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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3.10.06)]
/ 어두움과 빛(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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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13.10.06)]
/ 홀로 돌아온 언약궤
에베소서 5:8~10 어두움과 빛 2013. 10. 6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8절을 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복음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반드시 ‘전’과 ‘이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전에는 어두움에 있었는데 이제는 빛 안에 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이 무엇인지 빛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10절에 보시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험하여 보라고 하는 말씀은 무엇을 분별하고 구별하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1:1~5절을 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1)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형체가 없는)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성경에 처음으로 나오는 어두움과 빛에 대한 말씀입니다. 5절에서 낮과 밤으로도 말씀하시지만 단지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낮과 밤의 이야기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무엇인지 어두움과 빛이 무엇인지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란 빛이 없는 상태입니다. 빛이 없는 상태를 혼동 공허 흑암으로 표현합니다. 혼동과 공허와 흑암에 빛이 비치라고 합니다. 이 빛은 태양과 다른 빛입니다.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빛이 비추어짐으로 틀이 잡혀지고 공허에 채움이 있고 흑암이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낮과 밤의 문제가 아니라 어두움과 빛을 설명합니다.
창세기 1:14~19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서 낮과 밤, 해와 달을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1~5절의 어둠과 빛이 근원적인 것이며 낮과 밤, 해와 달은 이 근원적인 어두움과 빛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두움과 빛이 무엇이라고 여겨집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빛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그것이 어두움이라는 말씀입니다. 갑자기 결론을 말씀드려서 많이 당황하셨겠지만 이제부터 어두움과 빛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1~5절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라는 말씀과 빛과 어두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태초의 그 빛이 곧 말씀이며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이미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에 빛이 없던 혼동과 공허와 흑암만 가득한 것처럼 이 세상이 어두움만 가득합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이 세상은 캄캄한 흑암아래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은혜를 입은 자들이 빛이 무엇인지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 최종적인 빛의 증인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복음 1:6~11절을 봅니다.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증거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세상은 빛을 증거 한 세례요한은 목 베어 죽여 버렸고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어둠에 속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느 누가 예수님을 빛으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11~14절입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 믿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두움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가 되었기에 스스로 자신을 살리기 위하여 땀을 흘려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여도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터진 웅덩이 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써서 채워도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둠에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한 옛 뱀 곧 마귀요 사탄은 이 어둠에 속한 자들이 빛을 보지 못하도록 어두움의 세상 속에서도 빛이 있다고 속입니다. 우선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어두움과 빛이 무엇입니까? 한국에서 군대 가는 것은 의무입니다. 그런데 그런 군대에서 면제되면 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방위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고 현역으로 그것도 최전방에 가게 되면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제가 군에 갈 때에 있었던 말들입니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재벌 집안에 태어나면 신의 후예라고 합니다. 이 말은 2013년 시자저널 둘째주간에 나온 내용입니다. ‘30대 그룹 내부거래 실태, 재벌가 자식은 신의 후예’라는 제목이 표지에 있습니다. 30대 기업의 미성년자 주식 부자가 28명인데 평균 주식의 가치가 55억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최고는 15세의 어린이가 390억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을 우리는 어두움이라고 부릅니까? 빛의 세계라고 부릅니까? 빛의 세계라고 합니다. 어둠의 세계는 달동네라든지 움막 촌과 같은 곳을 어둠의 동네라고 합니다. 이런 것만이 아니라 학교도 가정도 교회도 유대인들도 각자의 나름대로 어둠과 빛으로 나눕니다.
유대인들은 어두움과 빛을 어떻게 나누었습니까? 율법을 알고 지키는 자들은 스스로 빛의 자녀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과 율법을 알지만 지키지 않는 세리와 창기들을 어둠의 자식들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빛에 거한다고 말하면서 율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율법을 지켰는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율법을 지킨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나라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라는 유대인에게 오셨습니다. 오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7:7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이 빛으로 오시지 않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빛과 어두움을 나누며 살고 있습니다. 앞에서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선악과를 따 먹은 모든 인간은 각자가 다 자기 나름대로의 빛과 어두움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익이면 빛, 나에게 손해가 오면 어두움,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빛과 어두움을 규정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느 부분은 빛이라고 인정해 주셨다면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미움을 받았습니까?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가장 선하다고 하는 것들조차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책망을 어둠에 속하여 자기 나름대로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면서 자신은 선과 빛에 속하였다고 여기는 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은 로마였습니다. 로마인들이 볼 때에 빛의 세계는 자기들이었습니다. 어둠의 세계는 로마처럼 문명이 발달하지 않는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이런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 땅에 내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며 빛이라고 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로마인들이 볼 때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전에 곽 집사님이 게시판에 올린 그림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에서 예수님은 그림자가 덮여지도록 초라하게 그렸습니다. 빌라도는 밝은 빛을 받는 모습입니다. 누가 보아도 빛은 빌라도이며 어두움을 예수님으로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빛으로 믿고 따를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이 보아도 로마인이 보아도 예수는 결코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3일 만에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은 이제 빛과 어두움이 무엇인지 구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은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이 소식이 2천 년 전부터 시작되어 오늘 이곳까지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을 듣는 자들은 어둠과 빛을 구별하게 됩니다. 전에는 자신이 빛이라고 여기며 선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악이며 어두움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어두움의 세상에서 어두움이라고 하는 윤리도덕적인 죄악들과 음행과 탐욕들이 다 어두움입니다. 우리도 다 여기에 속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빛이라고 합니다. 전이란 예수님을 믿기 전을 말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기 전에 우리가 살았던 모든 것들이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을 막론하고 다 어두움이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자기를 위하여 살아온 모든 것들이 다 어두움의 일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빛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에베소서 2:1~7, 11~13절을 봅니다. “봉독”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지금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곧 마귀를 따랐으며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의 피로 구속하시고 하늘에 까지 앉혀놓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엄청난 전과 이제가 있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골로새서 1:12~14절입니다.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흑암의 권세아래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셔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셔야만 빛이 무엇인지 어두움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 아들 안에서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9절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자녀라면 빛의 열매가 나옵니다. 열매란 일과 구별이 됩니다. 일이란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을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1절을 보시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의 결국은 사망의 열매만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빛의 열매를 맺어내려고 하면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일이 됩니다. 열매란 내가 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의 특징이 바로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이런 열매에 육체의 일인 시기와 질투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12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며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나오는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바로 생명과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행하였다고 그 일들을 자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육체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무엇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빛의 자녀가 되어 빛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빛의 열매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억지로 쥐어 짜내는 그런 헌신과 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직도 어두움에 속하여 육체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빛의 열매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대가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과 빛이라고 하는 것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두움과 빛이라는 기준을 교회에서도 그대로 사용한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이사야 5:20절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어두움에 속한 세상이 악을 선이라고 합니다. 흑암을 빛이라고 합니다. 단 것을 쓴 것으로 만들고 쓴 것을 단 것으로 만듭니다. 이런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창1:3)”
창세기 1:3절에서 보신 것처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제대로 빛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빛이 되었습니다. 이 빛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됩니까?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도를 세상이 볼 때에 어두움으로 보이겠지만 오히려 성도가 세상을 온통 어두움으로 보고 사는 것이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로 탈출하라고 말하는 자들이 빛의 자녀들입니다.
[주일오후설교(13.10.06)]
/ 홀로 돌아온 언약궤
사무엘상 6장 홀로 돌아온 언약궤 2013. 10. 6
‘사람은 망치고 하나님은 이루시고’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입니다. 한 마디로 구약전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망치고 하나님은 이루시는 것이 사무엘상 5장에서 언약궤를 빼앗긴 사건을 통하여 사람이 망친 일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6장에서는 언약궤 홀로 돌아오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6:1. 언약궤가 블레셋에 7개월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에 엄중하게 임하심으로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치게 되었습니다.
2~5.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제사장과 복술자들을 불러 여호와의 언약궤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여 여호와의 궤를 그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돌려보내되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속건제(贖愆祭)란 허물의 속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따라 속건제를 드리는 방법을 모르기에 그들 나름대로 독종의 형상 다섯 개와 땅을 해롭게 하는 쥐 모양 다섯 개를 금으로 만들어 언약궤와 함께 보내기로 합니다. 다섯 개를 만든 것은 블레셋 다섯 방백의 수효입니다. 이렇게 하여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면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 까 하노라고 합니다. 5:11절에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한 것을 이들이 압니다. 그래서 이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내면서 속건 제물을 바치면 혹시 여호와의 엄중한 손이 가볍게 하여 주실까 하는 조심스러움을 보게 됩니다.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여호와의 엄중한 손앞에 더욱 두려워 떠는 것을 보게 됩니다.
6.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들고 있다가 10가지 재앙이 내린 것을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여호와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났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출애굽 모티브가 나옵니다.
6~9.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방법으로 그들이 생각한 것은 과연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이런 재앙이 일어난 것인지 최종적인 확인을 하기 위하여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 수레에 메우는 것입니다. 젖 먹는 송아지는 떼어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소를 길러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잘 압니다. 멍에를 처음 메는 소들은 그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온 몸을 다 흔듭니다. 뿐만 아니라 젖 먹이는 소라면 새끼를 두고 갈 수가 없습니다. 젖을 뗄 때가 된 송아지를 팔기 위하여 끌고 나가면 어미 속도 새끼소도 얼마나 울어대는지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가들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정말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이런 재앙이 일어났는지 점검하기 위한 것입니다.
10~16. 블레셋의 제사장과 복술자들의 말대로 언약궤를 젖 나는 소 둘에 메어 벧세메스를 향하여 보냈는데 암소가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갈 때에 울며 갑니다. 그런데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 까지 갑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이 밷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가서 그것을 보고 돌아갑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밀을 베다가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수레가 멈추어 선 곳이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이 있는 곳입니다.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립니다. 레위인이 그 언약궤를 큰 돌 위에 둡니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립니다. 언약궤가 돌아가는 모습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나 언약궤가 돌아오는 모습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여호와의 보이지 않는 손을 느낀 것입니다.
17~18. 블레셋 사람들이 속건제물로 드린 금으로 만든 독종과 금 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약궤를 빼앗아 갔기에 그들이 승리하였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여호와께 철저하게 패배하여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만이 아니라 블레셋의 각 성읍과 시골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항복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 홀로 적을 물리치고 개선한 것입니다. 이 일은 여호와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내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내시는데 그 일에 사람들은 망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심으로 칠십 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괄호부분은 어떤 사본이 없다는 표시입니다. 그 당시 이곳에 오만이 살만한 마을이 아니기에 사본 상의 오류로 봅니다. 그러자 그 백성들이 슬피 웁니다. 언약궤를 들여다봄으로 죽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약궤 안에는 두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처음 돌 판은 그들의 조상들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깨어지고 두 번째 다시 만든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의 뚜껑을 만들어 덮었습니다. 언약궤의 뚜껑 이름이 속죄소입니다. 그런데 그 속죄를 걷어내는 순간 그들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나 우리나 간에 법대로 다루시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를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심을 보여주십니다.
20~21. 벧세메스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이것이 홀로 돌아온 언약궤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언야궤를 여호와의 임재와 동일하게 여기기에 그를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를 다시 의논합니다. 그 결과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언약궤를 가져 가게 합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합니다.
홀로 돌아온 언약궤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일하심은 여호와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홀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홀로 일하심으로 심판과 구원을 이루어내십니다.
이사야 59:1~15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이 가득하지만 어느 누구도 구원을 베풀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15절 중반부터 여호와 홀로 일하심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가지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 모든 언약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심판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