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우울증은 지속적인 슬픔으로 흥미를 상실하는 증상입니다. 늘 에너지가 부족하고 생활의 질이 크게 떨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 불안 장애는 일상생활에서 과도한 걱정과 두려움을 갖는 증상입니다. 불안 지수가 높으신 분들은 지나친 염려로 많은 일들에 스트레스를 겪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갑작스런 공포나 두근거림, 숨 가쁨 등의 신체 증상을 나타내는 공황장애나, 오염이나 피해 혹은 정돈이나 신념에 대한 강박 장애 등도 불안 장애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또한 과도한 학업이나 업무로 인한 ‘번아웃 증후군’, 불면이나 ‘수면 장애’ 같은 문제를 겪고 계신 분도 우리 주변에는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분들은 환경이나 상황이 녹록지 않음에도 정서적으로 편안하신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큰 질병에 걸렸는데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다쳤으면서도 오히려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또 재정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가진 것을 나눠주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우린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같은 사건을 두고 왜 어떤 사람은 정서적인 위기를 겪고, 또 다른 사람은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평강과 위로를 허락하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단락을 잘 구분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만약 57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본문을 해석하면 우리는 내용을 크게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17절과 18절 사이에 간극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논리에 따라 후반부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악인의 모습과 그가 당할 심판을 먼저 확인한 후 이어 어떤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위로하시는지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0절과 21절은 악인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이사야는 57장을 결론하며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라고 단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쁜 인간에게는 평안을 주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악한 사람은 평온함을 얻지 못한다. 진흙과 더러운 것만 늘 솟구쳐 낸다. 성난 파도 같이 그 마음이 잔잔치 못하고 요동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혹시 아주 더러운 대걸레를 빨아보신 적 있습니까? 빨아도 빨아도 구정물이 계속 나오는 대걸레 말입니다. 충분히 빨았으니 이제 깨끗해졌겠지, 생각하고 짜보면 다시 또 더러운 구정물이 잔뜩 나오는 대걸레.. 악인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대체 누가 그렇게 지저분한 악인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악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네 바로 접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 그리고 선교사님들입니다. 또 바로 여기 계신 아주 멋진 장로님들과 어여쁜 권사님들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 속에는 아무리 회개하고 깨끗이 씻어보고자 해도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죄와 비참함이 시커먼 구정물이 늘 샘솟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본인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번 마음속을 찬찬히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17절은 그런 악인이 당할 심판을 기록합니다.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아멘. 여기서 ‘그를 나’로 ‘나를 주’로 바꾸어 읽으면 이렇습니다. “나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주가 노하여 나를 쳤으며 또 주의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내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아멘. 내가 깊은 죄악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주께서는 나를 향하신 그 얼굴을 차마 가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로 나를 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나는 패역하여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바라는 길로만 걸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16절과 15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16절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다투지 않으시겠답니다. 우상 숭배로, 탐욕으로 욕심으로 가득한 우리에게 끝까지 분노하진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주께서 지으신 우리 영혼이 주님 앞에서 피곤할까 봐, 기력 없이 쓰러져 낙심할까 봐, 우리를 끝까지 혼내지만은 않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15절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반복하여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단어는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레위기에서 피부가 우묵하다 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남들보다 자신을 낮추는 것, 아래로 깊이 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회라는 단어는 ‘가루나 먼지’라는 의미입니다. 한 존재가 가루나 먼지처럼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겸손히 통회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내려놓으며 깨뜨려서 먼지처럼 자복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통회하며 뉘우쳐 회개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8~19절 말씀처럼 그런 자들을 고쳐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비록 그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힘들며 어려운 환란 가운데 있어도 그를 고쳐주고 인도하며 위로와 평안을 다시 얻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린 이사야 57장 말씀을 뒷부분부터 살펴보았습니다. 악인에게는 분명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는 평온함과 평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악인은 특정한 한두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선 끝까지 분노하지만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겸손한 자 통회하는 자는 함께 하시고 소생시키신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죄로 가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겸손히 통회할 때 고치시고 인도하시며 위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양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우울증을 비롯하여 공황과 강박 등 불안 장애, 번아웃, 불면, 수면 장애 같은 문제를 겪고 계신 분이 우리 주변에는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은 종종 말합니다. ‘남편 때문에 그렇다고, 직장 때문에, 돈 때문에, 상황 때문에 그렇다고, 또 다양한 이유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아파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모든 문제가 다 ‘외부적인 원인들’로만 인해서 생겨난 것일까요? 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문제일까요? 사실 그 문제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우리 내적인 문제,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죄와 비참함’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십니다. 다만 통회하고 겸손한 자에게는 함께하시고 소생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고쳐주고 인도하며 위로를 다시 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그 하나님의 위로가 성도 여러분께 임하길 소망합니다. 그 하나님의 평안이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넘치시길 간구합니다. 우리가 가진 ‘탐심의 죄악’을 통회하고 자복하는 가운데,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로 ‘위로와 참 평강’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출처]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4~21)|작성자 노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