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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굴에서 성전암으로 / 성철스님 수행일화 17
1953년 초가을,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은 15세 소년이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 천제굴을 찾아왔다.
소년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맹장염을 알았지만 전쟁 중이라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당시에 성철은 악신(惡神)도 천도시키는 귀신 쫓는 도인스님으로 알려져 있었다.
소년은 고모와 함께 천제굴에 올랐다.
고모는 이미 마산에서 성철의 가르침을 받으러 천제굴을 오르내렸던 불자였다.
15세 소년이 아버지 천도재를 지내러 왔으니 성철은 이를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다.
성철의 천도의식은 독특했다.
무속의 굿이나 유가의 제례를 흉내 낸 천도재에 익숙한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성철은 경전만을 독송했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봉암사 결사 때처럼 신도들이 직접 장만한 음식을 불전에 공양토록 했다.
가졌건 못 가졌건, 지위가 높건 낮건 직접 밥을 지어 올리게 했다.
그런 성철의 모습이 소년에게는 당당하고 고고하게 보였다.
성철은 소년에게 밥을 지어 올리게 하고 삼천배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위로의 설법을 했다.
인생의 무상함과 죽음의 의미를 들려주었다. 소년은 감격했다. 충만한 기운에 휩싸였다.
육신의 아버지를 보내고 마음의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바로 성철이 천제굴에서 얻은 첫 번째 제자 천제이다.
처음에 '초발심자경문'을 읽게 했다. 하루 한 쪽씩을 외워야 했다.
소년이 더듬거리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렸다. 다음에는 '채근담'과 '한산시'를 외우게 했다.
'사서삼경'으로 한문 실력을 기른 다음에야 비로소 불교 교리를 익히게 했다.
소년은 위장이 좋지 않았다. 전란 중에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소년에게 위장약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적게 먹으라 일렀다.
1953년 겨울은 몹시 춥고 허기졌다. 성철을 시봉하던 처사마저 집에 문제가 생겼다며 가버렸다.
결국 성철은 소년과 둘이서 겨울을 나야 했다. 성철은 밥을 짓고 소년은 국을 끓였다.
그해 겨울은 굶다시피 했다. 간혹 부산 신도들이 매서운 겨울추위를 뚫고 올라와 양식을 내려놓았다.
천제는 조계종단사에 전무후무한 '10년 행자'였다. 어느 날 성철이 말했다.
"너도 이제 스승을 찾아라. 나는 평생 상좌를 두지 않기로 했으니 운허 스님한테 가거라."
그러나 천제는 이를 거절했다. 처음 성철의 말을 거역한 셈이다.
"10년 행자로 살았는데 20년은 못 살겠냐고 했지. 가르침을 받으러 왔지 중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어깃장을 놓았어요.
그때(상좌를 안 들이겠다는) 그 룰을 깨지 않았으면 뒤의 상좌들은 아마 없었을 거야." (천제스님)
천제는 이후 어머니와 동생 다섯을 불가로 불러들였다. 육남매가 스님이 되었다.
조계종은 1955년 9월 성철을 해인사 주지에 임명했다. 종단의 일방적인 조치였다.
성철은 곧바로 사직원을 종정에게 보냈다. 결국 해인사 주지에 도반인 자운이 취임했다.
자운은 성철의 임명장을 지니고 가서 해인사 주지직을 인수했다. 성철은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마침 팔공산 파계사의 한송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파계사 산내 암자인 성전암이 비록 낡았지만 기세와 인연이 범상치 않으니 다시 일으켜 세워보라는 것이었다.
804년(신라 애장왕 5) 심지 스님이 창건한 고찰로 그 이후 조선시대 개관 스님이, 다시 현응 스님이 새로 지었다.
현응은 숙종의 부탁으로 세자의 잉태를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숙빈 최 씨가 현몽하고 세자를 낳았다고 한다.
바로 영조였다.
성전암은 파계사에서 1킬로미터 남짓 산길을 올라야 나타난다.
성철은 1955년 가을 통영 안정사 천제토굴을 빠져 나왔다. 막상 도착해보니 경내에는 변변한 건물 한 채 없었다.
그래도 눈을 들어보니 단풍이 고왔다. 늦가을이었다.
뜰이 넓지 않아서 건물을 줄이고 마당을 넓히기로 했다. 쉽지 않은 공사였다.
법전이 팔을 걷어붙였다. 독성각은 법당으로 쓰고 나한전에 불서를 모셨다.
성철은 암자 둘레에 철조망을 치라고 했다. 스스로 외부와 단절시켰다.
이른바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시작이었다.
비구와 대처승의 절 뺏기 싸움이 한창일 때 성철은 불교의 내적 정화를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천제, 성일, 만수 세 행자가 성철을 시봉했다. 모두 10년 만에 제자가 된 이들이었다.
#퇴옹성철선사(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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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스님을 처음 뵌 시절로 되돌아가니 지난 반백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감회가 무량하기만 합니다.
6 ·25전란 으로 병을 얻어 끝내 세상을 떠나신 부친의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 찾아간 곳이 천제굴.
스님께서는 부처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토굴 이름을 천제굴(闡提窟)이라고 이름하시고, 악신(惡神)도 천도시킨다는 도인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때였습니다.
재를 마친 후 스님의 자상하신 말씀은 저의 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부친을 떠나 보내고 마음의 부친을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전쟁의 인연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믿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첫 10년은 수행 행자로서 스님을 시봉하였고, 다음 10년은 팔공산 성전암에 은거 주석하시던 시절을 모셨고, 다음 10년은 가야산 해인총림 방장으로 계시던 때 방장실장으로, 다음 10년 은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하시어 열반하실 때까지 종정 사서실장으로, 가까이에서 시봉하고 지켜보고 온 인연을 갖게 되었으니, 저로서는 남다른 감회를 갖습니다.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차별 없이, 찾아오는 신도들은 모두 부엌에서 직접 밥을 지어 불전에 공양 올리게 하시던 스님의 엄한 모습과,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평범하게 대하시던 스님의 고고한 모습이 그때에도 멋있어 보여 철없이 흉내를 내다가 종아리를 맞은 일들이 새삼스럽게 기억납니다.
선망부모의 천도를 원하는 신도들에게는 먼저 돌아가신 영가를 위해 기원하라고 하시면서 참회 예배를 시키시던 일이며, 불공은 자신이 직접해야지 스님들께 부탁해서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삼천번 절을 하게 하시던 스님의 모습은 그 후 열반하시던 날까지 변함 없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
봉암사 결사가 전란으로 중도에 그친 일을 못내 아쉬워하시면서 천제굴에서라도 총림의 일과를 지켜야 한다고 능엄주와 예불대참회를 고집하셨으며, 범어를 손수 우리말로 음역하고 불공의 예식을 청규대로 고수하신 스님의 한국 불교 중흥을 위한 집념은 그때에도 이후에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생신상을 준비해 온 공양구를 담 너머로 쏟아 버리시고, 출가한 수행자는 육신의 생일이 의미가 없다 하시고 평생 생신을 세지 않으신 스님의 모습 또한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도 정화란 안으로부터 내실을 기하면서 이루어져야지, 패를 늘려 사찰 차지하는 싸움으로 비약하면 불교의 위상만 추락시킨다고 하신 말씀이 새도둑 묵은 도둑 이야기로 와전되어 일부의 저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정화운동에 앞장서시는 청담스님의 권고를 정중히 사양하시고 스님은 스님대로 하실 일이 따로 있다고 하시면서 일선에 나서지 않으셨으며, 해인사 주지 임명장도 자운스님께 미루시고 스님은 팔공산으로 자리를 옮겨 뒷날을 기약하는 지혜를 보이셨습니다.
천제굴에서 인연을 가진 스님으로는 서옹스님, 우봉스님, 경환스님, 혜암, 도우, 법전, 일조스님과 주야로 스님의 건강을 걱정해 주시던 인홍스님, 혜춘, 장일, 원묵, 묘전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계십니다.
모두 고마운 스님들 이십니다.
불교정화불사 때 양쪽 대표자가 차례로 찾아와 해인사에 가기를 간청했지만 아직은 시절인연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한송스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그 배후에는 일우스님의 공로가 있었기에 훗날 전계사로 모시는 일에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천제스님(해운대 청사포 해월정사)
첫댓글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_()()()_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