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이 산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실과 기도장소를 제공하고, 개방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팔순이 넘은 조규철 회장을 이어 그의 아들 조창현 사장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도 부모의 신앙을 본받아 아버지 못지않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회사가 민족 복음화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다가 몇 년 전부터 시작한 것이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옥외광고였습니다. 'Jesus loves you' 라는 대형 광고를 고속도로 곳곳에 설치했습니다. 경부, 중부, 호남, 남해 고속도로는 물론 올림픽 대로에도 설치했습니다. 회사는 더욱 성장해 국내 시장 점유율 70~80%인 최대의 은단 회사가 되었습니다. 은밀하게 북한 등지에 의약품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선행도 하고 있습니다.
신6:6-7에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인격이 되게 하고 삶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커서도 그 말씀의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의 법이 되어 죄에서 떠날 것이며 좌절할 때에 말씀을 통해 힘을 얻어 일어날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 말씀이 생각나서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고 가르치는 성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한다면”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한다면,
◆.어려서부터 겸손히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거짓 없는 진실한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멘.
아이에게 가르치라
잠 22:6 / 이삼규 목사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프랑스는 내년부터 어머니들의 천국이 될 전망이라는 보도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선 출산을 앞둔 '예비 엄마'들은 임신 8개월이 되면 8백유로(약 1백10만원)의 출산장려금을 받는다고 합니다.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산모의 산후 조리와 육아 준비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또 출산 후 3년 동안 매달 수백 유로의 양육 수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년부터 통합되는 이 양육 수당은 기본 수당 1백60 유로에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라 일정액이 보태진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이처럼 출산을 장려하는 이유는 고령화 사회로의 진행속도를 늦추기 위해서입니다. 프랑스는 지난해 79만5천7백 명의 아이가 태어나 여성 1인당 1.9명의 출산율을 기록했습니다.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아일랜드와 함께 가장 높은 수치지만 경제활동인구의 감소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출산 장려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최근 일고 있는 '미니 베이비붐'을 명실상부한 베이비붐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입니다. 우리 나라도 머지 않아 이런 날이 올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키워야 합니다. 또 잘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에게 마땅히 행할 길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훈련시키다'이지만 '일생을 바치다'의 의미 역시 포함된 단어임을 고려할 때 '그 일생을 바치기 위하여 훈련하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아이를 훈련시키는 것인데 그 목적은 하나님께 그 일생을 바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가르쳐야 합니까? 탈무드에서는 16-24세로 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2-3살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는 일반적으로 젖먹이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3-7살까지의 시기가 한 개인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왜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마땅히 행할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걸어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길은 어떤 길일까요? 생명의 길이요, 축복 받는 길입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는 것을 가르치자.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근본이 무너지는 교육은 아무 쓸모 없는 교육입니다. 마치 모래 위에 그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언젠가 명문대학 교수를 하는 가정의 자녀가 자기 부모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유학도 보냈습니다. 그 부모의 꿈은 컸습니다. 그러나 그 꿈에 대한 보답은 부모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근본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이 무시되는 교육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을 까요?
잠 2: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잠 2: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잠 2: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잠 2:4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잠 2: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 2: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잠 2: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잠 2:8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런 노력을 하십니까? 자녀들이 일반 학교에 결석하면 큰 일 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주일학교 한 번 빠지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애들이 주일 학교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 가정에 심방 가서 놀랜 것이 있는데 저금통에 식구들 이름을 하나 하나 써 놓고 그곳에 선교헌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이름도 쓰여진 선교 저금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교육입니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용돈이 생기면 과자나 사먹고 자기 쓰기에 바쁩니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 몰래 돈을 훔쳐서 가게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으로 된 선교 저금통에 아이들이 한푼 두푼 저금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갑부 록펠러도 어릴 때부터 십일조 하라는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거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 그토록 훌륭한 선지자요, 사사요,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로부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가문이 망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주셨습니다. 이제 원수였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는 9살 이전이 5.3%, 10살부터 14살까지가 12%, 15살부터 19살까지가 26%, 총 43.4%가 청소년기 이전에 예수님을 믿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혹시 내 자녀가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은 아닌가? 아니면 어린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아닌가? 똑같은 어린아이입니다. 비록 제사장의 자녀들이었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똑같은 어린아이인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녀로 키우시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자녀로 키우시렵니까?
둘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맺는 것을 가르치자.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무엇으로 증명됩니까?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큰 소리 쳐도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다면 그 믿음은 헛것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는 한 마디로 "대신 관계와 대인관계"를 바르게 맺는 비결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이어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만 잘 믿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증명됩니다.
그러면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첫 걸음이 무엇일까요?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첫 걸음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딤전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충북 제천 출신으로 판사가 된 분이 있는데 그는 허리가 굽은 장애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손가락까지 잘라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노름을 했습니다. 손가락이 다 잘려나가 손으로 화투를 잡을 수 없게 되었을 땐 대리자를 세워 노름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 온 가족은 어머니의 삯바느질 품을 팔아 겨우 연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한밤중에 집에 들어와서 노름 밑천을 내놓으라고 어머니를 닦달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홧김에 마루에 있던 어린 그를 마당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이 일로 그는 곱사등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함께 놀아줄 친구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만 열심히 하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가 된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버지를 언제나 잘 모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판사를 존경하였습니다. 효도하는 모습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효성에도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에게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하였을 까요? 그렇지만 신앙이 들어가니 그런 부모에게도 효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어떤 처지나 어떤 상황에서도 공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다운 신앙인 입니다.
사람됨의 근본은 효를 배우고 행하는 데부터 길러집니다. 그 효가 뭡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효", "부모님을 공경하는 효",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효",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효", 또 "가정을, 자연을, 자연을 보호하는 효",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는 효",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효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장 뛰어난 효자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였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 가면서 까지도 어머니를 염려하여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평생을 살았는데 나중에는 핍박을 피하여 소아시아 에베소까지 와서 마리아를 모셨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갑니까?
자식들이 부모를 버리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함께 살아주는 것만도 고마운 것입니다. 대접은 고사하고라도 버리지 않는 것이 고마운 일입니다. 갈수록 노인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제는 우리 나라도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 믿는 사람들만큼은 부모를 잘 모시는 효자, 효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얼마 안 있으면 늙게 됩니다. 아이들도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같이 살아보지 않는 아이들은 노인들 옆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할머니가 큰집에 사셨습니다. 한 일곱 여덟 살 정도 되었는데 할머니가 많이 아프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위암이셨습니다. 한 번은 큰집에 갔는데 큰어머니가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식구들은 다른 방에서 식사를 하는데 저하고 할머니하고 함께 상을 차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제가 왜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여도 어이가 없습니다만 결국에는 할머니와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하셨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부모님께 효를 행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을까? 우리는 효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효란 어려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에 사랑하는 것, 부모와 자녀가 사랑하는 것, 이것이 효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에 사랑한다면, 부모와 자녀간에 사랑한다면 "효도하라"고 외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사랑하지 아니하면, 지금 이 설교가 너무너무 부담스러운 분들도 계실 거예요. "아이고, 우리 목사님, 또 저 말 하네. 아이고, 부담 돼."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어떻게 천국 갑니까? 어떻게 천국 가냐고 물으면 여러분, 자신 있게 크게 대답할 겁니다. "예수 믿어서 갑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천국 갑니까?" "네,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아주셔서 갑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셔서 사람이 됐고, 사람이 되어서 예수를 믿었고,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영원한 천국에 갑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가 체험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은혜를 정말로 내가 깨달았다면, 효도하라고 말을 하는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그냥 하는 거예요. 감사한 거예요. 기쁜 거예요.
문제가 뭡니까? 요즘의 많은 젊은이들이, 청소년들이, 안타깝게도 어린아이들까지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기스타를 더 사랑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친구를 더 사랑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터넷을 더 사랑합니다. 인기스타는, 친구는, 인터넷은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혼을 다 빼앗아가요. 구원을 빼앗아갑니다. 건강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를 막 홀려요. 바로 그게 빠지는 거예요.
그러나 부모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신앙을 주십니다.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훌륭한 인격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야단도 칩니다. 혼도 냅니다. 때로는 그 말이 막 귀찮기도 합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 그랬습니다. 단 음식은 입맛에 좋지만, 쓴 약은 몸에 좋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성경 말씀이 자녀의 마음과 중심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면 기도해 줘야 합니다. 또 짧은 성구를 넣어서 자녀에게 편지를 주는 것도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축복 받는 원리를 가르치자.
미국의 잡지 [오늘날의 가정생활](Family Life Today)이라는 책의 편집자가 부모를 상대로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대답은 '기독교인의 가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 가져야 할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은연중에 커서 장군이 되라, 대통령이 되라, 판사나 검사가 되라고들 많이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큰 뜻, 높은 지위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이 부모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한에서 비롯되었다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와 내세에 축복을 받는 원리인 것입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 유계준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믿기 전 23세 때 평양 깡패로 있으면서 마팻 선교사를 때리려고 둘러쌌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큰 감화를 받고 깡패그룹을 해산시키고 25세에 윤덕준 양과 결혼을 하여 6남 2녀를 두었습니다. 그는 첫째 득남기념으로 미림지교회를 건축하였고, 45세 때에는 산정현 교회에 장로가 되었으며, 주기철 목사님이 옥중에 계실 때 쌀 1가마를 주어 가족을 돌보아 주는 일을 하는 담대한 장로님이었습니다.
그가 6.25 전날 밤 인민군에게 잡혀가서 대동강 언덕에서 순교 당하기까지 '믿음'있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을 일관하였습니다. 유장로님은 천상에서 받을 복도 크지만 지상에서도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자녀들을 보면,
1) 유기원 : 의사(미국에서 의학박사)
2) 유기형 : 부산대학 의과대학교수 (전)
3) 유기선 : 의학 박사, 법률가
4) 유시천 : 전 서울법대 학장(법학 박사)
5) 유기진 : 미국 시카고에서 외과의사
6) 유기묵 :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의사
7) 장녀 유기옥 : 용산에서 누가병원 경영
8) 차녀 유기숙 : 약학사, 전 숭실대학교 총장을 지낸바 있으며 역시 전 국무총리로 지낸 바 있는 이 한빈 박사의 부인이다.
유 장로님의 후손이 106명인데 모두 출세하여 쟁쟁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자녀 후손들이 축복을 받았을까요?
장로님께서 축복 받을 만한 믿음생활을 하셨고 자녀들에게 축복 받는 원리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의 축복 원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축복원리 라는 책에는 야베스의 네 가지 기도제목이 있음을 말합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1)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2)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3)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4)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의 기도처럼 축복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 자녀들이 되어 이 땅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자녀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잠 22:6 / 마경훈 목사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 가운데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는 성공했지만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실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사명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풍성하게 들었고,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면모를 갖추게 한 사람입니다. 특히 다윗이라는 인물을 발굴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국가로 세웠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식 농사에 대해서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목회자들 가운데도 자신의 신앙생활에 성공하고 섬기는 교회도 성공적으로 세웠지만 자녀 교육에 실패하여 세인의 구설수에 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신도들 가운데도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잘하고, 사회에서도 성공적인 자리에 올랐지만 자녀 교육에 실패하여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 탕자처럼 영적인 방황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녀교육에 실패하는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믿음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 교육에 있어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케네디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만 해도 미국의 청소년들이 지금처럼 타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이 형식으로라도 학교마다 채플(Chapel) 시간을 가지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때에는 미국이 저렇게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케네디 대통령 때 채플 시간을 없애고 성경 교육 시간을 없앴습니다. 그 다음부터 장발족이 생기고, 히피족이 생기고, 음주, 흡연, 마약 복용자가 늘어나고, 걸핏하면 총기를 난사하여 애꿎은 생명을 죽이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낮 12시 30분에 47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텍사스 달라스 시내 퍼레이드 중 한 괴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 채포 되었는데, 오스왈드 라는 이름의 30대 청년이었습니다. F.B.I.는 범행의 배후를 캐기 시작했고 단순범행이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을 범인의 불우한 가정환경 탓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범인 오스왈드는 아버지를 세 번씩이나 바꿔야 했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며 갈등과 시새움과 혼란이 뒤범벅 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자기를 낳지 않은 아버지에게 계속 야단을 맞고 소외되고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으며, 어머니조차 완전히 이 소년을 무시하고 방관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아픔 속에서 소년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싸움을 일삼다가 자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군에 입대했지만 군에서도 동료 사병들과의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고 상관을 폭행하고 군대에서조차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후 외국에 나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거절된 아픔을 안고 전전긍긍 떠돌아다니다가 배경이 확실치 못한 한 여인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내에게서도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 찍혀 항상 경멸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미국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그 날도 그의 아내는 놀러온 자기의 친구들 앞에서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과 경멸의 말을 퍼부었습니다. 마침내 오스왈드는 자기의 인생에 대한 모든 꿈과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불행한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통해서 배운 사랑과 관심을 끄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모아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사건 당일, 그는 자기 집 창고 속에 숨겨 두었던 소총을 꺼내어 그가 가장 최근에 취직했던 직장의 서적 보관창고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 케네디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어린이들의 신앙적인 교육을 폐지하므로 미국을 망쳐놓은 사람으로 지적 받고 있으며, 어린 시절 재대로 된 가정교육과 신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교육은 환경이나 일반교육 보다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자란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편애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하여 사랑 받지 못하고 노골적인 차별을 당한 자녀들은 비뚤어진 성격을 소유하게 되고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편애의 독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야곱보다는 야곱의 형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잡아오는 사냥감을 좋아했습니다. 에서는 대범하고 남자다웠습니다. 에서는 용맹스러운 사냥꾼으로 아버지를 흡족하게 해주었던 사람입니다. 이삭이 보기에는 가문을 세워나갈 사람은 에서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야곱은 여성스러웠으며 아버지 이삭이 보기에는 사내답지 못한 놈으로 가문을 세워나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야곱을 차별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은 결국 아버지의 차별대우의 상처를 극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아들이었지만 형들에게 받은 상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종살이 옥살이를 했으니, 일반적인 사람 같았으면 평생을 형들이나 원망하면서 아픈 상처를 가지고 불행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요셉을 상처에 매여서 불행한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그리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상당한 방황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18살의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저는 지금 매우 행복합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함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영적인 승리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18살에 믿음을 갖지 못했다면, 제가 그 때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환경이 눌려 환경이 끄는 데로 끌려 다녔을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환경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공부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그리고 세상사에 성공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 앞에서는 사는 경건이 필요합니다.
그럼 부모 된 우리가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1. 중생한 자가 되게 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 자녀가 모든 것을 갖췄는데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그 아이들이 가진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이 죽었다고 할 때는 육적 생명이 끊어진 것입니다. 육적 생명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생명입니다. 육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은 영혼이 거듭나며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 생명은 이 땅에서 70-80년 정도 유지되는 것이지만 영적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육적인 생명은 소유하고 있어서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영적 생명이 없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살았다는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육적 생명이 왕성해서 건강한 것과 육적 생명의 활동으로 사회 생활에 지장이 없으면 만족해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자녀들의 영적인 생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교회만 나오면 영적 생명을 소유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녀가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부모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영적 생명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요3장에 보면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적인 배경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고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릴 때 영적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거듭남입니다. 영적 생명을 소유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전도를 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생명을 확인해 보십시오. 육적 생명만 소유했는가, 아니면 영적 생명도 소유했는가 확인해 보십시오.
2. 예배자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가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만약 예배자가 되지 못하면 다른 부분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자입니다. 100만원 짜리 수표를 모아서 그것으로 불을 땐다면 그것도 그냥 버려지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하지만 100만원 짜리 수표는 그 정도의 일에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다른 일에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배에 실패자가 된다면 그는 영적인 차원에서 100만원 짜리 수표를 땔감으로 쓰면서 만족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믿는 부모들 가운데 자신은 믿음이 좋아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데 자녀들의 예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예배를 드리든 안 드리든 상관하지도 않는 부모가 많습니다. 자녀들의 영혼은 생각지 않고 공부와 세상적인 성공에만 관심을 갖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분들이 100만원 짜리 수표를 땔감으로 준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요즘 아이들 학교에, 학원에 바쁘지요.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니 밤낮 없이 공부해도 부족합니다. 우리교회 학생들 중에 학원 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밤 11시 정도에 집에 오더군요. 시험 기간에는 자정을 지나 한 시 정도에 집에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피곤한 아이들 주일에 곤한 잠을 자고 있는데 깨워서 교회 보내기가 미안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교회 보내야 합니다. 요즘 우리교회 학생들을 보니 열심히 교회 일을 한 아이들은 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 같더군요. 주일이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던 아이들은 다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호텔에서 한 할머니가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일이 고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6시에 나와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바닥을 닦았습니다. 하루는 한 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힘들지요?" "예, 힘들어요." "일요일에도 합니까?" "아니오 쉽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밀린 잠을 잘 수 있겠군요." 대답은 예상외였습니다. "아니오 주일에는 손자들 데리고 교회에 가느라 더 일찍 일어나야 하지요." 손님은 한심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니, 일요일에도 그렇다니 노는 날 잠이라도 자고 쉬어야지 그렇게 하고 어떻게 몸이 견딥니까?" 할머니의 대답은 단호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그 한 날 교회를 가야 나머지 엿새동안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어요." 이 가난한 할머니에게 주일의 예배는 삶의 힘을 공급받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교회에 아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그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3. 사역자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심은 것에 대해서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막10:30에 보면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드린 사람들에 대해서 이 땅에서는 100배로 거두게 하시고 내세에는 영생으로 갚아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제가 주님을 위하여 씨를 뿌린 것과 저의 자녀들이 씨를 뿌리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막10장 30절 말씀대로 이루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두 아이를 하나님의 일에 드리기로 했습니다. 두 아이가 장래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꼭 목회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펑신도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방법도 많습니다. 저는 제 두 아이를 방학 때는 단기선교에 헌신시키려고 합니다. 방학 때마다 교회 단기선교팀의 사역에 동참시키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나가려고 했으나 싸스 때문에 교회적으로 단기선교를 나가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두 아이만 필리핀 선교사님 댁으로 보내는 것을 생각 중에 있습니다. 모세는 아직 6학년이지만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성가대 지휘자 집사님의 요청에 제가 허락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일을 위한 준비입니다. 원한다면 다른 악기도 가르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젊은이들이 성가대나 찬양단 그리고 교사와 같은 일들에 드려지고 있음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인데 분명히 열매를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시간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을 범죄하며 악의 시간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므로 믿음의 시간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드리는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가장 지혜롭게 시간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심어 주라
사람들은 거의 모든 일을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합니다.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돈이나 성공보다 관계 중심으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일을 해도 관계 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물질적인 유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사람의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옳고 그름이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냐 못받느냐로 결정됩니다. 자녀가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 아이의 언행심사는 그 가치관에 근거해서 나오게 됩니다. 자녀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 아이의 언행심사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근거해서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형성됩니다. 결국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무엇을 집어넣느냐가 중요합니다. 반드시 들어간 것이 나오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란 아이는 자신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보내고, 성경 공부를 하게 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을 심어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부모의 모범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부모가 아무리 하나님 나라의 말을 하더라도 실제로 생활에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아이들은 말보다 행동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사는 것을 대단히 거창하게 생각하는데 쉽게 말하면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가족 관계 속에서 상대에게 반응하는 것을 육신의 감정대로 하지 말고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이 땅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땅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일을 해도 이 땅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과 연결시켜서 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장래에 대한 비전을 가져도 이 땅에서 업적을 이루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안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로 생각한다면 같은 일도 하나님나라의 가치로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잠 22:6 / 최성규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1922년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을 정한 후, 올해로 88번째 어린이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오랜 기간 어린이날을 지켜왔고, 어린이헌장까지 가지고 있는 대단한 나라입니다. 본래 ‘어린이’란 ‘어리신 이’라는 뜻입니다. 한 인격체로서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어린이를 존귀하게 보십니다. 성경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어린이를 귀하게 대하셨습니다(마 18:5 막 10:13-14).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어린이를 사랑합시다. 어린이·청소년·제자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건강한 신앙입니다. 우리 사회를 바꾸는 힘입니다. 오늘날 많은 어린이가 힘들어 합니다. 외롭다고 합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폭력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머리는 똑똑한데, 마음은 비어 있습니다. 방황하고 불안해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바른 방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아이들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봄으로, 어리신 이들에게 해맑은 미소를 찾아줍시다.
첫째, 신앙 전수해주자
“하나님께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곧 자녀의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1대1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안타깝게도, 부모는 잘 믿는데 자녀는 안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 전수에 실패했다면, 그 사람의 인생 또한 실패한 것입니다. 사사기의 암흑 역시 신앙 전수의 실패로 인한 것입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음 세대’는 ‘이음 세대’여야 합니다. 다음 세대는 부모의 신앙과 믿음을 이어가는 세대, 부모의 헌신과 충성을 이어가는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방황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이삭은 야곱으로 이어졌습니다. 출애굽 신앙은 광야 신앙으로, 광야 신앙은 가나안 입성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다음 세대가 신앙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내 자녀가 하나님 아들 되게 해야 합니다.
이음의 출발은 부모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부모가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고 명령합니다. 또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자녀는 정원과 같습니다. 방치해두면 잡초만 자랍니다. 죄성을 따라 악한 것을 좇습니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는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 합니다(잠 22:15). 자녀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어린이들을 학교와 학원에만 맡겨두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부터 전수해줍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없는 교육은 약삭빠른 악마를 만들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돈 버는 데 목숨 걸지 말고, 자녀의 신앙교육에 목숨을 겁시다. 케네디 대통령이 공교육에서 성경을 배제시키면서부터 미국이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기억합시다. 또한 프란시스 쉐퍼는 “가정이란 진리가 영원히 릴레이 하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신앙을 전수하라고 하십니다(신 6:6-7). 오늘부터 실천합시다.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고, 함께 새벽기도에 나옵시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게 합시다.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하도록 기도해줍시다.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습관화시킵시다. 전도가 몸에 배게 합시다. 부모가 먼저 앞장서서 실천하면 자녀도 따라오게 됩니다. 신앙천대, 축복천대의 복이 이어집니다.
둘째, 고생도 시키자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부모들은 거꾸로 갑니다. 수입 중에 가장 큰 지출이 자녀를 위해 쓰이는 돈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고생하는 것을 못 견딥니다. 숙제까지 대신해줄 정도입니다. 공공장소에서, 예배드리는 장소에서 떠들어도 내버려 둡니다. 이것은 자녀를 망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구유에 누이셨고, 가난한 목수로 살게 하셨습니다. 매 맞고 가시관 쓰는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인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록펠러 등도 자녀를 고생시켰습니다.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독립정신을 가르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절약과 노동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바른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 최고의 자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녀를 고생시킵시다. 어릴 때부터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하게 합시다. 땀의 가치를 깨닫게 해줍시다. 오늘날 금융위기가 다가온 것은 땀을 흘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고생은 기초체력입니다. 기초체력이 튼튼해야 어느 분야에서든지 성공자가 됩니다. 성적만 좋은 아이는 미래가 없습니다. 실력만 갖춘 사람은 지도자가 못 됩니다. 인격과 건강한 마음이 더해지고, 봉사와 헌신이 깃들여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가 되고, 성공자가 됩니다.
셋째, 부모·어른·스승 공경하게 하자
아이들로 하여금 사랑만 받게 할 것이 아니라, 부모·어른·스승을 공경하게 해야 합니다. 효자로 키우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자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효하는 자에게 복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효의 핵심은 하모니입니다. 하모니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관계가 좋아야 행복해집니다. 그중에도 기본이 되는 부모 자녀의 관계가 바로 서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는데도 아픈 까닭이 무엇입니까? 기본이 되는 부모 자녀 관계가 허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가까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님께 사랑받고, 동시에 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부모와의 관계가 바로 설 때, 다른 관계도 바로 섭니다.
효자는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성공합니다. 다윗이 일생 중 가장 잘 한 일은 아버지 이새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이새가 전쟁터에 가서 형들의 안부를 살피라 했을 때, 다윗은 즉시 순종했습니다(삼상 17:17-20). 심부름을 하던 중에 골리앗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골리앗과 싸워 용사 다윗이 될 수 있었습니다. 순종하다가 놀라운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진정 자녀의 성공과 승리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부모·어른·스승을 공경하는 효자로 키웁시다.
넷째, 애국자로 기르자
과거 어른들 자녀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주려고 애썼습니다. 호연지기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기개, 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보다는 명문대를 선호합니다. 과연 명문대만 가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말씀합니다. 넓고 큰 마음과 도전 정신이 중요합니다. 애국이 바로 넓고 큰 마음입니다. 마음에 나라를 품어보십시오. 나라를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 얼마나 큰 사람입니까? 자기와 자기 가족만 보는 사람과는 그 그릇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품는 애국자가 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사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의연합니다. 어떤 고난이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다 품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쩨쩨하게 명문대나 높은 연봉에 매어두지 맙시다. 세상을 바꾸는 당당한 애국자로 키웁시다. 대한민국의 국가대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국가대표로 키웁시다. 자녀를 애국자로 키우는 것이 최고의 자녀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어린이들을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어린이들은 우리의 자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에게 신앙심, 효심, 애국심을 가르칩시다. 그것이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바로 가르칠 때,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섭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잠 22:6 / 지태일 목사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정들 위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5월 첫 주일,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와 가정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심이 늘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 자녀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를 잘 양육하여 다같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현대인의 가장 큰 죄가 세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물질 문명에 취해서 편리한 것들만 찾아 나감으로 좀 깊이 생각하고 인간의 존재나 의미 가치를 묻거나 지혜를 얻는 그런 공부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요즘 컴퓨터를 통하여 짧은 시간에, 먼 곳에 까지 가지 아니하여도 엄청난 정보를 쉽게 얻습니다만 아주 부분적인 것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통전적으로 깊이 공부하며 이해하는 그러한 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워도 배운대로, 알아도 아는 대로 행하질 않습니다. 부득이 하다는 말로, 인간은 약하다는 말로 변명하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을 그대로 생활에 옮기지 않습니다. 갈수록 말만 많고, 비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데 말만 무성하지 행하는 것은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실천에 옮기는 의지가가 아주 박약한 것이 바로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세번째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무나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기주의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을 뿐더러 자녀에게까지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신앙적인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하다가도 조금만 어렵거나 열매가 잘 안보인다든가 아니면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교회나 신앙에서도 보면 일반 성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직자들이나 심지어 목사님 가정에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자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적으로 삽니다. 자녀들에 관해 너무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자녀들이 그렇게 교회에 안나오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종교는 자유인데요. 애들에게 왜 내가 예수 믿으라고 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예수믿는 것은 자유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랄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든, 인생이든 가르쳐야 됩니다. 사람은 저절로 되거나 성장하지 않습니다. 내버려두면 악으로 키워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자녀들에게 내가 깨달은 바 소중한 진리를 부지런히 가르쳐야 됩니다.
오늘 본문 잠 22:6은 지혜자 솔로몬의 잠언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옛날 히브리 사람들의 자녀교육의 원칙이었습니다. 철칙이었습니다. 그리고 전(全) 세대에 걸쳐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자녀 교육의 원리로 작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수많은 어린이를 키워본 가정의 부모님들이나, 연구한 교육자들에 의해서 확증된 실제적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바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제외한다면 세상에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시기는 언제가 가장 좋은지? 또 가르친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잘 가르친 결과, 그 축복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1. 자녀교육의 시기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시작의 나이가 되는 ‘아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나아르’는 일반적으로 젖먹이 2-3세의 아이를 가리킴니다. 즉 자녀 교육의 적절한 시기는 바로 어려서부터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지능은 네살 때 이미 90% 이상이 형성이 되고, 한살부터 세살 이내에 어린아이의 정신 발달은 이미 결정이 되고, 6살 이전에 한 개인의 인격적인 토대가 형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동 심리학자들도 아이들이 한 인격적인 사람으로서의 성격과 습관이 언제 형성되는가? 질문에 태어나서부터 5세까지 기본적인 인격 형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예전에는 세 살이면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이미 세 살이면 거의 모든 것이 완성되어 가는 단계입니다.
정신적 발달이 세 살이면 이미 결정되고 여섯 살이면 일생의 인격이 결정되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었을 때에, 어느 정도 컸을 때에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님니다. 나이가 어릴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멸망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교육은 어릴수록 더 유리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인격형성이 아주 어린 시절에 이루어진다는 것과 한번 형성된 인격은 좀처럼 고쳐지기 어렵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인 할버톤이 어느 날 자기 어린 아들과 친구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아들에게 아들의 친구가 이런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 도시의 시장님과 아주 친하단다 그때 아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친하단다 할버톤은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감격해 왈칵 눈물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신앙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1,000명의 기독교 회심자를 상대로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20살 사이에 회심한 수가 337명이고, 30-40살 사이에 회심한 수가 96명이고, 40-50살 사이에 회심한 수가 15명이고, 50-60살 사이에 회심한 사람이 3명이며, 60-70살 사이에 회심한 사람이 한 명이고, 70세 이상에 회심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러나 상당히 현실적인 통계라고 봅니다. 이것은 고령화일수록 개종하기 어려운 것을 보여주고 반면에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빠를수록, 이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호박순이 자랄 때, 그 순의 방향을 어떻게 돌려놓느냐에 따라 그 줄기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때는 넣는 대로 들어가고, 보는 대로 기억하고, 가르치는 대로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밀가루 반죽을 보십시오. 밀가루 반죽을 해 가지고 떼면 수제비입니다. 방망이로 눌러서, 접어서 썰면 칼국수요. 수제비도, 칼국수도 맘대로 됩니다. 그러나 그런 밀가루가 굳어 보세요. 돌덩이는 이유도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몰랑몰랑 할 때는 수제비도 되고, 칼국수도 되지만 굳어 버리면 돌덩이 같단 말입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 그 틀을 만들고, 병은 초기에 잡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랬지, 마땅히 행할 길을 어른에게 가르치라 그렇게 아니 말씀합니다. 아기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나이 많아서 배우는 것은 잊어 버립니다.
두 분의 목사님이 만나셨는데 한 분은 연세가 90이 넘으셨고, 한 분 목사님은 80이 넘으셨는데 두 분이 만나 대화를 하셨답니다. 이봐, 당신 입원했다지. 그래 입원했어/ 그래 좀 어때? 괜찮아/ 그러고 좀 이야기하시다가 정확하게 10분 이내로 또 한번 묻었답니다./ 자네 입원했다지. 그래 입원했어/ 어떻게 됐어? 퇴원했어 괜찮아/ 그러고 죽 이야 기하시다가 또 10분되면 또 그 이야기를 했답니다./ 자네 입원했다지. 옆에서 들어보니까 계속 일곱 번 여덟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왜 그런지 아세요? 10분전에 한 이야기도 다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연세가 많으면 쉽게 빨리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아침 먹은 걸 잊어버리고 자기 집에서 나온 것도 잊어 버리고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도 금방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나이 60이고 70이고 80이 되면 무엇을 가르쳐 주어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에 잘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가르치고 배워도 쉽게 잊어 버립니다. 그래서 늙어서 배우는 것보다 젊어서 어려서 배우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공부하는 때도 다 정해져 있잖습니까?
나이 드신 어른들 만나보면 언제 것을 잘 기억하십니까? 20대, 10대에 있었던 일은 골목골목 돌 하나 있는 것까지 다 기억합니다. 하나도 안 잊어버립니다. 모든 이야기, 언제 이야기만 하느냐? 어렸을 때 이야기는 잘 합니다. 연세 많으면 무엇을 배워도 금방 다 잊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녀에게 가르칠 때 언제 가르치라고 했습니까? 어렸을 때 가르치라, 네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교육의 시기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 잘 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를 축복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빨리 알고 인생의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자녀교육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이들에게 가르겠습니까? 교육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고 했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쳐야 할 내용을 마땅히 행할 길이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은 “그의 성질에 합당하게(in conformity to child’s nature)”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아이의 길을 따라’ 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본성, 구체적으로 그 아이의 본성(nature), 기질, 능력, 은사를 따라 가르치는 것입니다. 남이 한다거나 남이 하는 것이 좋아 보여서 가르치지 말고 아니면 부모가 보기에 좋다고 원한다고 그것을 가르쳐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야할 길, 마땅히 행할 길, 곧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전 12:13에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할 길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또 그 명령대로, 곧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문입니다.
잠언 1:7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근본을 가르치십시오. 이것은 기초입니다. 기초만 튼튼해도 무엇을 하거나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말씀합니다. 삶의 순서, 인간 생활의 순서,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혼돈하면 크게 낭패하게 됩니다. 건물을 지을 때 기초가 안되면 높이 올라간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나중에 대책이 없습니다. 그 아까운 재산, 물질, 노력 수고 사람 생명까지 다 잃습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온갖 공부나 과외를 다 시켜도 지식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그 자녀의 인생은 결국 부패하고 낭패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살리는 진리와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공부를 안하겠습니까? 훗날에 커서 가정을 등한히 하겠습니까? 힘들다고 낙심하여 인생을 좌절하며 넘어지겠습니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구하겠습니까? 아님니다. 세상 교육보다 신앙교육을, 육신을 위함보다 먼저 영혼을 위하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와 그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마 6:33)
엡 6:4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여기 주의 교양, 말씀과 훈계, 훈련이 바로 이 마땅히 행할 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녀들을 무엇으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일본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들 나름대로 인생의 목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교육의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될 수 있으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또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남과 나누어 가지라는 가르침을 많이 나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나누는 삶,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요 인생의 목적이 됩니다.
그러면 한국의 부모들은 과연 자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할까요? 바로 공부해라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부하는 것은 인생의 수단과 방법이지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모들은 인생의 목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고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단과 방법이지 목적은 아님니다. 대학 가는 것이 목적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대학은 하나의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요리문답 제1문과 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한 자녀교육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것은 인생의 목적이자 인생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낸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신약성경 한 권을 가지고 날마다 읽어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링컨이 9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낸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임종시에 링컨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항상 성경을 읽고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나의 부탁이다” 하고서 어머니는 눈을 감았습니다.
링컨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배운 영향이 일생동안 그를 지배하게 했습니다. 그는 정규적인 학교 교육이라고는 1년도 체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란 후에 대통령이 되어 아직까지도 세계 정치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기억되게 된 것입니다. 누가 그를 그렇게 해 주었습니까?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그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성경 교육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는 취임연설에서 “오늘의 내가 나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어머님이 가르쳐 주신 성경을 배운 덕택”이라 고백을 했습니다.
말씀을 받아 들이면 그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고 지식의 근본이 됩니다. 말씀보다 위대한 지혜와 지식의 교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관해서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주일을 성수해야 하나님앞에 바른 것이요 이런 자들이 하나님앞에서 복받는 가장 기본을 잘 하는 것입니다.
예배 다음으로 물질과 하나님 섬기는 일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십일조를 가르쳐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가르치면 늙어도 거기를 떠나지 않습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자 록펠러는 여섯 살 때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아 십일조를 드린 이후로 아흔 두 살이 되어 죽을 때까지 십일조를 도적질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최대의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록펠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받은 사나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 가지 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 게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적은 장수이다. 그는 98세까지 살았는데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고 깨끗하고 건 강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록펠러가 이런 3가지 기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바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일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춤추는 곳에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극장에 출입하지도 않았습니다.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식사 때마다 감사기도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매일같이 읽었습니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말씀을 날마다 대면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늘 말했습니다.
록펠러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그에게 있어서 순간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며 그 분의 계명에 삼가 주의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적 재벌 록펠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10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①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②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③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 두라
④ 원수를 만들지 말라
⑤ 예배를 드릴 때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드려라
⑥ 항상 아침에는 그 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⑦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를 드려라
⑧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⑨ 주일날 예배는 꼭 본 교회에서 드려라
⑩ 아침에는 제일 먼저 말씀을 읽어라
미국의 유명한 부자인 콜게이트는 어린시절 비누 공장 직공으로 일하면서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콜게이트라는 위대한 기업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부모의 손을 빌리지 말고 고사리 손이라도 직접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감사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임하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게 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먼저 생각하고 택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미국 초기 건국 이념은 청교도 사상에 기초한 사상이었습니다. 교회를 먼저 짓고 후세 교육을 위해서 성경 학교를 먼저 세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 예일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이 모두 성경 학교로 세운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어서 세계적인 교육 기간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지폐에는 “인 갓 위 트러스트(In God we trus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많이 타락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갔지만 그래도 근본 사상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이라는 문화가 존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택하고 세상 나라를 먼저 택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먼저 택하고 세상의 정의를 먼저 택하지 말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치면 거기에서 지혜와 지식과 총명을 얻습니다.
미국 교육을 보면 1960년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때 공립학교에서 기도와 성경 공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뒤부터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고 세상 학문에 치중했습니다. 그 결과 청소년들이 타락하고 대도시마다 범죄율이 급증하게 된 사실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미국의 도덕적인 타락은 공립학교에서 기도하는 것과 성경 공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다음부터입니다. 교내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나고, 젊은이들이 마약 중독과 도덕적인 부패와 타락이 일어난 것입니다. 때문에 자녀들에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도록 가르치고 반드시 그들에게 십계명부터 외우고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길, 본분을 가르치십시오. 당연히 반드시 꼭!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십시오. 이것이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교육의 내용입니다.
3. 세 번째로 자녀교육의 방법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오늘 가르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가르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노크’는 문자적 뜻으로 훈련시키다(train up), ‘길들이다’지만 그의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다(dedication)의 의미 역시 포함된 단어입니다. 즉 이 말은 그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훈련하라, 길을 들여라는 의미입니다.
신자들이 그 자녀를 가르치는 목적은, 실상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잠 19:18) 그러면 아이들이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훈련, 길들이려면!
첫째는 유모가 아이들을 먹이듯이 가르쳐야 합니다.
학습기의 어린 아이들을 유모가 아이들을 먹이듯이, 온화한 손길로 조금씩 그리고 자주 가르치라(신 6:7)는 말입니다.
둘째는, 훈련을 잘 시켜야 합니다.
군사와 같이 규율 아래서 훈련시키라는 것입니다. 군인은 무기를 사용하고 대오를 지으며 명령을 따르는 법이다. 그들이 가고 싶어하는 길로 가르치지 말고(저희의 타락한 마음에는 편견이 있어 그들을 곁길로 이끌어낸다) 너희가 그들을 진짜 사랑한다면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그 길로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징계를 해서라도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복종하는 훈련을 시켜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생활에 또 학교생활에 사회생활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훈련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훈련이 가해지지 않으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훈련을 잘해서 아이들에게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잘 조절해서 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징계를 해서라도 아이들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실한 자녀교육의 방법으로 징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잠 13:24에서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달이라고 하는 것은 회초리질 또는 채찍질 이라는 뜻입니다.
또 잠 23:13-14절을 보면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잠 29:15을 보면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귀하다고, 이쁘다고 제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그 어미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의 기를 살려준다고 그냥 오냐 오냐 하면서 키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것이 기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를 살린다고 하는 것은 적절한 때에 격려와 칭찬을 잘해주어야 기가 사는 것이요 기가 꺽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냐,오냐는 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버릇을 고약하게 키우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가 사느니, 죽느니의 의미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냐오냐 하는 것은 버릇을 나쁘게 키우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가정과 두 아들들의 불행한 결과는 바로 가정에서 아이를 제대로 훈련시키지 않고 키운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녀를 훈계하지 않고, 그들 좋은 대로만 놔두면 결국 자신도 망하고 부모님을 욕되게 하며, 더 나아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아이들의 특성(은사)을 잘 계발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억제해 주어야 할 나쁜 부분이 있는가 하면 또 계발시켜 주어야 할 좋은 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점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훈련을 통해서 억제 해주고 또 좋은 점, 은사나 재능을 잘 계발시켜 주어야 합니다.
자녀교육에 부모가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얘도 하니까, 쟤도 하니까 너도 해야지 보다는 쟤는 해도 너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를 시키고, 쟤는 안해도 너는 해야 되는 것에 대해 이해를 시켜 줘야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로서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은사가 있을 것입니다.
학자가 될 아이들은 학자로, 사업가가 될 아이들은 사업가로, 정치가가 될 아이들은 정치가로, 예술가가 될 아이들은 예술가로 계발시켜 주는 것이 바른 자녀교육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키워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로 나가는 자녀는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어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음악가는 음악가대로 삶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요 부모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4. 자녀교육의 결과와 약속 그리고 축복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마땅히 행할 길을 잘 훈련시키면, 그 결과, 축복은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 아이들이 나중에 성숙해도 그 부모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가운데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부모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축복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살면서 자기들이 훈육 받았던 선한 길에서 떠나가는 자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가르침을 받은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 말을 남기고 있는 솔로몬 자신도 그러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배운 신앙의 교훈, 유언, 가르침이 많았습니다만 솔로몬은 그대로 끝까지 못살았습니다. 아버지 뒤를 이어 왕이 되고 성전을 건축하여 드리고 일천번제도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줄도 알고 기도의 응답으로 지혜도 받고 부귀와 영화 장수도 받아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헛덴 일을 힘썼으며 후궁을 1,000명 이상 두고 그들이 가지고 온 우상까지 용납하여 이스라엘에 우상이 가득하게 하고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그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가 분열되는 아픔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 노년에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고 후회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오늘 자신의 고백이 바로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경험과 같이 이른 교육, 조기교육, 어려서 잘 가르친 교육은 언젠가 자기 회복의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 12장 끝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이제 하나님만을 잘 경외할 것”을 고백함 볼 때 늙어서 언젠가는 다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2008년 어린이 주일을 맞아 아이들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린이는 가정과 사회, 교회의 희망입니다. 아이들을 통해 우리 가정과 사회, 교회가 계속 이어져 갈 것입니다. 아이들에 의해 우리가 애쓰고 수고한 보람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어린이들로 양육하기 위해 우리가 꼭 명심불망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람니다. 어려서부터 마땅히 행할 인생의 본분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젖먹이는 유모처럼 온화하게 사랑으로 가르치시되 어긋난 딴 길로 갈 때에는 훈계하고 훈련시킴으로 그 말씀의 교훈이 늙어서라도 떠나지 아니하고 돌아오는 축복을 다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잠 22:6 / 지태일 목사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정들 위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5월 첫 주일,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와 가정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심이 늘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 자녀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를 잘 양육하여 다같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현대인의 가장 큰 죄가 세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물질 문명에 취해서 편리한 것들만 찾아 나감으로 좀 깊이 생각하고 인간의 존재나 의미 가치를 묻거나 지혜를 얻는 그런 공부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요즘 컴퓨터를 통하여 짧은 시간에, 먼 곳에 까지 가지 아니하여도 엄청난 정보를 쉽게 얻습니다만 아주 부분적인 것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통전적으로 깊이 공부하며 이해하는 그러한 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워도 배운대로, 알아도 아는 대로 행하질 않습니다. 부득이 하다는 말로, 인간은 약하다는 말로 변명하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을 그대로 생활에 옮기지 않습니다. 갈수록 말만 많고, 비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데 말만 무성하지 행하는 것은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실천에 옮기는 의지가가 아주 박약한 것이 바로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세번째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무나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기주의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을 뿐더러 자녀에게까지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신앙적인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하다가도 조금만 어렵거나 열매가 잘 안보인다든가 아니면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교회나 신앙에서도 보면 일반 성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직자들이나 심지어 목사님 가정에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자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적으로 삽니다. 자녀들에 관해 너무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자녀들이 그렇게 교회에 안나오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종교는 자유인데요. 애들에게 왜 내가 예수 믿으라고 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예수믿는 것은 자유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랄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든, 인생이든 가르쳐야 됩니다. 사람은 저절로 되거나 성장하지 않습니다. 내버려두면 악으로 키워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자녀들에게 내가 깨달은 바 소중한 진리를 부지런히 가르쳐야 됩니다.
오늘 본문 잠 22:6은 지혜자 솔로몬의 잠언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옛날 히브리 사람들의 자녀교육의 원칙이었습니다. 철칙이었습니다. 그리고 전(全) 세대에 걸쳐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자녀 교육의 원리로 작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수많은 어린이를 키워본 가정의 부모님들이나, 연구한 교육자들에 의해서 확증된 실제적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바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제외한다면 세상에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시기는 언제가 가장 좋은지? 또 가르친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잘 가르친 결과, 그 축복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1. 자녀교육의 시기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시작의 나이가 되는 ‘아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나아르’는 일반적으로 젖먹이 2-3세의 아이를 가리킴니다. 즉 자녀 교육의 적절한 시기는 바로 어려서부터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지능은 네살 때 이미 90% 이상이 형성이 되고, 한살부터 세살 이내에 어린아이의 정신 발달은 이미 결정이 되고, 6살 이전에 한 개인의 인격적인 토대가 형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동 심리학자들도 아이들이 한 인격적인 사람으로서의 성격과 습관이 언제 형성되는가? 질문에 태어나서부터 5세까지 기본적인 인격 형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예전에는 세 살이면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이미 세 살이면 거의 모든 것이 완성되어 가는 단계입니다.
정신적 발달이 세 살이면 이미 결정되고 여섯 살이면 일생의 인격이 결정되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었을 때에, 어느 정도 컸을 때에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님니다. 나이가 어릴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멸망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교육은 어릴수록 더 유리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인격형성이 아주 어린 시절에 이루어진다는 것과 한번 형성된 인격은 좀처럼 고쳐지기 어렵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인 할버톤이 어느 날 자기 어린 아들과 친구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아들에게 아들의 친구가 이런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 도시의 시장님과 아주 친하단다 그때 아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친하단다 할버톤은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감격해 왈칵 눈물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신앙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1,000명의 기독교 회심자를 상대로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20살 사이에 회심한 수가 337명이고, 30-40살 사이에 회심한 수가 96명이고, 40-50살 사이에 회심한 수가 15명이고, 50-60살 사이에 회심한 사람이 3명이며, 60-70살 사이에 회심한 사람이 한 명이고, 70세 이상에 회심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러나 상당히 현실적인 통계라고 봅니다. 이것은 고령화일수록 개종하기 어려운 것을 보여주고 반면에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빠를수록, 이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호박순이 자랄 때, 그 순의 방향을 어떻게 돌려놓느냐에 따라 그 줄기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때는 넣는 대로 들어가고, 보는 대로 기억하고, 가르치는 대로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밀가루 반죽을 보십시오. 밀가루 반죽을 해 가지고 떼면 수제비입니다. 방망이로 눌러서, 접어서 썰면 칼국수요. 수제비도, 칼국수도 맘대로 됩니다. 그러나 그런 밀가루가 굳어 보세요. 돌덩이는 이유도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몰랑몰랑 할 때는 수제비도 되고, 칼국수도 되지만 굳어 버리면 돌덩이 같단 말입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 그 틀을 만들고, 병은 초기에 잡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랬지, 마땅히 행할 길을 어른에게 가르치라 그렇게 아니 말씀합니다. 아기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나이 많아서 배우는 것은 잊어 버립니다.
두 분의 목사님이 만나셨는데 한 분은 연세가 90이 넘으셨고, 한 분 목사님은 80이 넘으셨는데 두 분이 만나 대화를 하셨답니다. 이봐, 당신 입원했다지. 그래 입원했어/ 그래 좀 어때? 괜찮아/ 그러고 좀 이야기하시다가 정확하게 10분 이내로 또 한번 묻었답니다./ 자네 입원했다지. 그래 입원했어/ 어떻게 됐어? 퇴원했어 괜찮아/ 그러고 죽 이야 기하시다가 또 10분되면 또 그 이야기를 했답니다./ 자네 입원했다지. 옆에서 들어보니까 계속 일곱 번 여덟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왜 그런지 아세요? 10분전에 한 이야기도 다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연세가 많으면 쉽게 빨리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아침 먹은 걸 잊어버리고 자기 집에서 나온 것도 잊어 버리고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도 금방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나이 60이고 70이고 80이 되면 무엇을 가르쳐 주어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에 잘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가르치고 배워도 쉽게 잊어 버립니다. 그래서 늙어서 배우는 것보다 젊어서 어려서 배우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공부하는 때도 다 정해져 있잖습니까?
나이 드신 어른들 만나보면 언제 것을 잘 기억하십니까? 20대, 10대에 있었던 일은 골목골목 돌 하나 있는 것까지 다 기억합니다. 하나도 안 잊어버립니다. 모든 이야기, 언제 이야기만 하느냐? 어렸을 때 이야기는 잘 합니다. 연세 많으면 무엇을 배워도 금방 다 잊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녀에게 가르칠 때 언제 가르치라고 했습니까? 어렸을 때 가르치라, 네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교육의 시기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 잘 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를 축복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빨리 알고 인생의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자녀교육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이들에게 가르겠습니까? 교육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고 했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쳐야 할 내용을 마땅히 행할 길이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은 “그의 성질에 합당하게(in conformity to child’s nature)”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아이의 길을 따라’ 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본성, 구체적으로 그 아이의 본성(nature), 기질, 능력, 은사를 따라 가르치는 것입니다. 남이 한다거나 남이 하는 것이 좋아 보여서 가르치지 말고 아니면 부모가 보기에 좋다고 원한다고 그것을 가르쳐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야할 길, 마땅히 행할 길, 곧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전 12:13에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할 길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또 그 명령대로, 곧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문입니다.
잠언 1:7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근본을 가르치십시오. 이것은 기초입니다. 기초만 튼튼해도 무엇을 하거나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말씀합니다. 삶의 순서, 인간 생활의 순서,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혼돈하면 크게 낭패하게 됩니다. 건물을 지을 때 기초가 안되면 높이 올라간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나중에 대책이 없습니다. 그 아까운 재산, 물질, 노력 수고 사람 생명까지 다 잃습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온갖 공부나 과외를 다 시켜도 지식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그 자녀의 인생은 결국 부패하고 낭패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살리는 진리와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공부를 안하겠습니까? 훗날에 커서 가정을 등한히 하겠습니까? 힘들다고 낙심하여 인생을 좌절하며 넘어지겠습니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구하겠습니까? 아님니다. 세상 교육보다 신앙교육을, 육신을 위함보다 먼저 영혼을 위하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와 그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마 6:33)
엡 6:4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여기 주의 교양, 말씀과 훈계, 훈련이 바로 이 마땅히 행할 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녀들을 무엇으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일본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들 나름대로 인생의 목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교육의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될 수 있으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또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남과 나누어 가지라는 가르침을 많이 나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나누는 삶,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요 인생의 목적이 됩니다.
그러면 한국의 부모들은 과연 자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할까요? 바로 공부해라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부하는 것은 인생의 수단과 방법이지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모들은 인생의 목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고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단과 방법이지 목적은 아님니다. 대학 가는 것이 목적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대학은 하나의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요리문답 제1문과 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한 자녀교육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것은 인생의 목적이자 인생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낸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신약성경 한 권을 가지고 날마다 읽어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링컨이 9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낸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임종시에 링컨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항상 성경을 읽고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나의 부탁이다” 하고서 어머니는 눈을 감았습니다.
링컨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배운 영향이 일생동안 그를 지배하게 했습니다. 그는 정규적인 학교 교육이라고는 1년도 체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란 후에 대통령이 되어 아직까지도 세계 정치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기억되게 된 것입니다. 누가 그를 그렇게 해 주었습니까?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그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성경 교육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는 취임연설에서 “오늘의 내가 나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어머님이 가르쳐 주신 성경을 배운 덕택”이라 고백을 했습니다.
말씀을 받아 들이면 그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고 지식의 근본이 됩니다. 말씀보다 위대한 지혜와 지식의 교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관해서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주일을 성수해야 하나님앞에 바른 것이요 이런 자들이 하나님앞에서 복받는 가장 기본을 잘 하는 것입니다.
예배 다음으로 물질과 하나님 섬기는 일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십일조를 가르쳐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가르치면 늙어도 거기를 떠나지 않습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자 록펠러는 여섯 살 때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아 십일조를 드린 이후로 아흔 두 살이 되어 죽을 때까지 십일조를 도적질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최대의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록펠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받은 사나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 가지 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 게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적은 장수이다. 그는 98세까지 살았는데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고 깨끗하고 건 강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록펠러가 이런 3가지 기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바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일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춤추는 곳에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극장에 출입하지도 않았습니다.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식사 때마다 감사기도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매일같이 읽었습니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말씀을 날마다 대면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늘 말했습니다.
록펠러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그에게 있어서 순간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며 그 분의 계명에 삼가 주의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적 재벌 록펠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10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①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②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③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 두라
④ 원수를 만들지 말라
⑤ 예배를 드릴 때 항상 앞자리에 앉아서 드려라
⑥ 항상 아침에는 그 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⑦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를 드려라
⑧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⑨ 주일날 예배는 꼭 본 교회에서 드려라
⑩ 아침에는 제일 먼저 말씀을 읽어라
미국의 유명한 부자인 콜게이트는 어린시절 비누 공장 직공으로 일하면서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콜게이트라는 위대한 기업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부모의 손을 빌리지 말고 고사리 손이라도 직접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감사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임하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게 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먼저 생각하고 택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미국 초기 건국 이념은 청교도 사상에 기초한 사상이었습니다. 교회를 먼저 짓고 후세 교육을 위해서 성경 학교를 먼저 세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 예일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이 모두 성경 학교로 세운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어서 세계적인 교육 기간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지폐에는 “인 갓 위 트러스트(In God we trus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많이 타락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갔지만 그래도 근본 사상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이라는 문화가 존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택하고 세상 나라를 먼저 택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먼저 택하고 세상의 정의를 먼저 택하지 말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치면 거기에서 지혜와 지식과 총명을 얻습니다.
미국 교육을 보면 1960년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때 공립학교에서 기도와 성경 공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뒤부터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고 세상 학문에 치중했습니다. 그 결과 청소년들이 타락하고 대도시마다 범죄율이 급증하게 된 사실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미국의 도덕적인 타락은 공립학교에서 기도하는 것과 성경 공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다음부터입니다. 교내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나고, 젊은이들이 마약 중독과 도덕적인 부패와 타락이 일어난 것입니다. 때문에 자녀들에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도록 가르치고 반드시 그들에게 십계명부터 외우고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길, 본분을 가르치십시오. 당연히 반드시 꼭!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십시오. 이것이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교육의 내용입니다.
3. 세 번째로 자녀교육의 방법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오늘 가르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가르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노크’는 문자적 뜻으로 훈련시키다(train up), ‘길들이다’지만 그의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다(dedication)의 의미 역시 포함된 단어입니다. 즉 이 말은 그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훈련하라, 길을 들여라는 의미입니다.
신자들이 그 자녀를 가르치는 목적은, 실상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잠 19:18) 그러면 아이들이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훈련, 길들이려면!
첫째는 유모가 아이들을 먹이듯이 가르쳐야 합니다.
학습기의 어린 아이들을 유모가 아이들을 먹이듯이, 온화한 손길로 조금씩 그리고 자주 가르치라(신 6:7)는 말입니다.
둘째는, 훈련을 잘 시켜야 합니다.
군사와 같이 규율 아래서 훈련시키라는 것입니다. 군인은 무기를 사용하고 대오를 지으며 명령을 따르는 법이다. 그들이 가고 싶어하는 길로 가르치지 말고(저희의 타락한 마음에는 편견이 있어 그들을 곁길로 이끌어낸다) 너희가 그들을 진짜 사랑한다면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그 길로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징계를 해서라도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복종하는 훈련을 시켜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생활에 또 학교생활에 사회생활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훈련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훈련이 가해지지 않으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훈련을 잘해서 아이들에게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잘 조절해서 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징계를 해서라도 아이들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실한 자녀교육의 방법으로 징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잠 13:24에서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달이라고 하는 것은 회초리질 또는 채찍질 이라는 뜻입니다.
또 잠 23:13-14절을 보면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잠 29:15을 보면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귀하다고, 이쁘다고 제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그 어미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의 기를 살려준다고 그냥 오냐 오냐 하면서 키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것이 기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를 살린다고 하는 것은 적절한 때에 격려와 칭찬을 잘해주어야 기가 사는 것이요 기가 꺽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냐,오냐는 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버릇을 고약하게 키우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가 사느니, 죽느니의 의미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냐오냐 하는 것은 버릇을 나쁘게 키우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가정과 두 아들들의 불행한 결과는 바로 가정에서 아이를 제대로 훈련시키지 않고 키운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녀를 훈계하지 않고, 그들 좋은 대로만 놔두면 결국 자신도 망하고 부모님을 욕되게 하며, 더 나아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아이들의 특성(은사)을 잘 계발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억제해 주어야 할 나쁜 부분이 있는가 하면 또 계발시켜 주어야 할 좋은 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점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훈련을 통해서 억제 해주고 또 좋은 점, 은사나 재능을 잘 계발시켜 주어야 합니다.
자녀교육에 부모가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얘도 하니까, 쟤도 하니까 너도 해야지 보다는 쟤는 해도 너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를 시키고, 쟤는 안해도 너는 해야 되는 것에 대해 이해를 시켜 줘야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로서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은사가 있을 것입니다.
학자가 될 아이들은 학자로, 사업가가 될 아이들은 사업가로, 정치가가 될 아이들은 정치가로, 예술가가 될 아이들은 예술가로 계발시켜 주는 것이 바른 자녀교육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키워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로 나가는 자녀는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어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음악가는 음악가대로 삶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요 부모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4. 자녀교육의 결과와 약속 그리고 축복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마땅히 행할 길을 잘 훈련시키면, 그 결과, 축복은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 아이들이 나중에 성숙해도 그 부모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가운데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부모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축복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살면서 자기들이 훈육 받았던 선한 길에서 떠나가는 자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가르침을 받은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 말을 남기고 있는 솔로몬 자신도 그러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배운 신앙의 교훈, 유언, 가르침이 많았습니다만 솔로몬은 그대로 끝까지 못살았습니다. 아버지 뒤를 이어 왕이 되고 성전을 건축하여 드리고 일천번제도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줄도 알고 기도의 응답으로 지혜도 받고 부귀와 영화 장수도 받아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헛덴 일을 힘썼으며 후궁을 1,000명 이상 두고 그들이 가지고 온 우상까지 용납하여 이스라엘에 우상이 가득하게 하고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그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가 분열되는 아픔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 노년에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고 후회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오늘 자신의 고백이 바로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경험과 같이 이른 교육, 조기교육, 어려서 잘 가르친 교육은 언젠가 자기 회복의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 12장 끝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이제 하나님만을 잘 경외할 것”을 고백함 볼 때 늙어서 언젠가는 다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2008년 어린이 주일을 맞아 아이들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린이는 가정과 사회, 교회의 희망입니다. 아이들을 통해 우리 가정과 사회, 교회가 계속 이어져 갈 것입니다. 아이들에 의해 우리가 애쓰고 수고한 보람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어린이들로 양육하기 위해 우리가 꼭 명심불망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람니다. 어려서부터 마땅히 행할 인생의 본분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젖먹이는 유모처럼 온화하게 사랑으로 가르치시되 어긋난 딴 길로 갈 때에는 훈계하고 훈련시킴으로 그 말씀의 교훈이 늙어서라도 떠나지 아니하고 돌아오는 축복을 다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