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항쟁. 삼별초,
진도에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원종 11년 裵仲孫과 盧永禧 등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반역을 했다. 진도에 들어가 거점으로 삼았다. (고려사)
고려는 특별히 선정해 뽑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別抄라 하였는데, 최씨 무신정권 시절 최우는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고 신변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힘세고 기골이 장대한 장정들을 뽑아 사병조직 夜別抄를 만들었다.
그러나 몽골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야별초를 확대해 정규군 조직으로 재편해서 左別抄, 右別抄로 나눴고, 여기에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거나 송환된 사람들로 구성된 神義軍로 만들어진 군대가 三別抄이다.
삼별초는 몽고와의 싸움에서 가장 선봉에 섰던 아주 핵심적인 反蒙집단이었다.
그래서 고려가 몽고에 굴복했을 때 반란을 일으켰다.
1131년 몽고가 침입해 오자 이듬해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한다.
강화는 40년 가까이 대몽항쟁의 중심지였다.
1260년 고종을 이어 원종이 즉위한다.
하지만 원종은 몽고에 항복한다.
그리고 1270년 5월 15일 무신정권이 몰락한다.
5월 23일 개경 환도를 공표하고, 5월 29일 삼별초 해산 명령을 내린다.
삼별초는 이틀 뒤 몽고병이 인민을 살육하여 무릇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구정(운동장)으로 모여라. 원종11년 1270년 6월 1일 삼별초가 난을 일으킨다.
삼별초는 고려 정부가 몽고 항쟁을 포기한 것에 대한 반발로 봉기한 것이다.
高麗史에는 宰樞가 모여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정하여 방을 붙이니 삼별초가 따르지 않고 재물 창고를 열었다.(원종 11년 1270년 5월 23일)
그리고 삼별초는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했다.
승화후 온은 원종의 6촌이다.
삼별초는 관부를 설치하고 대장군 劉存奕과 상서 李信孫을 좌우 승선으로 임명했다. (11년 6월 1일)
이것은 새 정부의 수립을 의미한다.
6월 3일 강화를 떠났다.
출발지점인 외포리에는 遺墟碑 (쓸쓸하게 남아있는 옛터)가 남아있다.
당시 삼별초가 이끈 배는 1000여척 거기엔 항몽 의지가 실려 있었다.
삼별초는 서해를 따라 항해하며 74일 만에 8월 19일, 진도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진도는 육지와 인접해 있어 수시로 본토를 드나들면서 대몽 항전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울둘목이 물살이 거세서 수전에 약한 몽고군이 쉽사리 쳐들어올 수 없었고, 진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稅穀을 싫은 漕運船이 개경으로 통과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삼별초가 차단하면 개경에 경제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섬이면서 비옥한 농지가 있어서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삼별초는 진도 벽파진에 도성을 정하고 성을 쌓았다.
이것이 용장산성이다.
궁궐터는 산과 계곡에 둘러싸인 곳에 9개 계단의 석축으로 조성되었다.
1989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면적은 7000여 평, 건물은 17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원래 이곳은 용장사가 있었던 곳으로 사전 준비 없이 진도에 온 삼별초는 용장사를 확장해서 궁궐로 삼았다.
현재 궁궐터 옆에 용장사가 있다.
본당에 약사 삼존 석불 좌상이 봉안돼 있는데 땅에 묻혀 있던 것을 50년 전에 발굴한 것이다.
고려 시대 양식이어서 옛 용장사에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삼별초는 왜 고려 정부임을 내세우려는 것일까.
동경대 사료 편찬소에서 高麗牒狀不審條條(고려의 외교 문서를 접수한 일본관리가 몇 가지 의문점을 적어 놓은 것)가 발견되었다.
(1977년) 거기에는 文永 5년(1268년)의 문서에는 고려가 몽고 연호인 至元를 썼는데 여기는 쓰지 않았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음은 몽고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주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삼별초는 강화로 옮긴 지 40년 만에 오랑캐의 풍습이 싫어 진도로 천도했다.
천도라는 말은 삼별초가 고려의 당당한 정부라는 뜻이다.
그리고 삼별초는 우리 왕조가 삼한을 통합했다.
즉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정통성이 삼별초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삼별초는 고려의 정통정부임을 일본에 알렸다.
나아가 표류한 일본인을 돌려보내고, 병력 수만명을 요청한다.
그것은 몽고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일본과 연합해서 맞서려는 구상을 삼별초가 했던 것이다.
또한 삼별초를 회유하기 위해서 몽고가 서신을 보냈는데 진도를 독립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돌려보냈다. 삼별초는 고려의 전통 정부로서 몽고에 굴종하지 않는 독립 국가인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별초의 세력권은 어느 정도였을까?
고려사는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으로 삼고 여러 고을을 침범하여 약탈했다.
세가 극심해서 여러 고을이 항복하고 진도로 찾아가 적장을 알현하기도 했다.
삼별초는 나주, 전주, 장흥에 이르는 전라도를 세력 안에 넣고, 이어 제주도의 관군을 敗退시키고 후방 기지로 제주도를 확보했다.
이후 경상도로 진출한다.
남해를 거점으로 마산, 김해, 동래로 진출했다. 몽고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삼별초는 1년도 채 못되어 막을 내린다.
1271년 5월 15일 여몽 연합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
병선 400여 척에 군사 1만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으로 진도를 공격한다. 용장성은 불났고 배중손은 남도진으로 향했고, 김통정은 왕을 호위하고 금갑진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왕은 죽음을 맞았고, 김통정은 잔여 세력을 이끌고 제주로 떠났다.
남도진으로 후퇴했던 배중손 부대는 1271년 김방경, 흔도, 홍다구의 여몽 진압군이 공격에 전멸했다.
이렇게 삼별초의 진도 정부는 패망했다.
진도 굴포리에는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의 사당이 있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했던 承化侯 溫은 지금의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논수골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 피난 중이던 女妓・及唱 등 삼별초의 궁녀와 부하들은 만길재를 넘다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언덕을 따라 올라가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과도 매우 흡사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며 이곳 둠벙에서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슬피 들려오고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까지만 해도 밤에는 이곳을 지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이곳 둠벙을 가르켜 이후 진도 사람들은 女妓・及唱 둠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이곳 둠벙의 수심은 매우 깊어서 절굿대를 넣으면 우수영 또는 금갑 앞바다로 나온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김통정을 중심으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진도에서 제주로 옮겨 가면서 대몽항쟁을 펼쳤다.
항파두리 해안에 내성과 외성을 쌓고 해상권 확보에 노력하여 31개월 동안 제주를 거점으로 활동하게 된다.
개경 정부는 몇 차례 회유했으나 실패하자 金方慶을 중심으로 다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을 편성, 탐라를 공격하여 1273년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했다.
전멸한 줄 알았던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갔는데, 용장산성 기와 외에도 오키나와 현지의 식습관, 제주도와 비슷한 돌담들,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구원요청, 연호 표시 유무, 등을 근거로 들어서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완전히 토벌된 것이 아니라 더 남쪽으로 가서 살았다는 주장을 편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가 남은 삼별초를 잡아다 죽이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을 했을 정도였으므로 이들에게는 항복 후 고려로 다시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판단이라는 것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전의 결과로 반몽골적 정치 세력이 일소되고, 권문세족(친원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삼별초는 고려의 대몽 抗爭史에 마지막이었다.
거대한 제국이었던 몽고의 강력한 외세에도 굴하지 않았던 정신과 자주 독립국가를 지키고자 했던 항쟁의 정신과 이 땅과 이 민족에 주인으로 살겠다는 것이 삼별초가 지닌 뜻이다.
ㅡ 여래사 혜린스님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