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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영희에게 (1)
영희야, 내가 지난 1월 제주에서 보낸 얘기 보낸다.
환우 중인 네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며.
나의 유배기(流配記)
이 건 영
유배의 출발
연초에 서가의 책들을 정리하는데 반으로 접힌 누런 대봉투 하나가 발치께로 툭 떨어졌다. 좀 두툼한 게 안에 무슨 내용물이 들어 있는 것 같아 살펴보니 그동안 잊고 지낸 메모지 묶음이었다.
메모지 묶음!
나는 2007년 3월1일자로 교감으로 승진하여, 6년 간 교감으로 재직하다가 2013년 2월, 40년 동안 천직(天職)으로 여긴 교직을 정년퇴임으로 마감했는데, 그 메모는 바로 교감 시절에 각종 안전사고나 학생과 교사 관련 사건들을 겪어 내면서 그때그때 상황을 정리, 메모한 것들이었다. 헤아려 보니 300여 매나 되었고 내용 또한 각양각색이라 나로 하여금 타임머신을 타고 8년 전부터 6년 동안의 그 시절로 돌아가 아련하고도 아픈 추억에 젖게 하였다.
좀 한가해지면 언젠가는 자세히 정리해 놓겠다고 내가 나 자신에게 약속했었는데 잊고 지냈던 그 메모들, 그런데 사실 나는 스스로에게 한 그 약속을 영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매번 현실의 우선순위에 밀려 미루어지고 정리를 못했기 때문에 늘 내 뒤통수에 매달려 ‘언제 정리를 할 거냐’며 무시로 나를 닦달하곤 했던 것이다.
메모를 다시 접어 챙기는데 순간적으로 뇌리에서 번개처럼 번쩍하는 의식의 외침이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깨웠다.
‘올해 내 나이 66, 누군가 그랬다. 6은 신의 숫자라고.
그래 신의 숫자인 6이 겹친 이 나이에 더 이상 미루면 나는 내가 아니다! 이참에 용단을 내리자.’
‘혼자 제주도에 가서 한 달 동안 유배자처럼 세상과 떨어져 지내면서 정리를 끝내고 마무리하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먼저 아내와 저녁에 산책을 하면서 내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고, 나 좀 제주도에 한 달 간만 유배시켜 달라고 했다. 늘 나를 믿고 배려해 주는 아내는 더 묻지 않고 그렇게 하라며 흔쾌한 지지를 해 주었다.
그런 뒤에 산후 조리차 친정에 와있던 작은 딸이 아내의 얘기를 듣고는 전화로 제 언니와 상의하더니, 왕복 비행기 편과 한 달 간 숙박할 곳을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모든 경비는 다 저희가 내겠다며 서둘러 예약을 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떠나기 전날인 1월 12일(월)에 아내가 정성껏 챙겨 준 쌀과 밑반찬 일부 등을 우체국에 가서 택배로 부쳤다. 그리고 여벌 옷 두어 벌, 세면도구, 약간의 부식과 쌀, 메모를 정리 기록할 공책 수십 권과 평소에 쓰는 만년필 두 자루, 잉크 한 병만 가지고 청주공항에서 1월 13일(화) 11:50,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자청(自請)한 유배(流配)를 떠났던 것이다.
유배를 떠나기 전 나는 나 스스로와 몇 가지 생활 규칙(약속)을 정했다.
하나, 날마다 새벽에 몸을 정제(整齊)하고 감사와 참회의 마음으로 어머님 과 아내가 있는 곳(제주에서는 북쪽)을 향해 9배(九拜)를 올린다.
둘, 매일 맨손체조(국민체조), 박수치기, 귀 운동을 한다.
셋, 끼니는 세 끼를 꼭 먹고 반찬은 3 가지로 하며, 매끼마다 감사의 기도 를 드린다.
넷, 설거지는 식사 후에 곧바로 한다.
(쌓이면 보기도 흉하고 냄새가 나니까.)
다섯, TV, 신문, 인터넷은 보지 않고 메모 정리에만 전념한다.
여섯, 하루에 30분 정도씩 꼭 산책을 한다.
제주공항에 안착, 수하물을 찾은 후 숙소의 안주인이 소개해 준 한림콜택시를 불러 타고 30여 ㎞를 달려 나의 유배지인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동양 빌리지에 14시 경에 토착했고, 내 방(202호)에 마음과 짐을 함께 풀었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유배생활은 1월 13일 저녁밥 짓기부터 시작된 셈이다.
유배를 자청한 목적이 6년 동안 기록한 메모를 정리한다는 그것, 딱 하나였으니 저녁 후에는 300여 장의 메모지들을 우선 연도별로 분류하는 걸로 일을 시작했다. 이후로 나는 쓰고 자고, 자고 일어 또 쓰고 그렇게 주야로 매진하였고 드디어 28일째 되는 날 모든 메모를 정리하고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유배도 삶 속에서 관계를 이어가는 하나의 생활인지라 나는 그 사이사이에 주인 김동관 님과 삶에 대한 대화를 여러 번 나누었다.
또한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 병원에 가서 진료도 받았고, 시장에 가서 세탁기에 쓸 세제, 그리고 간식 및 반찬거리도 사 왔다. 주인 내외와 산방산 탄산수 온천욕도 하고 김구 선생님과 역대 대통령들께서 다녀가신 유명한 음식점에 가서 사장님 내외분과 인사도 나누고 저녁 대접도 받았다.
2. 동양 빌리지 주인 김동관 님
숙소의 주인 김동관 님은 58년 생으로 고향이 충남 연기군 지금의 세종시라고 했다, 공직에 33년을 근무하고 명퇴한 후에 복잡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말하자면 반(半) 정도 은거(隱居)하는 중이었다. 암벽 등반에 조예가 깊고 수상 안전 및 레저 그리고 목조주택 건축 등에 관하여 자격증이 십여 개에 달하는 아주 멋지고 유능한 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인과는 같은 고향이고 또 내 막내 동생과 동갑인지라 자연스럽게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금방 호형호제하게 된 것은 그 무엇보다도 매사에 성실(誠實)을 우선으로 한다는 신념, 그 코드가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목조주택 전문가답게 집에 작업실과 최신 공구들을 잘 갖춰 놓았고, 집안과 객실 곳곳에는 손수 제작한 생활 가구들이 놓여 있는데, 나무의 재질을 있는 그대로 살린 소박함과 실용성이 일품이었다.
한편 더러 지인들의 주문을 받아 여러 가지 가구들을 제작해 주는데 내가 있는 동안에는 널평상 두 개를 제작하고 있었다. 내 보기엔 그만하면 된 것 같은데도 더 보기 좋고 튼튼하게 만들려고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존경스러웠다. 그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윤오영 선생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에 등장하는 그 노인을 예서 뵙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감동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방 (203호, 205호)에 세 든 어른들도 저렇게 성실한 사람은 근자에 처음 본다고 공통적으로 말씀하실 정도였다. 나는 형으로서 아우 김동관 님의 그 성실함과 목재를 다루는 솜씨의 뛰어남을 칭송하는 시조 한 수를, 그의 성함을 넣어 지었다.
또한 그런 남편을 묵묵히 내조하여 오늘이 있게 한 안주인 정명선 여사께도 성함을 넣어 송시 한 수를 지었다.
頌, 김동관(金東寬) 님
경주 김씨 후손으로 소중히 태어나서
오로지 성실로써 맡은 일 완수하고
자존심 곧추세우며 새 날 여는 저 손길.
동심처럼 해맑은 빌리지 만들고자
소박한 꿈을 엮어 하나하나 가꾸면서
나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 의지.
관계와 관계 속에 맺어진 귀한 인연
오늘도 소중하게 가슴에 새기면서
어느곳 계시더라도 행복을 비는 마음
頌, 정명선(鄭明善)님
정갈한 마음으로 새 날을 기도하며
가족의 행복 위해 어려움 이겨내니
오늘도 동양빌리지 맑은 햇살 번진다.
명랑하고 고운 음색 오카리나 선율 따라
해님도 방긋방긋 웃음으로 화답하고
바다는 가슴을 열고 푸른 노래 부른다.
선남녀 귀한 인연 사랑으로 꽃 피우고
실한 열매 곱게 자라 한 인물 되었으니
빛 고운 미래를 열며 환희 되어 춤춘다.
3. 홍연천(洪連天) 사장님
어느 날 아우 김동관 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서예에 관심이 있다니까 가까운 곳에 ‘옹포별장가든’이라고 있는데, 거기 사장님의 부친 홍완표 선생께서 쓰신 좋은 글씨와 전각 작품들이 많다며 언제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홍사장님과는 제주에 이주했을 때부터 교유하여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며, 그래서 메모 정리가 ⅔쯤 끝났을 때 ‘옹포별장가든’에 가게 되었다.
처음 만난 나를 서슴없이 반겨 맞아 주시고 거실로 안내하여 전통차를 대접하시면서 ‘옹포별장가든’에 대해 말씀해 주신 홍연천 사장님은 서양화가였다. 집안 곳곳에 걸려 있는 그의 유화 작품은 고운 선홍색 계통이 많았는데,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내 눈에는 강렬한 빛깔 속에 어딘지 모르게 은은한 향수(鄕愁) 같은 그리움 또는 아련한 슬픔이 배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옹포별장가든’은 일제 때 제주도에 주둔했던 일본 해군 장성의 별장으로 지어진 곳인데, 부친 홍완표 선생께서 매입하신 것을 모친께서 관리해 오시다가 홍사장님께 물려주신 유산이라고 했다. 일제 산물이긴 하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문화재 당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옹포별장가든’. 날이 어두워서 전체를 둘러보지 못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제주도에서만 서식하는 녹나무 여러 그루가 아름드리로 자란 것을 보면 그 역사의 연륜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옹포별장가든’에는 개업 이래, 김구 선생을 비롯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대통령이 다녀간 집으로, 고유의 맛과 유서 깊은 정원 풍경이 어우러진 명소 중의 명소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집에서 처음 개발해 1997년 북제주군 맛자랑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한 선인장김치와 2002년 전국김치엑스포에서 대상을 수상한 귤김치를 맛볼 수 있다.
홍 사장님은 올해 갑년(甲年)을 맞았는데, 질곡의 가족사 속에서 그 간난의 세월을 이겨내며, 오직 하나뿐인 자식(홍 사장)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단 하루도 잊어 본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며 눈시울을 붉힐 때는 나도 고향에 홀로 계신 노모 생각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날마다 어머니를 사모하며 지내는 홍 사장님의 효심을 떠올리며 역시 그와 안주인 김희정 여사의 성함을 넣어 송시 – 사모곡(思母曲) 1, 2를 지었다.
사모곡(思母曲) 1
홍안의 미소년이 어느덧 회갑이라
뒤돌아 바라보니 미소 짓는 어머니
한 평생 어이 잊으랴 그 깊은 모성애를.
연년세세 잠시라도 이 못난 자식 위해
온 삶을 다 바쳐서 사랑으로 가꾼 터전
사계절 어느 때라도 꽃 아닌 적 있을까.
천사의 어진 손길 왜 진작 몰랐을까
가신 길 밟아보니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당신의 그리운 모습 오늘도 그립니다.
사모곡(思母曲) 2
김매고 북돋우며 의지로 키운 날들
잡아주신 그 손길 바른 삶 이끄시고
오늘도 거친 세파를 이겨 넘는 힘입니다.
희망이란 이름으로 가족을 보듬으며
한평생 희생의 길 모진 세월 견디시고
편안한 보금자리에 자식 먼저 챙기신 삶
정 많은 당신께선 아낌없이 주셨기에
저희들 넉넉하니 즐겁게 누립니다.
어머님 걱정 마시고 극락왕생 하소서.
4. 메모를 정리하며
나는 메모를 정리하면서 학교에 큰 안전사고나 막무가내인 학부모를 만나 사건의 해결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마다 앞장서서 격려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조건 없는 도움을 주신 분들, 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신 고마운 분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다혈질적이고 급한 성미로 인해 선생님들께 상처를 준 죄송한 사례도 여럿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고마운 분들과 죄송한 분들께 이제 다시 한 번 감사와 사과를 드리면서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얼마나 큰 다행인가.
비록 많은 시간이 흐르긴 했어도 고마운 분들께는 감사의 편지를, 죄송한 분들께는 사과의 편지를 쓰리라고 다짐했다.
5. 유배의 끝자락에서
첫날부터 이십팔 일째 되는 날까지 3백여 장의 메모를 십 수 권의 공책에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목적을 달성했으니 나의 유배 생활은 일단 객관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 유배생활에서 메모 정리라는 가시적이고 계량적인 성공보다도 더 중요한 몇 가지 경험을 했다.
첫째, 죽음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눈만 뜨면 마주했던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특히 잠자리에 들 때면 텅 비어 있는 옆 자리를 보면서, 문득 아! 죽음도 이와 같아서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의 다름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다. 죽음, 그것은 늘 곁에 있던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생각에 이르자 새삼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사는 동안 아내를 비롯한 모든 인연들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둘째, 먹는 것에 대해 더욱 잘 절제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
나는 끼니마다 한 공기의 따뜻한 밥과 세 가지 반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찬을 더해 매번 일식 사찬의 식사를 했는데, 이 따뜻한 밥상은 걸인이나 노숙자가 그렇게도 먹고 싶어 하는 따뜻한 밥상이 아니던가. 집을 떠났어도 날마다 따뜻하고 맛있는 일식 사찬의 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물론 평소에도 나는 지나치게 짜고 매운 것을 제외하고는 반찬에 대해 어떻다고 투정해 본 적이 없는데, 이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맛보다도 그저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된다는 나름의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십여 년 전부터는 먹는 것에 대해 욕심이 생길 때마다 법정 스님이 쓰신 수필, ‘먹어서 죽는다.’를 경책 삼아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 물론 유배 기간에도 내내 스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셋째, 설거지는 물론이고 세탁기 돌리기, 찌개 끓이기도 잘하게 되었다.
찌개는 참치김치찌개인데, 누구에게도 대접할 수 있을 것 같다.
넷째, 신문, TV, 인터넷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어쩌면 내게는 없는 때가 마음을 더욱 깊이 침잠시켜 깨끗하게 정화시킬 수 있는 맑은 시간이 되었다고 본다.
넷째, 중국 고대 요임금 시절에 어느 노인이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를 다시 한 번 음미했다.
日出而作, 日入而息.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鑿井而飮, 耕田而食.(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는데)
帝力於我何有哉.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 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오늘의 정치 상황 속에서 내 밥 내가 해 먹고 내 일 내가 알아서 하는데, 누가 대통령이면 뭐하고 누가 국회의원이요 또 장관이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그저 가장 비극적인 현실이 될 전쟁만 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집에 돌아 온 날은 내 서재가 잠시 낯설게 느껴져 속으로 조금 당혹스러웠다. 근데 그것은 그만큼 내 유배생활이 치열했다는 증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가져 본 유배생활을 통해 지나온 내 생활을 깊이 반성하고 안으로는 부모님과 내 아내와 두 딸과 사위, 그리고 손녀, 손자에게도 감사하며, 밖으로는 나와 만난 선연이나 악연을 막론하고 그 모든 인연들께 감사하는 기도를 계속하게 되었다.
유배를 떠나기 전에 내 스스로에게 한 여섯 가지 약속 중에서 메모 정리만 빼고 나머지는 습관을 들여 잘 지켜 가려고 노력 중에 있다.
지금 내 뒤통수는 묵은 메모의 정리를 통해 한결 가벼워졌으며, 정리된 메모들은 몇 년 후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세상에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내게 유배의 기회를 준 사랑하는 가족들과 유배생활 동안 맺어진 새로운 인연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오늘 아침에도 몸과 마음을 정제하고 경건하게 9배(九拜)를 올렸다.
※ 추기(追記)
외람되지만 위 사모곡 1, 2는 홍연천 사장께서 시비(詩碑)로 제작하여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 옹포별장가든』에 세웠다고 소식과 사진을 보내왔다.
(문단 말석에 있는 무명 시인인 내게는 큰 영광이요 또한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다만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내 삶의 철학이 그래도 조금은 바른 길인 것 같아 안도할 수 있었다.)
첫댓글 김정희 추사와 다르게 자진하여 유배한 모습 대단하구요.
28일만에 마친 원고 대단합니다.
좋은 곳에 좋은 생각 부럽습니다.
의미있는 유배생활에서 많은 점을 깨닫고 가치를 얻게 된 점에 찬사를 보내며 은퇴를 앞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내가 친구들 대표가 되어 글을 받으니 좋으네. 늘 몸이 시원찮은 나에게 용기를 주고 싶은 따뜻함 마음이 느껴져.
일학년때 같은 반 였던 일년에 인연으로 난 많은 것을 받았어.
생각만 해도 신기한 책을 갖게 되고 늘 날 지원해 주고 챙겨 주는 고마운 친구가 되어 위로 받고
건영씬 변하지 않는 사람야, 학교 다닐 때와 얼굴도 목소리도 변하지 않았어
바른 생활 맨 인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 늘 같은 모습에 어쩌면 지루 할 것 같기도 한데 삶을 늘 긍정적으로 보고 사람을 귀히 여기고 헤야 할 일에대한 책임감이 확실하고 또 글쟁이에 낭만이 있어 곁에 있고 싶고 오래 가고 싶은 그런 사람이지
제주에 자청 유배를 갔었군요. 멋지십니다. 하지만 두 딸 그리고 아내가 사실 더 멋지네요. 쉼이 있는 생활이 필요하지요.
혼자 생활해보니 과연 생각한대로 좋았나요? 나라면 5일-일주일은 좋았을 것 같아요. 그 이상은 장담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