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리를 둘러서
집 근처에도 대중목욕탕이 있지만 웬만하면 북면 마금산 온천장을 이용한다. 그곳에 가려면 새벽에 길을 나서 시내버스 첫차를 타고 가도 내보다 먼저 들린 사람이 더러 있었다. 내가 차를 소유하지 않고 운전도 하지 못하기에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본포까지는 시내버스를 타고 거기서 걸어 낙동강을 가로지른 본포교를 건너 부곡을 찾아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오기도 했다.
본포에서 부곡으로 가는 길은 학포에서 노리를 거쳐 청암마을을 지나 온정리를 지나갔다. 노리마을 어귀에서 특이한 빗돌을 보았다. 노리와 임해진 사이는 낙동강 강물이 휘감아 흐르는 절벽이다. 사람보다 먼저 두 마을에서 정분이 난 개가 오가면서 벼랑에 길을 내어주어 그 뜻을 기려서 개〔犬〕비를 세웠다. 글자는 풍우에 마모되어 희미해진 개로비(開路碑)가 노리 마을 앞에 있다.
본포교를 건너면 창녕 학포로 의령 남씨 집성촌이다. 학포와 인접한 구산마을엔 정순공주와 부마 남휘 묘역이 있다. 정순공주는 태종의 4녀로 세종대왕과는 남매지간이다. 남씨 종친회에서는 경기도 평택의 묘역을 현대에 와서 구산으로 옮겨왔다. 남휘 손자가 그 유명한 남이장군으로 정순공주는 할머니가 된다. 내가 부곡 온천 목욕을 가면서 그 묘역이 보여 찾아 둘러보기도 했다.
겨울방학을 맞아 본포교를 건널 일이 생겼다. 길이 멀다만 다시 온천수에 몸을 담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길을 나선 김에 학포에서 구산을 지난 비봉리를 찾아갈 셈이다. 오래 전 그 길을 지나칠 적 비봉리 선사유적이 발굴되었다는 뉴스는 접했지만 전시관은 개관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방학을 맞은 일월 중순 창원실내수영장 맞은편에서 30번 버스를 탔더니 주남저수지를 돌아갔다.
내가 내린 본포는 30번 종점이 아니고 더 나아가 북면 온천장까지 가는 버스였다. 본포에서 강둑을 올라 본포다리로 향했다. 저 멀리 금정산 고당봉과 삼랑진 양수발전소 천태호 방향에서는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장갑을 벗고 휴대폰을 꺼내 본포나루 아침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차량이 다니는 낙동강을 가로지른 길이 천 미터 가량 되는 본포다리를 걸어 지났다.
다리를 건너면 1022번 지방도는 노리를 거쳐 임해진으로 올라갔다. 나는 북동쪽으로 난 밀양 무안으로 가는 자동찻길을 걸었다. 신포와 학포를 지나 구산마을에는 앞서 언급한 정선공주 묘역과 그의 손자 남이장군 기념관이 나타났다. 구산이라는 지명은 갯가에 많은데 내륙에도 있음이 특이했다. 청도천이 샛강이 되어 낙동강 본류에 합수하는 구산은 내가 보기는 거북의 형상이었다.
구산마을을 지나니 비봉리였다. 비봉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창녕 부곡 비봉리는 고고학자들에겐 십여 년 전 ‘매미’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영남 일대 태풍이 할퀴고 간 큰 상흔으로 배수장이 허물어졌을 때 신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금덩이처럼 쏟아진 현장이다. 우리나라 내륙에서는 물론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배를 비롯해 골각기와 석기 등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다.
비봉리 패총전시관을 찾았을 때 학예사 두 분이 이제 막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즈음이었다. 평소 관람객이 많지 않을 전시관에서 나는 귀한 손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예전 배수장 골조를 그대로 살린 패총 유적지 전시관에서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무려 8000년 전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을 떠올렸다. 지금 반려동물로 익숙한 개나 고양이보다야 더 발달된 인지 수준이었지 싶었다.
학예사가 건네준 따끈한 커피 잔을 비우고니니 나는 남은 도보 여정이 기다렸다. 비봉리 마을 안길을 걸어 아득히 먼 비봉고개를 향해 걸었다. 굽이굽이 모롱이를 돌아 산마루에서 배낭에 넣어간 도시락을 비우고 청암리로 내려섰다.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부곡이 멀기만 했는데 발품 팔아 걸었더니 온천장이었다. 한 시간 남짓 탕에서 머물다 바깥으로 나오니 아직 겨울 햇살이 설핏 남았다. 19.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