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전례상징’] 구원의 상징인 ‘하느님의 어린양’
한동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단절’을 맛보고, 힘겨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다행히 발전된 의료과학에 힘입어 코로나에 대한 진단 키트과 백신이 빠르게 개발되어
많은 희생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코로나19에 대한 의학적 이해와 빠른 대처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14세기 유럽의 1/3인 2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은 페스트처럼 엄청난 사람들이 황천길을 가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무력감에 따른 분노를 분출하여 발생하는 무고한 희생양이 생기지 않았음은
과거와 다른 양상입니다.
14세기 페스트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재해에 대한
무력감에 뒤따른 분노와 화를 유다인에게 폭발합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르네 지라르(1923-2015)는 그의 저서 ‘희생양’에서 “여기저기에서 떠돌던
유다인들이 독약을 풀었다는 소문을 들은 광분한 군중들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으로 여겨졌을,
유다인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라 퐁텐(1621-1695)은 ‘페스트에 걸린 동물’이라는 우화로 풍자했습니다.
우화는 페스트라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죄인을 찾아내어 그에게 합당한 처벌을 가해야 하는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맹수들은 그들의 행위를 너그럽게 묘사함으로써 곧 용서받고, 가장 약하면서도 보호받지 못하며
가장 덜 잔인한 당나귀가 유죄로 지목됩니다. ‘희생양’이라는 프레임은 이렇게 가장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씌우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양’의 일반적인 맥락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이 전례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은
인류의 죄를 속량하고,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희생양이 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버릴 것이 없는 어린양!
초식동물인 양은 성질이 매우 온순합니다.
양에게 소금 또는 먹이를 주거나 위험에서 구해주면 양은 그것을 기억하고 몸으로 신뢰의 정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양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매우 유익한 동물입니다.
양의 털과 가죽은 섬유와 의류로, 고기와 젖은 음식으로 사용하고, 내장과 뼈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동물입니다.
어린양의 고기는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즐겨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소나 양이나 염소가 태어난 후 7일 동안은 반드시 어미와 함께 있게 했으며,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함께 죽이는 것도 절대 금지했습니다(레위 22,38 참조).
허영엽 신부는 ‘성서의 풍속’에서 양이 “성경에서는 500회 이상 인용되며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양떼와 염소로, 하느님은 목자로 자주 비유되었고, 이스라엘에서 어린양과 염소는 악의가 없고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출애굽 파스카의 어린양!
이스라엘에서는 어린양이 가장 흔한 희생제물이었고, 제단 위에서 매일 일 년 된 숫양 두 마리를 바치는데,
아침에 한 마리, 저녁에 다른 한 마리가 바쳐졌습니다(탈출 29,38-39 참조).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에 따라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사건에서도 아브라함은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쳤습니다(창세 22,13 참조).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머문 지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탈출 12,40) 탈출할 때
하느님이 이집트에 내린 열 번째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탈출 12,7) 발랐습니다.
브랜트 피트리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에서 탈출기 12장에서 펼쳐지는 파스카 과정을 5단계로 설명합니다.
1단계는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탈출 12,5),
2단계는 니산달 열나흗날에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탈출 12,6),
3단계는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탈출 12,7),
4단계는 어린양의 고기를 먹어라(탈출 12,8-9),
5단계는 파스카를 기념하여 축제를 지내라(탈출 12,14).
이집트에서 이런 단계들을 거쳤던 파스카 축제는 예수님 시대까지 죽음에서 구하시고
억압에서 해방시켜준 하느님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리는 기념일로 매년 지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집트가 아닌 예루살렘 성전에서, 단순한 식사가 아닌 대사제들에 의해
25만6500마리를 잡는 엄청난 ‘제사’가 되었습니다(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6권에서).
그리고 대사제들이 제단에 뿌린 피가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도 안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는 하느님의 재앙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속죄의 수단인 동시에 파스카 축제에 모인
신앙심 깊은 사람들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 인해 그 표시는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36)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자신에게 오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알려줍니다.
이 구절은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로 유명한 이사야서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53,7)와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53,12)라는 구절을 연상시킵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던 ‘파스카의 어린양’이 이제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구하여
영원한 생명의 하늘나라로 이끄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음을
교회는 기념하여 매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교회는 주님을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묵시 5,6),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참 지성소의 유일한 대사제, 봉헌하고 봉헌되며, 주고 또 주어지는 분”(가톨릭교회교리서, 1137항)이라고 고백합니다.
미사에서 영성체 전에 먹히기 위해 쪼개진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와 성작을 들고 사제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요한 세례자가 했던 그 선언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는 빵이 단순한 빵이 아니라 파스카의 어린양으로서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자신이며, 이러한 어린양께 묵시록의 원로들처럼 찬양을 드리면서
그분의 자비를 간청함으로써 주님을 합당하게 모실 준비를 합니다.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인재 등을 만났을 때, 흔히 일어나는 ‘희생양’ 프레임을 통해 힘없고
소외된 계층에게 책임 전가를 하거나 무고한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과 달리,
흠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 스스로 십자가의 희생제물인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에서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바둥대며 살아가다가 상처받는 우리를 참된 희생제물이며
참 대사제인 예수님은 참된 사랑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청하지요.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1월호,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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