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儵)이라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고 장자는 의인화(擬人化)해 놓고
오늘날 들어도 그 뜻이 틀림이 없는 우화(偶話)를 만들어 놓고 있다.
숙과 홀이 때마침 혼돈의 땅에서 만나게 되었다.
혼돈은 숙과 홀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였단다.
숙과 홀은 혼돈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숙과 홀은 의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이 혼돈에게만은 그게 없다. 어디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 주자."
이렇게 숙과 홀은 의논의 합치를 보았다.
그래서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다. 7일이 지나자 그만 혼돈은 죽고 말았다.
이것이 전무후무한 장자의 우화이다.
구멍을 뚫어 주는 짓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의 짓을 말한다.
그러한 짓을 문화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구멍이 없어도 살아 있던 혼돈은 무엇일까? 그것을 자연으로 여기면 된다.
이처럼 사람은 옛날부터 자연을 죽이는 짓을 해왔던 셈이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은 자연을 잡아먹는 짓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서 그 짓을 겁없이 연속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사람은 자연을 자유의 거울로 생각하지 않는다. 돈이 되는 자본으로 생각한다.
자연을 자본으로 고집하는 인간은 지금 그 자연에 구멍을 내고 있는 셈이다.
자연이 죽고 나면 인간은 어디에 가서 살 것인가. 살 곳이 없게 된다.
그러면 사람도 죽어야 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지금 우리는 일곱째 날에 이르러 혼돈[자연]의 몸에 마지막 구멍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장자여 그대도 얼마나 아슬아슬한가.
- 윤재근 저, ‘莊子(장자) 철학우화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