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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는 한 때 제 2의 선동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사진 김대영) |
11월 16일 SPORTS2.0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전 KIA 투수 김진우의 지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대뜸 “김진우가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며 “(김진우와의)만남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했다. 30분 동안 그가 들려준 김진우와 관련된 여러 정황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만남이 어렵겠다”는 말을 남긴 채 연락을 끊었다. 올시즌 갑자기 그라운드를 떠난 김진우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저기….” 김진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내 이모 씨가 식사를 하다가 김진우를 바라봤다. 그러나 김진우는 뭔가를 이야기하려다 이내 말문을 닫았다. 이날 김진우는 원정경기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아내와 저녁 외식을 하던 참이었다.
김진우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6월 26일 대전 한화전에 선발등판 해 안타와 볼넷을 3개씩 내주며 3실점을 하고 강판된 게 얼마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남편의 입이 다시 열리기 전까지 잠자코 있었다.
“올 초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갈 때 진우 씨 표정이 어느 해보다 밝았어요. 제게 ‘올시즌은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까지 했어요.”
지난해 김진우는 시즌 중반 어깨부상에도 불구하고 10승4패 방어율 2.69를 기록하며 전년도 꼴찌였던 팀을 4위까지 끌어올렸다. 특히 득점권 피안타율 1할6푼5리는 위기에 강해야 하는 에이스다운 기록이었다.
“그런데 전지훈련장에서 어깨에 힘이 빠진 뒤로 의기소침해졌어요.” 이씨의 기억이다. 어깨가 아픈 것도 아니고 어깨 힘이 빠졌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서정환 전 KIA 감독도 같은 말을 했다. “(김)진우가 지난해 후반기 좋은 성적을 거두고 큰 결심을 한 듯 보였다. 전지훈련 때도 여느 해와 다르게 열심히 훈련에 동참했다. 그런데 구속은 좋은데 공이 포수 미트로 가지 않았다. 어깨 무기력증에 걸린 게 아닐까 싶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김진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놨다. “나 말이야. 마운드 위에 오르면 앞이 하얗게 보여. 아무리 세게 던져도 공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씨는 남편을 위로했다. “괜찮아질 거예요. 힘내요. 몸이 좋아지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김진우는 아내의 위로에 힘을 얻는 듯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김진우의 말에 아내의 가슴은 사과가 반으로 갈라지듯 심하게 아팠다. “다들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하는데. 나도 이제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이러다 정말 마지막이 되면 어떡하지.”
선동열의 판박이 “선수의 미래를 보려면 어머니의 키를 보면 된다.” 광주진흥고 강의원(현 진흥고 체육교사) 전 감독의 선수관은 1974년 처음 야구지도자로 나선 이후 변함이 없다. 1994년 광주 서석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서석초등학교에 좋은 투수감이 있다는 소릴 듣고 달려갔다. 몸집이 크고 힘도 있어 보여 학생 부모님을 뵈었더니 두 분 다 몸이 좋으셨다. 특히 어머니의 키가 컸다. 순간 ‘이 녀석 꼭 잡아야지’하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4년 뒤 김진우는 광주진흥중을 거쳐 진흥고에 입학해 강감독의 제자가 됐다.
강감독은 당시 김진우를 지도하며 한 선수를 떠올렸다. 선동열(현 삼성 감독)이다. 강감독은 선동열이 무등중학교에 다닐 때 진흥중 감독을 맡았다. 전남지역 중학교 팀들이 뭉쳐 전국대회에 참가했을 때는 선동열을 가르치기도 했다.
“같은 나이 때의 선동열과 김진우는 몸집과 유연성이 정말 똑같았다. 성격도 온순하고 야구밖에 모르는 것도 비슷했다.” 강감독은 광주일고 때의 선동열과 진흥고 때의 김진우를 비교하면 “김진우가 낫지 않았는가 싶다”고 말했다.
“선동열이 광주일고 때 좋은 투수이긴 했지만 고려대에 진학한 뒤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김진우는 고1 때 커브를 최재원 코치(현 진흥고 감독)에게 배운 뒤 시속 140km중반대의 강속구와 커브를 섞어 던지며 프로팀과 연습경기에서도 대선배들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기 바빴다”고 회상했다.
김경훈 전 KIA 스카우트 팀장은 2002년 김진우에게 해태(KIA 전신) 유니폼을 입힌 주인공이다. 김 전 팀장도 강감독처럼 김진우를 처음 본 순간 선동열을 떠올렸다. “하루는 강감독이 ‘학교에 명물 투수가 있다’고 했다. 가서 보니까 체격이 좋고 공 스피드가 무척 빨랐다. 특히 커브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데 선동열처럼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투수였다.”
2000년 2학년생이던 김진우는 제30회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순천효천고를 상대로 11탈삼진, 2안타, 1사구를 기록하며 팀의 4-0 승리를 이끌었다. 1973년 야구부 창설 이후 27년 만에 진흥고가 중앙 무대서 첫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김진우는 이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과 최우수투수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1년은 김진우 야구인생 가운데 최고의 해였다. 제35회 대통령배에 참가한 진흥고는 결승 전날까지 20⅔이닝을 던지며 2승을 올린 김진우의 어깨에 다시 의지했다. 혹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강속구와 커브를 무기로 결승전에서 성남서고 타선을 9회까지 16탈삼진, 2안타로 막으며 완투승을 이끌어냈다. 이때부터 신문지면에는 김진우를 수식하는 말로 ‘제2의 선동열’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양키스에서 해태로 미 메이저리그에서도 꿀을 찾아가는 벌처럼 김진우를 스카우트 하려고 모여 들었다. 뉴욕 양키스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당시 해태는 조흥은행 등 채권은행단의 관리를 받는 상태라 김진우를 스카우트 하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김 전 팀장의 회상이다.
차일피일 김진우와의 계약을 미루고 있던 5월 중순 김 전 팀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이었다. “뭐시라? 류제국이 시카고 컵스랑 계약을 혀? 얼메? 160만 달러?” 김 전 팀장의 악몽이 현실이 됐다. ‘설마’하던 류제국(탬파베이)의 메이저리그행이 김진우에게 영향을 줄 게 뻔했다. 김 전 팀장이 해태 정기주 사장에게 달려갔다. 정 사장은 고심 끝에 “5억 원에 합의하라”고 지시했다.
김진우의 아버지와 만난 김 전 팀장은 구단의 지시대로 5억 원을 제시했다. 거부할 게 당연했다. 양키스가 이미 김진우에게 200만 달러를 제시한 뒤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7억 원만 주면 군말 없이 입단하겠소.” 귀를 의심한 김 전 팀장은 정사장에게 구두 결재를 받은 뒤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 공증서류를 작성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 양키스로 마음을 돌릴지 모르겠다 싶어 만약 해태에 입단하지 않을 때는 7억 원의 3배인 21억 원을 위약금으로 지불한다는 공증을 했다.”
믿어지지 않는 계약에는 강감독의 설득이 있었다. “진우나 진우 부모님께 일단 한국에서 열심히 뛴 뒤 9년 뒤 자유계약선수(FA)가 되면 그때 가도 늦지 않다고 조언했다. 진우도 부모가 있는 한국에서 뛰길 바랐고 부모도 진우를 이용해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없는 분들이라 의외로 해태와 계약이 무리 없이 이뤄졌다. 나 역시 지도자로서 진우가 한국프로야구 발전에 한몫을 해주길 바랐다.”
2001년 6월 17일 광주 해태구단 사무실에서 김진우의 계약 및 입단식이 열렸다. 해태는 일시불로 줄 돈이 없어 몇 번에 걸쳐 주기로 약속했다. 당시 해태팬들은 명문 해태의 10년을 책임질 젊은 에이스의 입단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해태도 김진우도 1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순둥이 투수의 슬픔 애초 해태 스카우트팀이 김진우를 높이 평가한 건 그가 던지는 공뿐만 아니라 인성이었다. 강의원 전 진흥고 감독은 “진우는 책임감이 강해 해태 입단이 확정된 뒤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강감독은 “100m 밖에서 이름을 부르면 큰소리로 ‘네’하고 달려오는 게 진우였다”며 “부모나 지도자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순둥이였다”고 기억했다. 김경훈 전 KIA 스카우트팀장도 “진우는 도무지 야구밖에 모르는 아이였다”고 말했다. 김진우의 가족애도 해태 스카우트팀에게 인상적이었다. 김 전 팀장의 말을 들어보자.
“진우 아버지가 개인택시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했지만 가족애가 남달랐다. 진우가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부모가 노력을 많이 했다. 일례로 진흥고 시절 선수들이 식사를 하거나 쉬고 있으면 진우 부모가 직접 운동장을 정비하곤 했다. 진우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개인택시도 세워두고 응원에 매달렸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의 희생이 컸다. 강감독의 회상이다.
“한번은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진우 문제라고 해서 경찰서에 달려갔더니 진우 어머니가 조사를 받고 있었다. 알고 보니 진우 아버지 개인택시로 어머니가 진우를 학교에 데려다 주다 주변에서 신고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김진우의 친구 이모 씨는 “진우 아버지가 진우 경기만 있으면 쫓아다니시느라 가사는 어머니가 돌봤다”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 가며 개인택시를 운전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김진우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외동아들인 김진우에게 어머니는 부모이자 친구였다. 김진우는 해태 입단이 확정되자 주변에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는 건 지금부터”라며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해태에 입단하며 받은 계약금 7억 원 중 4억 원가량을 들여 2층짜리 상가주택을 지었다. 1층은 개인택시를 처분한 아버지의 카센터로, 2층은 가족이 살 가정집으로 쓸 요량이었다.
11월 공사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김진우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마무리훈련에서 땀을 쏟고 있었다. 그때 광주에서 오키나와로 전화가 왔다. 김진우는 한참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어머니는 숨을 거뒀다.
“아들이 지어준 건물이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웠겠는가. 그날 밤 늦게 진우 어머니가 옥상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셨다.” 친구 이모 씨는 한국에 돌아온 김진우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의 죽음은 김진우에게는 인생의 구명보트가 사라진 것과 같았다. 그리고 이날부터 김진우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등을 돌린 에이스 데뷔 첫해인 2002년 시즌 초반만 해도 김진우는 선동열의 재림이었다. 3경기에 나서 3승을 따며 전무후무한 고졸 신인투수 데뷔 3경기 연속 승리 기록을 세웠다. 이때 방어율이 0.40에 불과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어느 정도 헤어나온 듯 보였다.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를 더 그리워했다.” 이모 씨의 말이다.
실제로 김진우는 시간이 갈수록 집에 가지 않고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는 “어머니도 없는 집에 가기 싫다”며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 커서도 입에 대지 않겠다”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야구장 안보다 밖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도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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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의 레인보우 커브를 다시 볼 수 있을까.(사진 제공=KIA 타이거즈) |
그래도 이해는 12승11패 방어율 4.07 탈삼진 177개를 기록했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며 병역혜택도 받았다. 다음해에도 11승5패 방어율 3.45를 거두며 2년생 징크스와 무관한 듯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 쌓이고 있었다.
김진우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와 점점 등을 돌렸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오해가 부자 사이를 갈라놓았고 경제적인 문제도 갈등에 한몫을 했다. 이해 김진우는 폭행사건에 2번이나 연루돼 한동안 마운드를 떠나 있어야 했다. 2004년에는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갑자기 우측 대퇴골 부상까지 입었다. 반가운 소식이라면 이해 12월 이모 씨와 만나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진우가 방황을 많이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결혼할 사람이라며 이모 씨를 데려왔다. 참해 보여 진우가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강감독의 바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05년 김진우는 더 이상 팀의 에이스가 아니었다. 5월 18일까지 10경기에 선발로 나와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컨디션 난조가 이유였다. 그러나 이해 김진우를 봤다는 이들은 야구장이 아니라 유흥업소를 더 많이 지목했다. 친구들과의 가벼운 술자리가 새로운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바뀌었고 장소도 대형술집으로 옮겨졌다.
이모 씨는 “이때 롯데 A선수와 진우가 친하다는 걸 알았다. 가끔 진우가 몇백만 원짜리 술집에 A와 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모 씨는 지금도 “A선수가 진우에게 나쁜 물을 들였다”고 보고 있다. KIA 선수들도 같은 얘기를 했다. “우리 팀의 J선수와 롯데 A선수가 김진우와 어울리는 걸 자주 봤다. A선수는 프로야구계에서 술값으로 엄청난 돈을 탕진한 선수로 유명했다.
J선수도 놀기 좋아했다. 구단에서 J를 불러 김진우를 가만 놔두라며 혼낸 것으로 안다.”
이해 김진우는 6승10패 방어율 3.95를 기록하며 에이스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지난해는 더 아쉬웠다. 팀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6, 7월을 소흉근 부상으로 날려버렸다. 이때 김진우는 어깨부상을 호소했지만 구단에서는 "괜찮다"고 해석했고 "사적으로 부상을 입은 것"이라며 김진우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후반기에 복귀해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이미 KIA 마운드에는 김진우를 대체할 만한 젊은 투수들이 오르고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김진우 3월 27일 마산구장. KIA와 롯데의 시범경기가 벌어지기에 앞서 서정환 감독을 만났다. 서감독은 선발로 김진우를 내보냈다. 그러나 표정은 어두웠다. “진우가 운동을 참 열심히 했는데 공이 살지를 않아. 몸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어.” 서감독의 우려대로 이날 김진우는 심각한 제구력 난조로 2이닝 동안 7안타 4볼넷으로 8실점했다.
경기가 끝난 뒤 김진우는 “일시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뿐 시즌이 시작되면 괜찮아질 거다. 4월 6일 시즌 개막전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김진우의 목소리가 무척 낙관적이라 4월 6일을 기대했지만 결국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진우는 시범경기를 끝으로 제구력 난조와 어깨부상을 들어 2군으로 갔다.
김진우를 다시 본 건 6월 8일 광주 SK전 때였다. 불펜 피칭을 마친 김진우와 마주쳤다. 어찌된 일인지 김진우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렸고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경기에서 김진우는 5회까지 6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됐다. 문제는 사사구였다. 19타자를 상대하며 안타는 5개만 허용했지만 볼넷을 무려 6개나 내줬고 몸에 맞는 공도 2개나 기록했다.
이날 투구 내용은 처음 야구공을 잡은 사회인야구팀의 투수와 같았다. 경기가 끝난 뒤 서둘러 그라운드를 떠나려는 김진우를 잡았다. 김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공 끝에 감이 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그보다 더 했다. 김진우의 손끝은 이미 마비돼 있었다. 이즈음 KIA 선수들 가운데 몇몇이 김진우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는 야구장 밖에 있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KIA의 선참급 선수는 “심지어는 야구장으로 돈을 받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밀린 술값은 그렇다손 쳐도 경제적으로 곤란한 입장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한때 김진우는 월급이 압류될 정도로 재정상태가 악화됐다. KIA 프런트가 도움을 줘서 그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절친한 선후배 관계로 알려진 롯데 A선수의 선례를 김진우도 따랐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연봉을 9천500만 원이나 받는 유명 야구선수가 여기저기서 돈을 꾸고 다닌다는 게 말이 되는가. 친구 이모 씨는 “진우 수중에 돈은 고사하고 월급으로 감당이 안될 만큼 빚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며 “계약금으로 산 건물도 진우 잘못이 아닌 다른 이유로 날려 버린 지 오래”라고 설명했다.
재정문제로 김진우는 무척 고민을 많이 했다. 선수단 사이에서 존경과 신용마저 잃은 김진우는 올시즌 계획했던 팀 선참으로 자리잡기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7월 10일 2군행을 통보 받은 이틀 뒤 팀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행방을 감췄다.
KIA는 7월31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무단이탈 중인 김진우를 임의탈퇴선수로 공시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KIA는 “수차례 팀을 무단 이탈한 전력이 있는 김진우를 설득해 훈련에 합류하도록 하는 등 김진우의 야구활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빈번한 무단이탈이 단체종목인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팀워크를 저해하고 있다고 판단돼 고심 끝에 임의탈퇴 공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다음날 김진우는 KBO에 의해 임의탈퇴 공시가 돼 1년 동안 복귀가 불가능하게 됐다.
부담과 유혹 “야구 그만두면 어떨까.” 김진우는 지난해부터 아내에게 이런 말을 무심코 던지곤 했다. 야구를 하면서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소리였다. “진우 씨가 다른 선수들처럼 프로에 입단했을 때 2군부터 밟아나갔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랬다면 정상에 있다가 갑자기 밑으로 떨어질 때 충격을 참아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아내의 생각이다.
김진우는 친구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밑에서 좋은 후배들이 계속 올라오니까 계속 쫓기는 기분이다. 이렇게 가다간 내 자리가 사라질 것 같다.” 김진우는 몸 상태에 대해서도 심각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친구 윤모 씨는 “진우가 ‘예전에는 술을 새벽까지 마셔도 다음 날 9회까지 던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고 말했다.
부담 못지않게 김진우를 갉아먹은 건 유혹이었다. 강의원 전 진흥고 감독은 “어린 나이부터 수퍼스타로 각광받다 보니까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친구 윤모 씨는 그런 현장을 자주 봤다. “진우가 유명 야구선수이다 보니까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술자리로 불러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진우가 지혜를 발휘해 잘 대처했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KIA의 한 관계자는 “(김진우가)일을 벌일 때마다 알게 모르게 뒷수습을 많이 하고 어떨 때는 심하게 야단도 쳤다”며 “정재공 전 단장의 경우 본인이 살던 원룸 옆에 원룸을 하나 더 구해 김진우를 살게 할 만큼 관심을 쏟았다”고 말했다. 정 전 단장은 올시즌 김진우에게 전담코치까지 붙여 재활을 도왔다.
서정환 전 감독도 김진우를 2군에 내려 보낸 뒤 매일같이 보고를 받으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선수들도 김진우를 소외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김진우의 부활을 바라던 많은 구단 관계자들은 이제 KIA를 떠났다. 김진우가 트레이드될 뻔한 적이 있었다. 올시즌 초 SK 김성근 감독이 “김진우를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김진우가 1군에 올라온 뒤 계속 제구력 난조를 보이자 없었던 일이 됐다. 이때 트레이드가 이뤄졌다면 어느 팀에 이익이 됐을까.
성공이 가져다 준 불행 김진우는 서울과 광주를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이나 친구와는 여전히 소식을 끊은 채 잠행을 계속하고 있다. 김진우의 복귀설이 들리기도 했지만 본인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기에 판단하기에 이르다.
김진우의 가족은 “유명 야구선수보다는 평범한 가장을 원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차라리 날품을 팔아도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진우는 어머니의 죽음과 금전문제, 부담과 유혹 등 많은 문제로 야구를 떠났다.
박경미 심리치료사는 김진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외동아들인 김진우에게 어머니는 ‘어째서 내가 성공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이 돼준 대상이었다. 그런데 막상 성공이 가져다 준 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성공할 이유가 사라지게 돼 공황에 빠진다.” 박 심리치료사는 김진우에게 특별히 필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게 무엇일까. “어머니의 죽음 뒤 김진우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리게 됐다. 아마도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한때 김진우를 가리켜 '스티브 블래스'를 떠올린 야구인이 많았다. 흔히 갑자기 투수들의 제구력이 상실되는 증상을 ‘스티브 블래스 병’이라고 한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투수 블래스가 1973년부터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게 된 뒤부터 나온 말이다.
강의원 전 진흥고 감독은 "(김)진우가 고2때도 이런 증상을 보였다"고 회상했다. "전혀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다. 제구가 좋지 않아도 이보다 나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김진우는 이미 고교때부터 야구계의 불치병으로 불리는 '블래스 병'에 시달렸던 것일까. 강 전 감독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적인 면보다는 투구 밸런스가 무너진 까닭이었다. 알고 보면 투구 밸런스도 일시적으로 몸을 만들지 못해 발생한 것이었다. 가상의 스트라이크존에 수건을 올려두고 거기다 하루에 몇 백개씩 공을 던질 것을 주문했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의 제구력이 좋아졌다."
강 전 감독은 올시즌 서정환 KIA 전 감독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러니까 김진우는 '블래스 병'에 시달린 게 아니라 '블래스 병'을 자초했던 것이다. 희망적이라면 '블래스 병'에서 언제라도 탈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의원 전 진흥고 감독은 얼마 전 광주에서 김진우를 봤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냈다. “내가 진우 보거든 똑바로 전하라고 했다. ‘다시 야구공을 쥐거나 야구장 주변에 얼씬거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그러나 강강독의 목소리는 이내 떨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때 내가 진우를 미국으로 보냈다면 그래서 6년이 지나 올해를 맞았다면 우리 진우가 어떻게 됐을까 싶소. 후회하면 뭐 하겄소. 근디 우리 진우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옵디다.”
SPORTS2.0 제 80호(발행일 12월 3일) 기사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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