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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에의 도마 선교의 추적
한반도 남단에 AD 42년에 건국된 가야국이 약 500년 후에 신라와 통일이 되었는데 가야국에 사도 도마가 선교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유력한 사적(史跡)들이 있다. 그것은 1987년 8월에 「도마석상」이라고 불리는 높이 4.87m, 폭 3.3m가 되는 큰 자연석 바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경북 영주군 왕류리에 있다. 이 석상의 머리 부분은 떨어져 없어졌고 어깨의 너비는 1.5m이다. 이 석상은 예술적으로 조각된 것이 아닌 자연석 그대로의 큰 바위인데 소매가 있고 발목까지 오는 긴 가운을 입고 있고 신발은 더운 지방에서 신는 샌들이고 발가락만 보인다. 그리고 양손을 포개서 가슴에 대고 있고 한 손에는 작은 줄기가 있는 꽃가지를 들고 있는데 손바닥이 보이게 조각되어 있다. 이 석상은 솜씨 있는 석공에 의해 예술적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것이 아니며, 입고 있는 가운은 불교의 의상이 아니다.
이 석상이 도마의 석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결정적인 흔적은 이 석상 우편에 붙어 있는 같은 높이의 돌에 깊이 파인 음각(陰刻)의 히브리어 자음(字音) 글자 두 개인데, 오른쪽의 타우(ת)와 왼쪽의 맴(ם)이다. 이 두 자음에 모음을 붙여 읽으면 “토마”가 된다. 이 두 글자는 돌에 깊이 파여서 조금도 마모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의미가 분명치 않은 두 개의 음각이 있는데 그것들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 두 글자는 중동의 어느 나라나 인도의 글자와도 판이한 히브리어 글자이다. 그리고 이 석상 왼편 아랫부분에는 이 석상을 만든 사람의 이름인 듯한 한자 두 개가 음각이 아닌 방법으로 파인 것이 있는데 온전한 한자가 아닌 두 글자이다. 이 석상을 만든 사람이 아마도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도마 석상은 오늘날 근처에 있는 불교의 석상과는 다르게 예술미가 아주 없는 소박한 것이고,이 석상이 조각된 가야시대는 아직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이었다.
이 도마석상이 있는 왕류리는 고려시대 공민왕이 지 지역을 지나가다 머문 곳이라 하여 왕류리라고 불린 곳이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면서 이 석상 앞에는 제물이나 음식을 갖다 놓고 복을 빈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재래의 미신은 이런 큰 바위나 고목나무 앞에 음식물을 바치고 복을 비는 것이었지만 이 석상 앞에서는 그러한 미신행위가 없었다고 한다.
이 도마석상이 조각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이 석상은 불교적인 조각품이 아니며 히브리 문자가 신라시대 이후로 한반도의 어느 왕조의 문헌에도 소개된 바가 없고 다른 어느 곳에도 히브리 문자가 나타난 곳이 없이 오직 이 석상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이 석상은 가야시대의 것이라고 감히 단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석상이 발견된 후 영남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가야시대의 기독교 전래 흔적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사도 도마가 어떻게 극동의 가야에까지 와서 선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책의 초대교회편 제8장 5절에서 언급된 대로 인도에 왔던 도마가 중국에까지 가서 선교하여 하늘나라가 그곳에 전파되었다고 하는 초대 시리아 교회의 기도문이 있다. 물론 도마가 과연 중국까지 갔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16세기 천주교 예수회 초대선교사 쟈비에르가 인도에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 와 있던 일본인의 안내로 일본에 가서 선교하고 중국으로 갔던 일이 있다. 1세기에 인도와 가야국 사이에는 무역으로 국교가 맺어져 있었던 관계로 인도인은 물론 기독교 선교사가 계기만 마련되면 가야에 못 갈 이유가 없었다. 가야국의 건국자 김수로 왕은 인도의 아유타(阿踰陀) 왕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삼았다. 가야국은 당시 제철공업이 발달하여 농기를 비롯한 갖가지 철기물을 생산해서 일본과 인도에 수출하였고, 가야와 인도 사이의 무역선을 위한 당시의 해도(海圖)가 오늘에도 한국해양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오늘날의 김해는 그 당시에는 바닷가의 무역항구였다.
가야와 인도 사이의 교역으로 양국의 여러가지 문물의 교류도 있었을 것이다. 김해에 있는 김수로 왕의 왕릉 입구의 대문의 상량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목판의 문장(紋章)의 그림과 꼭 같은 것이 인도의 어느 박물관에 있는 것을 계명대학교의 한 교수가 발견했다고 한다.이 문장의그림에는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상징이 있는데, 그림의 맨 위 좌우편에는 새 눈처럼 작은 눈이 있고 복부 부분의 한가운데에는 밝은 등대 모양의 그림이 있고 그 양편에는 물고기 한 마리씩이 그 등대를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이 있다. 물고기는 기독교에서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됐다. 불교에는 물고기를 상징으로 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로마의 카타콤의 벽에 물고기 두 마리가 십자가를 향해 헤엄쳐 가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작은 도자기판에 그려서 구워 그림엽서 크기로 만든 것을 로마의 카타콤 매점에서 팔고 있다. 카타콤의 이 그림과 김수로 왕릉의 그 목판의 문장의 그림이 아주 유사하다. 기독교가 일찍 전래된 인도에서 만들어진 문장과 카타콤의 그림과 김수로 왕릉에 있는 문장이 다 같은 기독교 상징물을 그린 것이다.
경산시 자인면 일언동에 한때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높이 60cm, 폭 30cm 크기의 석상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사람이 어린 새끼 양 한 마리를 가슴에 안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두 손을 포개서 가슴에 얹고 기도하는 모습을 조각한 것인데 두상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이 두 비석은 가야동이라는 곳에서 개천공사를 하다가 묻혀 있던 것이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어린 양은 불교의 상징물이 아니며, 불교는 두 손바닥을 합장하여 기도할 뿐 두 손을 포개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이 두 석상은 그리스도교의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경북 고령읍 지산리 뒷산 높은 봉우리에는 크고 작은 고분 104기가 있고 먼 데서 보면 그 고분들은 작은 산봉우리로 보일 만큼 크고 높다. 그 중 가장 큰 고분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죽은 사람들의 뼈가 각각 생전의 신체의 모양대로 놓여 있다. 시체들의 살은 썩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뼈만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 유고들이 어떤 질서를 말해주듯이 놓여 있다. 그래서 이 큰 고분은 가야시대의 왕족이나 귀족 가문 또는 가정의 합장분묘로 생각할 수 있고, 한 가정의 가족의 위계질서를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산봉우리 높은 곳에 이렇게 높고 큰 무덤을 만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경주의 왕릉고분들은 평지에 있고 그 왕릉들은 이 가야의 왕릉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추측건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최후심판 날의 구세주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이 높은 산봉을 묘지로 정한 것은 아닐까?
AD 1세기에 건국된 가야국이 로마제국과 어떤 외교와 교역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상남도에 있는 박물관 몇 군데에는 로마제국의 문화의 전래를 시사하는 물건들이 전시되고 있다. 진주박물관에는 로마제국의 군대가 사용한 마구(馬具)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동로마제국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또 술을 따라 마시는 서양의 잔 고배(高杯)가 역시 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김해에 있는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것으로 AD 1~4세기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서양에서 가톨릭교회가 성찬식 때 사용하는 성배(聖杯)와 비슷하고, 그 고배의 긴 다리 대각(臺脚)에는 십(十)자형의 구멍이 뚫린 못 형의 투창(透窓) 셋이 있다. 십자형은 다른 기물에서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부산대학교 박물관에는 물건을 얹어놓는 기대(器臺)가 도자기 제품으로 진열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십자형의 투창 다섯 개가 있다.
이상의 여러가지 진술은 가야시대에 기독교가 전래된 흔적으로서 추정되는 것들인데 필자가 직접 답사한 것들이고, 가야의 기독교 전래의 흔적을 가야국에 관한 문헌과 여러가지 조각물과 기물들을 연구하여 제시하는 연구가들의 자료가 있지만 지나친 추측들도 있다. 무엇보다도 도마석상과 히브리 글자 두 개가 도마의 가야 선교를 암시하는 것이 된다. 만일 사도 도마 자신이 가야에 오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가야에 선교하러 와서 도마의 석상을 남기고 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만일 도마가 인도에 일찍 갔다면 거기서 그가 가야국에 올 수 있는 길은 있었다.
출처: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역사 이야기(73)
가야는 기독교국가였다.
다음 내용은 서점에 흔히 있는 「삼국유사」라는 책을 사보면 지극히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상식적인 내용이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도마박물관에 상세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니 관람예약하자. 대한민국도 터키, 인도와 더불어 세계적 성지순례 코스의 한 나라이다.
1. 우리나라에 불교보다 기독교가 먼저 들어왔는가?
일연스님은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부분에서 김수로왕의 가야국 건국시기에는 불교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기 본기에는 절을 창건하는 기록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불교는 고구려에 서기 372년, 백제 서기 418년, 신라 528년에 들어왔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는 왕후사가 지어진때는 서기 452년이며 장유사가 지어진 때는 그 후 599년 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번역한 강무학씨도 가락국이 설 때는 아직 불교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교에 관련된 설화나 전설은 성립될 수 없다고 하였다. 서기 48년에 인도에서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왕후와 불교를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2. 인도 공주였던 허왕후가 서기48년 한국으로 시집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인가?
허왕후의 묘가 김해에 있고 허왕후의 후손인 허씨가 있고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가져온 돌이 허왕후 묘 앞에 5개가 있어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을 상식선에서 의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3. 허황후가 인도에서 한국까지 서기 48년 당시 배를 타고 올수 있었는가?
허왕후는 인도 아유타국을 서기 48년 5월(음력) 출발하여 7월27일(음력) 김해에 도착하였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온 기록이 적혀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온 항로를 따라 계절과 풍속과 해류를 계산하면서 양택석 선교사(선장)가 직접 항해해 보았다. 충분히 가능하다.
4. 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증거가 있는가?
허왕후는 서기 48년 김해의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차를 가져왔다. 그 군락지가 김해에서 발견되었는데 인도 동북 지방의 대엽종과 일치한다. 우리나라의 차가 소엽종인데 인도의 대엽종이 발견 된 것은 특별하다. 김해에서는 대엽종 차잎으로 영농조합에서 「장군차」를 만들어 시판하고 있기도 하다.
5. 허왕후는 기독교인이었는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보면 허왕후는 그 아버지 왕의 말을 인용하여 말할 때에「상제(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귀 언저리에 사라지지 않았으니 너는 이제 곧 어버이를 하직하고 저곳으로 향하여 떠날지어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상제는 하나님만을 나타낸다.(참고문헌 : 한지 속에 숨겨진 창세기의 재발견 에델 알 넬슨, CH 강 공저)
6. 김수로왕은 기독교인이었는가?
가락국기에서 김수로왕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하여」라고 하여 김수로왕은 모태신앙임을 나타내었다.
7. 가락국이 세워진 서기 42년과 허왕후가 시집온 서기 48년은 어떤 시대인가?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으로 활동하던 시대이다. 사도 도마는 인도를 거쳐 서기 41년7월(음력)에 한국에 도착하여 서기 47년8월(음력) 인도를 거쳐 예루살렘에 갔다가 서기 52년에서 72년까지 인도에서 선교하였다.
8. 사도 도마는 한국에 왔는가?
영주시 평은면에 사도 도마 기념석상이 있다. 히브리어로 도마(타우ת, 멤ם)라고 분명히 새겨져 있다. '멤ם'도 어미에 붙는 글자 형태로 정확히 적혀있다.(참고: 중국 만리장성에 가지 김철수라고 한글로 새겨진 이름이 있었다. 한국사람 김철수가 만리장성에 여행가서 자기 이름을 새긴 것이 틀림없다.)
9. 사도 도마 석상의 연대와 특이한 점은?
사도 도마 석상의 좌편 하단에 예서체로 새겨진 지전행이란 글자가 있다. 예서체는 중국 한나라 시대(기원전 202-서기 220)에 쓰였다. 사도 도마 석상은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새겨진 석상이다. 사도 도마 석상에는 발에 발가락이 새겨져 있다. 사도 도마는 한국에 와서도 중동지역에서 신는 발가락이 나온 샌들을 신었었다.
10. 사도 도마가 가지고 있는 기술은?
도마행전에 의하면 사도 도마는 한국에 오기 전 인도에서 군다포러스왕의 왕궁에 건축한 경험이 있는 황국건축 전문가이다. 김수로왕을 도와서 가락의 왕궁을 건축하였을 것이다.
11. 김수로왕은 외래인인가?
서기 42년 3월 3일(음력) 구지봉에서는 토착민 대표인 구간에게 외지인인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나에게 명령하기를 이곳에 내려가 나라를 새로이 정하고 임금이 되라」하여서 김해에 왔다고 하였다.
12. 김수로왕이 토착민에게 부르라고 가르쳐 준 구지가는 어떤 노래인가?
동요로 부르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라고 해석되는 협박성 노래이다. 거북같이 느린 너희들은 목을 내놓아라. 단칼에 목을 자를 수 있다. 만약 목을 내놓지 않더라도 구워서 먹을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수로왕은 대왕을 맞이하는 노래로 부르라 하였다. 왕은 수로왕이고 대왕은 성령이시다. 영대왕가로 해석하면 「구하소서. 구하소서. 머리되신 성령이여 나타나소서.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지옥 불에 구이거나 사단에게 먹힙니다.」(마지막 부분을 적군이 쳐들어와서 불태우거나 포로 되어 갈 수 있습니다.)로 해석된다. 찬미가이다.
13. 김수로왕이 외지인으로서 김해 토착민에게 왔을 때 광경은?
저항 없이 축제 분위기로 영접하였다. 김수로왕 측에서 황금알 6개를 토착민에게 선사한다. 200~300명이 구지봉에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기쁨이 넘쳐났다.
14. 김수로왕은 김해에 도착한지 며칠 만에 가락국의 왕이 되었는가?
3월 3일(음력) 계욕일에 세례 받고 거듭난 지 12일 만인 3월 15일(음력)에 왕위에 올랐다. 이런 사실을 잘못 해석하면 「알에서 깨어난 지 12일 만에 구척장신으로 자랐다.」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난 지 12일이면 고개도 이기지 못하는 데 어찌 왕이 된단 말인가?
15. 김수로왕은 왕이 된 지 왜 6년 동안(서기 42~48) 총각 왕으로 기다려야 했는가?
인도 공주였던 허왕후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인도에서 차(茶) 전문가 한사람이 시집온다면 당시 병원이나 약국이 없던 시대에 건강할 수 있으며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었다. 또 초대기독교식 예배의 애찬 때 부족한 포도주 대신 차를 사용할 수 있었다.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에는 애찬 때 포도주를 쓰지만 평상시는 당시 한국에서 포도주를 다량 생산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차를 썼을 것이다.
16. 허왕후는 몇 세까지 살았는가?
허왕후는 157세까지 살았다. 차를 마셨기 때문이다 허왕후 차는 찻잎에 뽕잎, 오가피, 솔잎, 연잎 등을 첨가하여 삼베에 싸서 끓여 국처럼 마셨다. 맛과 향을 더하여 허왕후 차는 맛과 품위가 있으면서도 약효가 강하였다. 허왕후는 10남 2녀를 낳으며 한국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허왕후가 시집온 초기에는 다량의 차가 생산되지 못하여 노비들에게는 차를 줄 수 없었다. 그래서 허왕후를 따라 온 노비들은 7-8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었고 향수병에 시달리다 죽었다.
17.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허왕후의 묘가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있다는데?
허왕후의 묘는 구지봉 바로 옆에 있다. 역사적 기록과 유적이 일치한다. 가락국기는 사실적인 기록물이다.
18. 인도에서 시집온 허왕후의 묘비에는 왜 ‘보주 태후’라고 새겨져 있는가?
허왕후가 배를 타고 가락국에 시집온 서기 48년 이후에 허왕후의 친정집인 인도의 왕가가 중국 양자강 상류인 보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보주와 가락국 사이에 왕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19. 김수로 왕릉의 납릉정문 현판에 오병이어의 그림이 있다는데?
20여 년 전의 현판을 찍은 사진에는 오병이어가 있다. 물고기는 이스라엘의 타브가에서 발견된 문양과 같이 등지느러미가 2개인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현재 현판은 보수공사로 오병이 탑처럼 변형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 가야지역을 답사하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목자상과 성도상 같은 유물을 발견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가야 유적과 유물에서 기독교(기독교)적 문화권을 보았다. 가야는 하느님 나라를 겸한 연맹체제의 국가였다.
작성자: 조국현(말씀교회 담임, 도마박물관 운영자) 2007. 8. 13
출처: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1649902&cpage=5&mbsW=&select=&opt=&key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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