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활영, 1993
수채화는 서양화 가운데서도 유채화에 버금가는 중요한 재료로서 많이 사용되어 왔다. 유채화가 남성적인 것이라면 수채화는 여성적인 재료의 매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물을 매체로 사용하는 회화 방법은 동 . 서양에 기원 전부터 전래되어 왔으나 그 근원을 정확하게 구분짓기는 어렵다.
서양미술사에서 수채화(영어: watercolor, 불어:aquarelle)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 시대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그려졌던 그림들과 벽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수채화가 순수한 예술적인 목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르네상스이후의 일이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많은 화가들이 유채화 대작을 하기 전 에스키스(습작)할 때 많이 사용하였으며,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1780년대 전반에 '글리세린'이 발견되면서부터 물감의 새로운 개발로 다색 수채안료가 만들어졌으며, 같은 시대에 와트만지가 제조됨으로서 수채화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초기의 수채화는 유채화 같이 대작을 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종이의 한정된 범위 내에서 사용되어 온 수채화는 유채화가 켄버스처럼 크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둘째, 당시의 물감 암료가 투명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발색의 효과면에 있어 유채화에 못미쳤다. 그리고 셋째, 표현 기술면에서 유채화처럼 수정 또는 가필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과 불투명으로 할 경우 착색이 혼탁해져서 수채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생명감을 상실하는 등의 이유로 대작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많은 화가들이 수채화보다는 융통성 많은 유채화를 많이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태묵, 1996
수채화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유채화법에 앞서는 1900년 전후로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외국작가가 최초의 수채화를 보여 준 것은 1900년 정부의 초청으로 내한한 프랑스 도예가 레미옹(Remion)이었다. 그는 한 . 불 협력으로 공예미술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내한했었으나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3~4년의 체류 기간에 레미옹은 진흙조소와 야외사생을 수채화로 제작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표현한 수채화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순수한 면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서양식 교육제도를 처음 채택하기 시작한 후, 소학교령(小學校令)이 공포된 것이 1885년의 일로 교과과목에 도화(圖畵)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도화시간에는 연필, 크레용, 수채물감 등으로 그림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이 시간은 소학교에서 중학교에 이르는 기초교육의 한 과목으로 양화의 시초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1910년대 중엽에야 일본의 미술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화가들이 서양화가 모임을 형성화시키데 된다. 그 일부 화가들에 의한 수채화의 제작과 추구가 근대미술의 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1920년대에 접어 들면서부터라고 하겠다. 조선총독부가 힌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문화정책의 하나로 1922년 6월 1일 창설하여 1944년까지 지속되어온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중 상당수의 작품이 수채화였다. 당시는 주로 중학생층에서 수채화를 그렸지만, 그 중에서는 뛰어난 솜씨와 작품성으로 각광을 받은 것들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작가들이 한국 수채화의 개척자가 되었다. 당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수채화가는 손일봉이었다. 그는 서울 사범학교 학생으로 1925년부터 수채화로 선전에 거듭 입선과 특선을 하였으며, 1927년에는 동경의 제국미술전에서도 입선하여 특출한 수채화의 기량을 평가받은 작가이다. 당시 그와 같이 두각을 나타낸 작가로는 이승만이 있었는데, 공모전에서 손일봉과 함께 4등상을 수상하였으며, 11회까지 출품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기도하는 소녀, 이인성, 1936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채화는 더 많은 발전을 보게 되는데, 수채화가 유채화보다는 동양적인 표현방법과 서구적인 수채의 표현방법이 우리의 체질에 적합하였기 때문에 수채화를 많이 다루었다고 볼 수 있으며, 당시 공모전에서의 수채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으므로 수채의 표현방법을 통하여 서구의 조형미술세계로 접근하고자 함에도 그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지역이 대구였는데 서동진 수채화전람회가 1927년과 28년에 걸쳐 많은 작품을 갖고 조용회관에서 2회의 개인전을 개최함으로 인해 수채화에 대한 인식을 널리 보급하였고, 대구지방의 화가들이 수채화를 많이 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본다.
특히 1930년대에 와서는 이인성(1921~1950)이 수채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라고 하겠다. 그는 손응성과 더불어 선전과 동경의 제전, 문전에서도 그 기량을 발휘하였다. 이인성은 그의 스승인 서동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930년에는 일본 수채화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분들의 활동이 바로 한국 수채화 초기의 성장과정이 되었으며, 근대 한국 수채화의 비약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술계의 다양한 발전 속에 유채화와 수채화를 병행시켜 제작하는 작가가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장이 열리면서 정치, 경제,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방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미술인들에게도 다양한 발전 속에 많은 변화가 오게 되었다.

정물, 박수근, 1957
이러한 흐름 속에서 수채화만 고수하는 작가와 유화, 수채화를 같이 병행하여 제작하는 화가가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1949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국전)가 문교부 주최로 열리게 되었는데, 공모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양화부에 수채화가 포함되어 출품되었고, 이경희의 '포항의 부두'가 특선되었다. 이 당시만 해도 수채화나 유화의 작품 크기가 비슷한 크기로 출품되었지만, 전후 50년대에 들어와 점차 작품들의 규격이 커짐에 따라 유화의 대작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으며, 수채화는 점차 소외당하는 실정이었다.
이제는 재료의 개발로 인해 수채화지도 롤(Roll) 크기로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며, 수채안료도 개발되어 발색과 보존면에 있어서도 유채화 재료에 못지않은 물감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수채화지나 수채안료가 일본을 통해 구입되는 실정이었으므로 양질의 재료를 구입하기에는 여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실정은 점차 관심을 유채화로 돌리게 하였으며, 대학에서도 서양화 전공에는 수채화보다 유화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50년대 후반에 수채화라는 분명한 장르를 선택한 한국수채화협회가 1956년에 결속되었지만, 그 활동상황이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친목적 성격에 그치고 유명무실하게 없어지고 말았다. 60년대와 70년대 전반까지 뚜렷한 모임의 단체활동이 없이 개인별 활동에 머물다가 '한국수채화창작작가회'라는 명칭으로 1975년 9월, 미술회관(안국동)에서 창립전을 하였다. 이 모임은 초창기 10여 명의 회원으로 결속되어 회원전 발표만 하던 것이 80년대부터 '한국수채화협회'라고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대청호의 봄, 민동기, 2003
한국 수채화협회에서는 대만과 일본의 수채화협회와 교류하여 처음으로 수채와만의 교류전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전시를 계속함에 따라 점차 참가국이 확대되어 아시아수채화연맹이 탄생하였다. 아시아아수채화연맹 창립전은 한국수채화협회가 주최하여 서울신문사 프레스센터에서 각국의 대표작가들이 함께 참석하여 개막되었는데, 연맹전이 참여했던 나라는 한국, 일본, 대만,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홍콩, 파키스탄, 중국 등으로 정치와 종교를 초월하여 5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한국의 수채화는 80년대에 들어와 활발하게 발전적 움직임을 보였으나 아직도 초기의 수채화에 대한 관념과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원인을 분석하면 한국의 수채화는 초기 일본을 통하여 그 기법과 재료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교육방법과 제작방법이 편협되어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의 수채화는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채화는 항상 투명해야 하며, 운필의 묘와 표현의 생샘함, 담백하고 신선함, 섬세미와 함축성이 있어야 한다는 규제를 너무 내세우고 있었으며, 제작에 임하는 작가들도 이것을 수채화만의 특질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영향으로 오늘날 '수채화'하면, 경쾌하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으로 되어버렸다.

자연. image, 주태석, 1994
일본의 수채화는 영국인 찰스 위그만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몇 명의 화가가 그의 지도를 받아 영국풍의 수채화를 기초로 하여 시작되었다. 1880년부터 수채화 전문화가가 등장했으며, 수채화 전문지인 '미즈에'(1905)란 월간지가 창간되었다. 1913년에는 '일본수채화회'가 창립되어 활약하였고, 1922년에는 '창원회'가 결성되어 과감하게 투명과 불투명을 혼합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후 1940년에 수채화 연맹이 결성되었으며, 일본 현대수채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초기 일본의 수채화는 그 당시 자연주의화파나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 그 기법이 일본의 습성에 맞게 토착화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수채화가 한국에 도입되면서 일방적인 방향으로 침체현상을 일으키게 된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 하겠다.

아침, 정봉길, 2006
한국에 서양미술 문화가 도입되던 서양회화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일시에 일어나기 시작한 회화의 혁신은 그 이전까지 회화가 수세기를 통해 변화되어온 혁신보다 더욱 다양하게 변한 시기였다. 즉 이러한 변모는 다름아닌 반전통(反傳統)에 입각한 다양한 이념의 전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20세기 초기에 나타난 여러 이즘의 개화는 현대미술의 특징을 지워주는 요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회화의 혁신은 지금까지 견지되었던 객관적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주관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양식의 세련됨을 획득해 주고 모티브에 있어서나 기법면에 있어서 처음으로 근대회화로 표출되던 인상주의의 영향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인상주의 이후의 야수파나 큐비즘의 미학은 객관적 자연주의에서 철저하게 벗어나려는 이지적인 본능을 나타낸 예술이었다. 이러한 영향은 더욱 개인적 특성 위에 설 수 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다양한 주의와 주장이 발생된다. 큐비즘을 기점으로 해서 1910년에 일어난 여러 유파는 회화의 순수성을 찾으려는 개성적인 방법에 따라서 맥을 이루게 되며, 이러한 순수회화에의 경향은 추상이라는 커다란 강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열 가지로 세분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회화 흐름에 따라 비록 유화는 같은 시기에 도입되었지만 50년대후반부터 비교적 빠른 흐름으로 세계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이즘에 적응하였다. 그러한 반응은 국전에서도 구상과 추상으로 분야를 나누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은 시대적 흐름을 타고 재료개념의 확대문제로 오늘날 새롭게 부각되어 종래에 유채, 또는 수채의 재료 외에도 현대가 개발해낸 각종 매체가 작품에 동원되어지고 있다.

그리움, 양원희, 2008
한국의 수채화는 초기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유채화에 밀려 많은 시간동안 침체현상을 보여 왔으며, '수채화'라는 개념은 너무 한정된 재료의 개념으로 통용되어 왔다. 회화란 표현의 기술이나 재료 매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개성에 의한 창의력과 그 창의력 소산으로서의 양식일 것이며, 재료에 근원을 둔 표현방법에 있는 것이다. 유채나 수채는 어디까지나 재료 매체의 차이에 있을 뿐, 시대의 유행이나 양식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재료나 제작의 간편성 때문에 수채화가 회화의 기초 수련과정이라고 볼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회화의 한 영역으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짧은 연륜을 가진 한국 수채화의 역사로 보았을 때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하던 이 영역에서 앞으로의 수채화의 진로모색이 요구되는 때이기도 하며, 한국 수채화의 중흥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