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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여행] 전주향교.......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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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紅─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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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전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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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유랑자는 여행을 하면서 제법 많은 향교(鄕校)들을 가 보았다. 본시 향교(鄕校)라는 뜻은 다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과 위치, 배치도, 등은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역사성과
배출된 인물들 역시 지방마다 다름을 알수 있었다. 지금까지 유랑자가 방문했던 향교중 가장 기억에
남는 향교는 광주 광역시 향교(光州鄕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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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교생들의 글 읽는 낭낭한 목소리가 창문 넘어로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광
주의 역사성 과 올곧은 선비정신을 알수 있었다. 왜 광주가 불의를 못참고, 국난극복에 앞장설수 있
었는가를 유랑자는 광주 향교에서 그것을 읽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글 읽는 소리”
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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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 유랑자도 말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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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때 유명한 학자 예사(倪思)는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 열 가지를 이렇게 말했다. ‘솔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학 울음소리, 거문고 소리, 바둑 두는 소리, 섬돌에 비 떨어지
는 소리, 창으로 눈이 흩날리는 소리, 차(茶) 달이는 소리’ 등은 모두 소리 중에서도 지극한 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책 읽는 소리가 가장 좋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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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아이의 책 읽는 소리만 들어도 정말 좋은데 자제(子弟)의 책 읽는 소리만큼은 그 기쁨을 이
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고.....알다시피 향교라는 곳은 요즘을 말하면 학교인 셈이이다. 어린이가 되
면 누구나다 교육을 받아야 하는 필수 의무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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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루(萬化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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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신분제 사회임을 전제한다면 향교에서 유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의
사회적 신분은 명백해진다. 조선시대에 학업의 시작은 7, 8세부터이지만 교생의 연령이 16세로 제한
을 받는 것은 16세부터가 바로 국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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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6세기에 오면 “향교에는 군역을 담당할 농민, 즉 양민들이 교생이 되고 있어 교생들에게 주어지
는 면역(군역)의 혜택을 받고자 하니, 양민들 중 교생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비
등한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의 양반의 신분만이 향교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논리가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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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기적인 발상이 아닐수 없다. 이것이 유교이자 양반제도의 크나큰 모순이다. 자기들만 교육을 받
아야만 한다는 즉 군림의 기회를 남에게 주지 않겠다는 아주 못되고도 잘못된 사고방식들이다. 이는
오늘날 까지도 두고 두고 화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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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올라가보면 소론,남인들중에도 없는건 아니지만 극소수였고 통계상으로도 거의 노론들이 대
다수였는데 원래 기회주의자 놈들이 많은 사림파놈들이라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모르는게 친일
파들이 태어날때부터 개방적이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선각자라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일베충같
은 놈들이 지금 대한민국에 득실 거리고 있다. 그게 오늘날 보수를 자청하는 개똥 벌레같은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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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근본인 노론들은 조선에서 가장 골수 성리학적인 인간들이었고 가장 서양 학문과 타 학문
을 배척했다. 단지 자신들이 출세하고 사리사욕 채우고 생존하기 위해 나중에 일제 시대에 그런척을
한거지 근본을 따지고 올라가면 성리학외에 타 사상과 학문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진짜 서양문물에
관심많고 개혁자인 소현세자같은 인물등을 죽인 원흉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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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우리나라 보수파놈들 처럼 소론,남인 ,북인들의 개혁을 거부하고 항상 저들은 성리학만 외친
놈들이다. 친일파들이나 그후예들 다는 아니더라도 대다수는 그런 조선을 망친 사림파 서인 노론의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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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효자비(朴晋 孝子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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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간들이 지들 조상들이 조선을 그렇게 편협하게 운영해서 말아먹고 그 책임은 그당시 지들 때
문에 억울하게 당한 조상들이나 지금 이나라 국민들한테 책임 전가하는 꼴을 보면 보수파놈들 정말
뻔뻔하다 못해 아베같은 음흉하고 거짓말 잘하고 附肝附膽(부간부담)같은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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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甘言利說(감언이설)로 국민들을 속이고 사는 놈들이 하루빨리 이땅에서 사라지는게 대한민국이
국익을 위한 지름길이자 친일 청산이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척도(尺度)임을 국민들은 절대 잊어서
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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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잠시 엉뚱한데로 흘러갔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당시 향교를 통해서 이루려 했던 조
선왕조의 유교교육은 양인(養人)과 교화라는 양면적 목표를 가지고 집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는 개국 초부터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이라도 누구나 독서를 원하면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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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에 신백정(新白丁)에게 향교입학을 허락한 것이나 조선 초기부터 자주 보이는 농민들에게 향
교교육을 허락한 점은 그러한 반증이다. 16세기에 와서 실록자료에 ‘교생은 양반이어야 한다.’는 논
리의 주장이 보이는 것은 이 시기에 조선왕조의 신분제적 편제가 강화되는 것을 배경으로 상위신분
의 양반이 유교교육에 보다 전력하여야 겠다는 명분적인 뜻이 강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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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문(日月門)내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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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양반 신분층의 배타적인 교육기회의 독점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전통사회에
서 공부는, 맹자에 ‘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물이 흐를 때는 조금이라도 오목한 데가 있으면 우선 그
곳을 가득 채우고 아래로 흘러간다는 말)이란 말이 있듯이, 완전학습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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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 작은 오목한 곳이라도 자기들만 채우고 나가야 한다는 논리가 결국은 암덩
어리 존재로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글 읽는 낭낭한 목소
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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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향교에서 선비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 대학 중용 주역 등의 서문을 암기했는데, 특히 대학의 서
문은 명문장이라 문장공부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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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大成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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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당에서는 학동들이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대학 등을 학습의 정도에 따라 읽는 부분이 일치
하지 않다보니, 너나없이 큰소리로 읽는 소리가 마치 오뉴월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시끄러웠다고 한다.
본시 “공부하는 중요한 목적은 기질(氣質)의 변화를 구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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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인자가 다르고 환경과 습관에 따라 그 기질이 달라진다. 따라서 배움
이 필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유학을 다른 말로는 자기수
양을 완성하고 사회질서를 성취하는 수기치인학(修己治人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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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스스로를 닦은 후에 타인을 다스리는 학문’이란 뜻”이라며, “결국 내가 나를 갈고 닦는 것이 먼
저다. 즉 수기(修己)한 사람이 치인(治人)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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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역설했다. 때문에 대학을 공부하는 이
유는 결국 수신(修身)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해석이다. 대학은 천자(天子)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자아를 수련하고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인생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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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소학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윤리와 행동들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라면 대학은 제
왕학 내지 리더십에 대한 공부다. 때문에 대학을 제왕학의 최고 교과서로 꼽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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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大成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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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해 “상황이 어려울 때는 홀로 수양하는 데 주력하고 능력이 되면 천하에
나가 좋은 일을 한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궁즉독선기신 달즉겸선천하)”며 “결국 자기 몸을
수양하는데 힘쓰고 그것이 유학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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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한번 향교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향교는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운영된 교육기관으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향교의 연원은
유교문화이념이 소개되는 때부터 비롯되지만, 향교가 적극적으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
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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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西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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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여 지방 사회질서를 유교문화 논리에 접목시키며, 과거제 운영을
유교 교육과 연계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문화의 기초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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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국가는 군현제의 정비와 함께 지방 수령들에게 향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육성을 촉
구했으며, 이를 위한 재정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다. 따라서 향교는 지방 수령의 책임하에 그 운영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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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향교의 교육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향교를 통해서 유학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는 점
이다. 중앙정부는 모든 향교에 유학을 교수하는 관리인 교관(敎官)을 임명·파견했다. 교관은 유학에
소양이 있는 지식인으로 선임하고, 수령과 함께 파견되도록 법제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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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서무에는 신라시대 설총을 비롯하여 중국과 한국의 유학자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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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東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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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에 의하면 교관을 교수(敎授:종6품)·훈도(訓導:종9품)로 구분, 군·현에는 훈도를, 부(府)·
목(牧) 이상은 교수를 파견하도록 법제화했다. 그러나 수령의 적임자조차 부족한 상황하에서 교관까
지 선임한다는 것은 여의치 않았으므로, 교관의 파견이 법제도대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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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적 조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생원·진사 또는 경학 지식이 있는 사람들 중
에서라도 관리를 선발하여 임시로 교관직에 보임 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향교 교육을
위해 여건의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교관의 파견에 많은 노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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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大成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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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널리 보급시키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중기·후기로 가면서 관
학 교육기관에 대한 비판적 언론과 사학(私學) 교육기관의 활성화로 인해 학도들은 향교를 기피하고
서원·서당 등의 사학기관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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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제독관(提督官)·교양관(敎養官)을 두어 관학의 교육기능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그결과는 부분적
성과에 그쳤다. 이후 향교는 문화적·정치적 기능이 강화되어 유교문화이념의 또다른 성격을 구현하는
기구로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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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에는 공자 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동·서쪽으로 맹자 등 네 성인, 공자의 제자 열 사람, 주자
등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여섯 사람을 함께 모셨다. 향교에서는 매달 음력 초하루 보름에 사당에 향
불을 피워 올리고 매년 봄·가을에는 석전대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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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지방 지식인들의 구심처 였으므로 지방 단위 의 문화행사, 특히 유교문화이념에 따른 행사가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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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의 석전례(釋奠禮)와 삭망 의 분향이 향교 의 문묘에서 이루어지고, 사직제·성황제·기우제·여제
등도 향교를 중심으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지방민 의 기원이 이곳에서 규합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교가 향약의 운영도 주관했으며, 향사례(鄕射禮)·향음례(鄕飮禮)·양로례(養老
禮)도 여기에서 중심이 되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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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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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향교는 왕의 윤음을 비롯한 중대한 정치적 내용을 직접 지방민들에게 전달하는 공식적인 장소
가 되기도 했다. 즉 향교는 순수한 교육적 기능을 점차 상실하면서 문화적·정치적인 기능은 그대로
상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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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이르러 문화적·정치적인 기능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이미 상실한 교육적 기능을 소생시
키려고 했다. 양사재(養士齋)·흥학재(興學齋)·육영재(育英齋) 등 향교의 부속건물 기구를 설치하면서
교육기능을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그 예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지식인
들의 지방적 거점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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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향교에서 유학을 교육받은 지방민은 생원·진사 시험을 거쳐 다시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중앙의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지방민의 입장에서는
중앙정치권에 진입하기 위한 합법적이고 개방된 절차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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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방 지식인들에게는 극히 좁은 문이 되었으나, 전체 지방 지식인들이 갖는 정치력이야말로 중
앙의 세력에 일정한 제약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앙세력의 대표격인 수령은 호구의 조사,
조세의 부과, 군적의 편성 등 정치운영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지방 지식인들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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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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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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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明倫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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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지방 지식인은 중앙정치를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당쟁하에서 중앙관료들의 비정에 대한 비
판적 여론은 지방의 지식인들, 즉 사족(士族)이라고 하는 양반들의 집단 속에서 조성되었는데, 특히
그들은 향교를 중심으로 정치 활동을 활성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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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향청(鄕廳)·사마소(司馬所)·서원(書院) 등의 기구를 통해서도 정치적 활동을 했으나, 향교가 중
앙정치력과 지방사족들의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이자 정치력의 구현 장소라는 점에서 정치적 구심처
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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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향교의 운영은 어떻게 했을까?, 당시 향교는 중앙정치력과 지방 지식인 사이에 정치력의 긴
장이 존재했는데, 그런 양상은 결국 재정적 투자 형태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우선 중앙정치력은 지
방
침투를 위하여 학전(學田)·학노(學奴)라는 이름의 재정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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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수령들이 때때로 전곡(錢穀)을 내어 향교의 중수·중건·비용 등을 마련하거나, 향교전 의 설치를
위해 토지를 매득하기도 했다. 한편 지방 유림들도 향교 운영과 보수를 위해 스스로 유전(儒錢)을 갹
출하거나 일반 백성들에게 원납전을 받아 기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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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지방세력이 재정투자를 하면 이에 상응하여 조세 분담, 또는 군역 분담 등에서 일정한 혜
택을 부여받았다.지방 지식인들은 향교의 운영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향교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인정
되는 면역의 특권을 누리거나 지방정치에의 구심세력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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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조선 후기 향교 의 운영을 위해 교생의 면강첩(고강을 면제받으면서 학생신분을 유지하는 증명서)
을 발매 한다든지, 교촌(校村)·교보(校保)라는 향교 주변마을을 국가의 일반 역에서 제외시키는 대신
향교만을 위해 사역하도록 조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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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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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계방촌(鄕校契房村)의 경우는 향교 주변이 아닌 변방지역에 있는 마을을 교촌과 같은 특혜촌으로
만들어 지배했다. 이같은 재정투자를 통한 사회적 영향력의 행사는 그대로 정치력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어 기왕의 향청을 중심으로 기능했던 정치력이 조선 후기에 와서는 향교를 중심으로 집결되는 경향
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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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향청·서원 등이 지방 유림들의 집회소이자 여론의 발원적 기관이 되었는데, 이것은 향교가 갖는
중요한 정치기능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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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향교의 교임(校任) 등이 곧 그 지방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유림의 대표인물이라는 지
적도 이를 반증해준다. 끝으로 향교의 건물 구조를 보면 향교는 문묘·명륜당·재와 기타 부속건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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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교육공간으로서 강의실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재가 있었으며, 배향공간으로 공자의 위패를 비롯한
4성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배향하는 대성전으로 구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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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건물배치는 평지의 경우 전면이 배향공간이고 후면이 강학공간인 전묘후학, 구릉지의 경우에
는 전묘후학과 반대로 전학후묘이거나 나란히 배치되기도 했다. 군·현마다 학생 정원의 규모가 다르
듯이 건물의 규모도 대소의 차이가 있음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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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cafe.daum.net/b2345/9t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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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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