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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루카 1,39-45
은총은 그 본성상 자신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른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내용입니다.
어제 은총을 받는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일단 작은 은총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큰 은총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이 받은 은총을 당신만 지니지 않고 나누려고 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가 있으면 형제와 나눌 줄 아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
단순하지만 이 두 가지만 알면 우리는 은총 충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나중에 돌 맞아 죽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을 당신만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미국 아이오와주의 작은 농촌 시골마을 웨스트 브로우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형제가 교회에 가던 중에 주먹질하며 싸우는 소년 네 명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킨 후에 음식을 먹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학습지진아, 문제아, 저능아, 무의미한 인간 등의 별명을 갖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버림받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목사님께 부탁해 주일학교에 이 아이들을 위한
반을 만들어주면 자신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주일마다 그 선생님은 네 소년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고 소년들은 자라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1932년 이 나이 든 주일학교 교사의 은퇴 겸 생일 축하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편지 네 통이 낭독되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선교사로부터, 두 번째 편지는 연방 은행 총재로부터, 그리고 세 번째 편지는 후버 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것이고, 네 번째는 후버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후버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가장 어려웠던 대공황 시기(1929-1933)에 미국을 이끌었고
“하느님의 말씀은 역경을 이기는 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제 은총을 담을 그릇이 감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은총을 빨아들이는 힘은 나누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시기 위해 가진 것이 감사하는 삶을 사셨음을 말했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이 받은 은총을 엘리사벳에게 흘려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감사와 사랑이 은총을 충만히 받는 길입니다.
미국의 경영대학원 와튼 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남에게 주려고만 하는 이타적인 사람, ‘기버’(Giver), 남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 ‘테이커’(Taker), 그리고 남이 나에게 무언가 해주면 그제야 나도 주는 ‘매처’(Matcher)입니다.
이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실패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무조건 주는 기버들입니다.
이들은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성공을 하는 사람들도 기버들입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기술자 16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남을 도와주느라 정작 자신은 가장 낮은
생산성을 보이는 기버 부류를 조사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기버들은 경쟁에서 뒤처졌습니다.
하지만 기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속한 시간 속에서 쌓이는 사회의 ‘인정’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을 선호합니다.
자신보다는 타인과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버들이 그래서 장기적으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는 이기적인 테이커와 매처보다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기버들이 세상에서 성공합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야 했던 배정철 대표가 있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어 자기처럼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견뎠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사회에 내놓은 돈은 무려 50억 원입니다.
한국 초밥왕으로 군림한 그는 자기의 성공의 원인을 자신의 끝없는 나눔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아주 크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작은 일에서부터 나누다 보면 나중에 자신도 많은 것을 얻게 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 저도 나눔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 작은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 장학금을 댄다든지 병원에 기부금을 내면서 나눔에 관련된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왕이면 우리 가게에서 먹자 하는 분들이 많으시고 그렇게 되다 보니까 더 많은 것을 제가 얻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우선 가진 것에 감사합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누워서 주모송을 바치고 오늘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다음 날 일어나서 할 일들을 자세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계약의 궤 위로 내린 하느님의 현존이 움직인다면 바로 그 구름을 따라 움직이겠다는 준비된 자세를 말합니다.
계약의 궤는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본성은 흐름입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르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유학 가라는 주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은 그만큼 큰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전날 밤에 다음 날 일어나서 뭐 해야 할지 주님의 뜻을 물어보면 다음 날 아침부터 당황하지 않고 하루를 알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는 일들이란 사제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아주 충실히 살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만큼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또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감사합니다’와 ‘사랑합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유일하고 완벽한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 21일
루카 1,39-45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조차도
아기 예수를 잉태한 소녀 마리아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여인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한편 거룩하게, 다른 한편 장엄하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아직 스물도 안 된 처녀 마리아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분의 만남 안에는 분명 특별한 누군가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시는 분, 울음을 춤으로 바꾸시는 분, 역경을 순경으로, 고통과 십자가를 축제와 환희로 바꾸시는 분, 성령의 활동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생애 안에, 그리고 엘리사벳의 인생 안에 크게 돋보이는 장면이 한 컷 있습니다.
아무리 큰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더 성장하고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도구로 삼는 지속적인 노력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바처럼 삶이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인생이란 우리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삶이란 끝도 없는 우여곡절과 산전수전, 그 한가운데를 항해해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관건은 수시로 우리네 인생 앞으로 다가오는 삶의 부정적인 경험과 깊은 상처들을 어떻게 다스려나가고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노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양한 인생의 풍파, 끝도 없는 휘몰아치는 삶의 폭풍, 전혀 예기치도 않았으며 조금도 원치 않았던 인생의 모험 앞에서도 성모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혹독하리만치 극심한 시련 한 가운데를 걸어 가시면서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그녀의 내면에 하느님을 향한 강한 신뢰심과 단순하고 확고한 믿음, 그 어디도 물들지 않은 순수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잠시 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예!’하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또 다시 다양한 초대가 이루어집니다. 때로 성공과 안정, 평화에로의 초대도 있지만, 많은 경우 쓰디쓴 실패, 좌절, 모험에로의 초대도 부지기수입니다.
때로 좋은 것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만,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표시로, 좀 더 성장하라는 표시로 우리가 원치 않는 고통과 십자가도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모든 국면들, 다양한 초대 앞에서 성모님처럼 기쁘게, 기꺼이 ‘예!’라고 응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초대에 설레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예!’라고 응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21일 강론>
(2024. 12. 21. 토)(루카 1,39-45)
<성탄절은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1)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다녀간 뒤에, 가장 먼저 요셉에게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을 것이고, 그리고 곧바로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고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 주었기 때문인데, 아기를 낳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 갔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기쁨’입니다.
여기서 ‘서둘러’ 라는 말은, 마리아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간 이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선교사’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4-15)”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믿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 믿음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쁨’에서 ‘나눔’이
이루어지고, 그 ‘나눔’이 곧 ‘ 복음 선포’입니다.
만일에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응답과 순종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억지로 복종할 수는 있겠지만, 믿음과 기쁨이 없는 복종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믿음’과 ‘기쁨’은 ‘하나’입니다.
만일에 기쁨이 없다면, 즉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믿는다는 말만 하면서 다른 것을 더 찾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2) 마리아의 기쁨은, 마리아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쁨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은 마리아에게만 기쁨을 주는 소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에 관한 소식이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17)”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서는 ‘모든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많은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메시아 강생’은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되는 소식인데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구원이 아닌 다른 것만 찾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으시는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주님의 구원 사업에서 소외시키는 자들입니다.
3) 성탄절은 ‘모든 사람’을 위한 축제날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성탄절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스도교의 성탄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교회 문을 닫아놓고서 신자들끼리만 축하하고 즐거워한다면, 그러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을 거스르는 죄가 되고,
성탄절을 모독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성탄을 기뻐한다면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우리끼리만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날이고,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 기쁨과 나눔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