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적 즉자적 의미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대자적(對自的)이라고 한다. 즉자적(卽自的)이라는 말과 상대하여 말하는 것인데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을 즉자적이라 하고, 이것은 동물적 태도이다. 대자적 태도는 이와 반대로 주관인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화하여 반성하고 관찰하는 태도이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다른 동물과의 차이이다.
독일의 철학자 G.W.F.헤겔이 사용한 철학용어이다. 따라서 인식하는 주관에 대해서 아직 발현(發現)되지 않는 ‘잠세태(潛勢態)’, 또한 자기 자신에의 반성적 관계가 결여되었다는 뜻에서 ‘무자각태(無自覺態)’의 뜻도 된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갖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존재. 논리 전개의 가장 낮은 단계로, 대립이 미발전(未發展)인 채 잠재해 있는 것. 즉자적 존재(卽自的 存在)란 대자적 존재(對自的 存在)의 반대말이고 바로 의지자신이라는 말이라고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아픔의 느낌 자체는 즉자적 존재이고 그 아픔의 느낌을 자기의 아픔 으로 관조하여 의식되어진 존재는 대자적 존재이다.
Marx의 계급이론에 대하여 부연설명하면, 그는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 예, 토지, 공장, 기계 등)의 소유 여부에 따라 자본가(유산계급)와 노동자(무산계급)를 구분하는데,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불평등의 관계뿐만 아니라 착취의 관계이기도 하다고 본다. 그리고, Marx는 경제적 생산수단의 소유유무라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동일한 위치를 점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즉자적(卽自的) 계급(class in itself)이라 부르고 이러한 즉자적 계급이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을 통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할 때 그것을 대자적(對自的) 계급(class for itself)이라고 불렀다.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전환될 때에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즉자적(卽自的) 계급과 대자적(對自的) 계급이란 무엇일까? 사실 즉자적과 대자적은 헤겔의 분위기가 많이~풍기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에 헤겔 좌파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헤겔은 분명히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임이 틀림없다.
헤겔이 말한 즉자적 자아와 대자적 자아를 마르크스에 대입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쉬워질 것이다. 즉자적 계급이란 무엇인가? 즉자적이란 ' 척 보기에' 그러한 계급이라는 것이다. 여기 한 명의 공장 임금 노동자가 있다고 하자. 푸른 옷을 입었으며 얼굴과 손에는 기름때가 조금씩 묻었으며 조금은 허름해보이는 차림새. 이 사람을 보고 우리는 뭐라고 생각할까? 우리는 이 사람을 척 보기에 "아~공돌이구나(나는 공돌이라는 말을 노동자를 낮추어 부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친근하게 부르고자 하려고 썼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노동자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계급에 대해 알지 못 한다. 자신은 그저 노동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투쟁하는 법을 모르며 그저 열심히 일해서 회사의 자본을 늘리는 것과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이처럼 그 자신은 어떠한 계급이지만 계급의식이 결여된 부류를 '즉자적 계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즉자적 계급은 어떻게 하여 자신을 깨닫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노동자들은 투쟁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보게 된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한다거나 임금 삭감 등의 상황때문에 노동자들은 투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투쟁을 할 때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결속된 힘을 깨닫고 투쟁을 함으로 자신을 대면하게 되며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노동자들은 '대자적 계급'이 된다.
노동자들은 즉자적 계급(노동계급)에서 투쟁을 통하여 대자적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되는데, 그렇다면 부르주아 계급은 즉자적 계급일까 아니면 대자적 계급일까? 부르주아는 자신의 누구이며 어떤 계급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의 계급에 어떤 것이 이익이 되는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대자적 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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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또 다른 분의 해석
각주구검(刻舟求劍)한다는 말이 있다. 배에 표시를 하여 칼을 구한다는 것인데, 옛날에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자기가 가진 아주 귀한 칼을 자랑하다 그만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배에다 빠뜨린 위치를 표시하면서 나중에 도로 찾을 수 있다고 큰소리 친다.
칼을 찾고자 한다면 칼이 빠진 물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강물을 따라 지나가는 배에다가 표시 해두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이 고사는 눈앞의 현실만 보고 그 근본은 살피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종종 이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는 것은 결국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의 철학자 순자는 인간이 추위를 막아줄 털도 가지고 있지 않고,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날카로운 이빨이나 손톱도 없으면서도 가장 빼어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인간의 생각하는 힘으로서 가능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대자적(對自的)이라고 한다. 즉자적(卽自的)이라는 말과 상대하여 말하는 것인데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을 즉자적이라 하고, 이것은 동물적 태도이다. 대자적 태도는 이와 반대로 주관인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화하여 반성하고 관찰하는 태도이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다른 동물과의 차이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바로 대자적인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본래 이러한 능력이 있다. 하지만 천부적인 능력이라고 해서 저절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생각하는 능력은 발휘되지 않는다. 이럴 때 ‘실수’라는 말을 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두번 세번 반복하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다. 생각을 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데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결국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인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는 존재이다. 다른 동물들은 그 존재로 태어나면 그 상태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이상도 될 수 있고, 금수만도 못한 존재로도 될 수 있다. 금수의 존재성은 닫혀 있는데 반해 인간의 존재성은 열려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은 자유다”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자유라고 해서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기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인을 지향해 가는 것 뿐이다.
맹자라는 사람은 인간이 금수이하가 되느냐 아니면 인간이상이 되느냐는 오직 생각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흔히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한다. 이 가을에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고,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는 멋진 사람이 되어 보자. 이런 멋진 사람이 곧 성인이다.
【송석구(동국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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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즉자적 대자적이라는 것이 본인이 아둔하여 무엇인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네이버에 검색하니 상기와 같이 수록되어 있군요 혹시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 있을 수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올려봅니다.
하여 사색해보니 즉자적이라는 것은 철학에 사용되는 전문용어 같은데 홀로만 존재하는 것이 되는 것 즉 절대적과 같이 볼수 있겠습니다. 절대 다른 비교하는 대상이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대자적은 공동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니 이는 혼자가 아니고 많이 모이는 것으로 즉 상대적의 개념인 서로 대상이 있어 비교할 수도 있는 것과 유사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ㅎㅎ 참 멋지네요 이렇게 같이 공유하고자 하는 학습자세가 본받을 부분인 거 같아요... 좋은 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