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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말을 들으라
잠 22:17-21
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8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19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0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잠 22:17-21 / [경험 많은 어른이 이르신다; 22:17-24:22] 귀를 기울여,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깨달아 슬기롭게 사는 이들이 하는 말을 잘들어라. 그들의 깨달음에 마음을 쏟아라. 18) 날마다 그 말씀을 깊이 새기고, 또 줄줄 외우고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느냐? 19) 네가 진심으로 여호와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 오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20) 내가 서른 가지 가르침을 써주지 않았느냐? `어떻게 하여야 참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는가' 하는 가르침 말이다. 21) 나는 네게 참된 말씀을 가르쳤다. 네가 빨리 자라 어른이 되게 하려고 학교에 보내시는 네 부모님이 혹시라도 물으시는 것이 있으면, 그 물음에 잘 대답할 수 있게 말이다.
22장 17절에서 24장 34절은 지혜자가 말한 36개의 잠언으로서 젊은이가 범하기 쉬운 잘못들을 경계합니다. 앞의 문단(10:1-22:16)에서는 주제와 상관없이 단편적인 잠언들이 기록된 반면, 여기서부터는 주제에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지혜자의 말의 가치를 다룹니다.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17-18) 아무리 지혜로운 말씀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귀와 마음을 준비하여 지혜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귀는 정보를 받는 외부 기관이고, 마음은 온몸을 지휘하는 내적인 기관입니다(잠 4:20-27)(Waltke). 한 번 얻은 지혜는 너무 소중하여 ‘속에’ 잘 보존해야 합니다. ‘속’(히. 베텐)은 문자적으로 ‘배’(belly)를 의미하며, 히브리인들은 배 안에 우리의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혜를 계속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입으로 늘 고백해야 합니다(수 1:8). 지혜를 소중히 여기고 마음에 간직하고 입으로 늘 읊조리는 것이 귀찮고 힘든 일일지라도 그로 인해 얻게 될 복된 결과를 생각하면 이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름다우니라’(히. 나임)는 말은 ‘즐겁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지혜를 전하는 목적(19) 잠언에서 지혜는 하나의 지향점을 갖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것입니다(1:7). 우리가 지혜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이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됩니다(롬 10:17). ‘오늘’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의 하루하루를 말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의 말씀이라도 오늘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무의미합니다. 믿음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히 3:13). 바로 오늘 지혜의 말씀을 당신의 삶에 적용합시다.
아름다운 것(20-21)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입니다. 모략과 지식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을 통해서 알 수 없는 참된 지혜를 성경이 가르쳐주며,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믿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기 위해 우리들은 항상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벧전 3:15).
적용: 지혜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당신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보너스가 무엇인지 아시죠? 국어사전을 보면 “상으로 주는 금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관청이나 회사 같은 데서 직원들의 공적 따위를 참작하여 급료와는 별도로 주는 돈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도 보너스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보너스도 좋지만 하나님께 받는 보너스가 더욱 값집니다. 세상의 보너스는 고작 물질에 국한 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보너스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 외에도 하나님을 잘 섬기면 또 다른 보너스를 예비해 주십니다.
< 설 교 >
진리의 빛으로 다시
잠 22:19-21 / 이성희 목사
지난 91회 총회 주제는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입니다.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들은 한 해 동안 이 주제를 중심으로 신앙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 부흥운동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서 부흥을 재현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도 “연동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는 목회주제를 정하였습니다.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는 것은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잠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본질적 사명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에 절대적 가치의 빛이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회도 빛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세상이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교회도 진리를 비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교회가 다시 서야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전제로 올해는 꼭 교회가 다시 진리 가운데 서서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인들이 외국을 많이 가서 실질적인 하락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기독교인만 외국을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통계가 그렇게 말한다면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체감하기도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가톨릭은 급성장했습니다. 지난해의 성장률을 보면 불교가 3.9% 성장했습니다. 천주교는 74.4% 성장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1.6% 감소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의 성장”이란 제하에 세미나를 했습니다. 왜 가톨릭은 마음을 사로잡고 성장하는데 개신교는 못합니까? 제가 볼 때는 인간적 요인보다 성경적 요인 때문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떠나 있어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성장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가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힘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형편없는 인간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입니다. 어느 교회 앞의 게시판에 이렇게 써두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악인이 아니죠? 그리고 당신은 밖에 있어도 될 정도로 선한 사람도 아니죠?” 교인 전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중립적입니다. 모든 교회가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존 스토트는 이것을 ‘교회의 이중성’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이미 거룩하며, 아직 거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거룩해졌으며 거룩해지라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성도를 선하게, 교회를 신비하게,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회개와 각성의 해, 부흥을 꾀하는 해에 먼저 교회가 다시 서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는 반드시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생명을 근거로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서야 하고, 성장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서야 하고, 성장해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신문에 난 기사가 참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미국 시애틀에 9살짜리 뇌질환성 전신마비 장애 소녀가 있습니다. 애슐리라는 소녀입니다. 이 소녀가 최근에 성장을 멈추는 ‘성장억제’ 시술을 받았습니다. 일부 의료계는 이 시술이 비인간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애슐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걷거나 말을 못하고 머리를 제대로 가눌 수도 없고 제 힘으로 구르거나 앉을 수 없는 채로 튜브를 통해 음식을 섭취합니다. 부모가 그 아이에게 붙여준 별명은 “베개 공주(Pillow Angel)”입니다. 이 아이가 6년 6개월이 되자 사춘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의 타 기관은 계속 성장하지만 지능발달에 대한 개선의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한다는 진단으로 이 아이에게 성장억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아이의 키는 134cm, 몸무게는 34kg 상태를 유지하게 한 것입니다. 일부 의료계와 일부 인사들은 ‘비열한 프랑켄슈타인식’의 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릇된 시술이라고 비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시술한 의사가 오죽 했으면 아이의 성장을 억제하였겠습니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서지 못하는 것은 생존의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스스로 설 수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완전히 생명력을 잃은 교회입니까? 교회가 생명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교회는 다시 서야합니다. 교회는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교회는 생명의 말씀이 근거입니다. 생명이 근거이므로 성장해야 하고, 서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신 한 마디에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할 때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면 병자가 일어납니다. 죽었던 자도 살아납니다. 병든 교회도 일어납니다. 죽었던 교회도 살아납니다.
어느 자료에 보면 성장하는 교회의 제일 요건은 끊임없는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적 설교라고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은 주로 강해설교를 하며 성경을 많이 가르친다고 합니다. 반면에 교회가 쇠퇴하는 신드롬은 첫째가 회의가 예배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둘째가 기독교 기관이 교회보다 더 발달한다. 셋째가 말씀을 문자보다 상징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유의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서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쇠퇴하는 갖가지 신드롬을 억제하고 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9:31에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합니다. 당신의 교회는 많은 환난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 있었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입니다.
교회는 사회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사회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진리를 지키고, 복음을 수호하는 일이라면 교회가 단호하게 나서야합니다. 머리만 깎을 것이 아니라 목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점점 교회들은 주류교단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주류교단들은 전자기술과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주역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단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소홀합니다. 개교회가 조금만 앞서가면 발목잡고, 이단 시비를 합니다. 교회들이 교단을 탈퇴하는 징조가 많이 보입니다. 교회가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교단은 좀더 탄력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변하지 않는 복음과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 위치를 지켜 바르게 서야 할 때입니다. 이런 교회는 절대 쇠퇴하거나, 침체하거나, 이름만 남아 있거나, 자취를 감추는 교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문자적으로 변하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삶은 날마다 진보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참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 옛날에 찬란하게 성장하고 칭찬을 듣던 빌라델비아 교회도 지금은 기둥만 몇 개 남아있고 교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교회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교회가 절대로 시들지 않고 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책임입니다.
둘째,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서되, 진리의 빛으로 서야 합니다. 진리가 아니면 세상을 비추지 못합니다. 진리는 참입니다. 진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 진리란 허위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참된 도리, 바른 이치,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시편 31:5에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7에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며 진리이십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거하면 진리를 압니다. 요한복음 8:31 하반절에서 32절에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7에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가 경건성을 가집니다.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가 살아있는 예배가 경건한 예배입니다. 경건한 예배는 말씀 중심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13-17에는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십니다. 전신갑주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 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옛것을 벗어버리는 회개와 새롭게 되는 변화는 진리로 새 사람을 입는 개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개인도 교회도 부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38에는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진리를 몰랐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진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설 때에 진리를 확실히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먼저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야 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거짓에서 떠나고 진리 위에 서야 세상을 비추는 등대가 됩니다.
디모데는 참 부러운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깨끗한 믿음을 이어받은 교회의 일꾼입니다. 바울이 아들같이 여기던 바울의 협력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제일 부럽습니다. 좋은 가문도 부러워할 일이고, 바울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꾼이 된 것도 부럽지만 가장 부러워할 일은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입니다.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가문이나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고 거짓이 없는 믿음,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목사도 거짓말을 하는 것 아십니까? 거짓말은 진리에서 떠난 행위입니다. 저도 거짓말을 가끔 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흔히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미명하에 별 가책 없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진리의 빛은 거짓이 없는 빛입니다. 저도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가책을 가졌습니다. “진리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거짓을 물리쳐야지”하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약속하려고 합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는 해가 되려고 합니다. 올해는 우리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해가 됩시다.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찬송가의 가사에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길이 빛나니 우리들도 등대되어 주의 사랑 비추네”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가 진리의 등대가 되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진리의 등대는 거짓을 비추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의 등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되고 새로운 부흥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결 론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공항 안에서 댁의 보청기를 주웠습니다. 그러니 고객 서비스 카운터에 와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답니다. 보청기가 없으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안경을 못 찾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안경을 벗고 있으니 안경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찾았답니다.
교회는 복음을 들려주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곳이 돼야 합니다. 귀가 있어도 못 듣고,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확실히 들려주고,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하여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자 최면 상태’라고 합니다. 이 현상은 쾌락 호르몬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라톤의 주자들이 한참을 달리다보면 최면상태처럼 되어 그냥 그 속도로 달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느끼는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어 보이지만 옳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리면 주자 최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끊임없이 세상 향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갈 수도 있고, 끊임없이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쉴 새 없이 달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 내내 신앙으로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쾌락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달려 우리 교회가 반드시 1907년을 회복하는 회개와 각성과 부흥을 이루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잠 22:17-21
최근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19의 유일한 해결 방법으로 그렇게 기다려 왔던 백신이 만들어진 소식은 바로 기쁜 소식(복음)이다. 그러나 이 백신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이를 믿지 않거나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은 자신의 자유이다.
오늘의 말씀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도록 들려주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려 하여 오늘 특별히 알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즉 오늘은 복음을 전하는 시간인 것이다.
먼저 돌아볼 것은 코로나19는 걸리면 사망률이 2% 내외이며, 다양한 종류의 백신들이 만들어 졌지만 항체 생성률이 약 60%에서 90%라고 하며, 또한 2회씩 맞아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전해주는 이 복음은 죄에 대한 복음으로서 죄가 들어오면 100% 사망이고, 또한 전해주는 복음을 믿으면 100% 생명을 얻고, 또한 단번에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코로나에 대한 여러 소식들은 잘 믿으면서도 죄에 대한 복음은 잘 믿지를 않는다. 오늘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죄(원죄, 선악과의 열매, 고범죄 등) 대하여 교제를 나누어 완전히 이해하는 것에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우리들 자신이 변명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면 분명히 자신이 어떠한 자인가를 깨닫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죄인의 상태는 ". .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라..."(롬1:19-23)라고 하셨고, 그러한 자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모든 물의,추악,탐욕..시기..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자랑하는 자요.."(롬1:26-32)라고 말씀 하신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큼 악한 죄를 범하지는 않고, 그렇게 까지 죄를 범하지도 않고 오히려 선하게 살았다고 주장도 할 수 있지만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고 있다면 자신이 그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하신다(롬2:1), 또한 아무리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그 많은 율법 중에 하나라도 범하면 결국 모두 범한 것과 같다고 하신다(약2:10-11).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다고 하시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죄인이다라고 하신다(롬3:9-18,23).
그리고 그러한 죄의 결과(삯)는 사망이라고 하신다(롬6:23). 또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여기서 죄의 삯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겪는 그 죽음이 아니고 모두 겪는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고 나서의 죽음이다. ".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21:13,14), ". .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즉 복음을 믿지 않고 죄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은 100% 결국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믿으면 100% 생명을 단번에 얻고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듣는 자가 믿든지 안 믿든지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모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셔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세상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다(요1:2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오늘은 이렇게 복음 말씀을 전해주는 특별한 날이다. 이렇게 말로써 전해주다가 보면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혹은 잘 못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기록하여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며, 그 말씀을 듣거나 읽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도 하신다(딤후3:15-17). 물론 믿지 않으려 하거나, 못 믿겠다. 자기들끼리 정하여 만들어 놓은 이야기라고 하며 무시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믿는다. 그러므로 부모보다는 혹은 정말로 중요하고 나를 위한 말보다는 친구나 연인들의 말을 잘 듣고 믿는다. 당신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즉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하나님의 당신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증거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들(요일2:15-16)을 사랑하므로 세상의 말을 더 잘 듣고 믿는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전해주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전하는 자가 무엇을 전하려 하는지 그 핵심에 마음을 두지 않고 교회 분위기, 교파, 복음을 전하는 자의 어투 등에 마음을 두면 실제로 전해지는 복음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복음을 안 믿으려고 애를 쓰는 경우도 있다.
이제 복음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미 당신은 죄인으로 태어남으로 아예 존재자체가 죄를 범하고 있으며, 결국 그 죄의 값으로 죽어서 둘째 사망의 불못에 던져질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기 까지 하셔서, 당신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그 사망을 이기셨다는 것이며, 이를 믿으면(롬10:8-10) 당신의 죄도 영원히 사해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다.
오늘 특별히 당신에게 이를 알게 하교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심으로 이를 알고 믿도록 하신다(요20:21,요일5:13, 고전15:2-4)(여기 말씀들을 직접 찾아서 읽고 묵상해보길 원한다).
유명한 극작가인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쓰였다고 한다.
선택을 복되게 하십시오!
잠 22:17~21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많은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선택만큼 우리에게 어렵고 힘든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 선택은 항상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지도록 요구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늘 최선의 선택을 위해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의 중요한 선택의 기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명예로운 길을 가십시오(1절).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재물에 두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학교, 대학, 직장, 사업까지 모든 조건들을 재물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는 이유도 학문적 업적과 지식의 습득보다는 출세를 통해 많은 재물을 얻는 것이 목적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물질은 우리를 편리하게는 해 줄지 몰라도 결코 우리 인생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물질은 인간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의 필요요소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명예를 택하라고 지혜자는 우리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명예는 말 그대로 이름입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명예를 얻는 다는 말은 공의를 행하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여 이웃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온전한 관계 안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 악에 대하여 저항하고 선한 일을 추구하는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8~9절).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보응을 철저히 받게 된다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악하게 하면 그 악한 행위로 내 앞길에 장애를 만나게 되고 선을 행하고 베풀면 그로 인하여 선한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를 따라 보응하십니다. 그러므로 선을 심고 가꾸십시오. 베풀기는 남에게 베풀었지만 결국 그 열매는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웃에게 강퍅하게 대하고 남을 멸시하거나 조롱하면 언젠가는 자신도 남의 조롱거리가 되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은 사람은 이 상처를 오래 기억하기 때문에 기회만 나면 자신의 수치를 만회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잠언 23장 6절에 “선한 눈과 악한 눈”에 관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22장 4절에는 선한 눈을 가진 인생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은 “재물과 영생과 생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제물도 얻고 영생도 얻고 생명도 얻는 축복만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축복을 얻기 위해 선한 눈을 가지시고 겸손하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이 불의하여도 의로운 삶을 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22절). 의로운 자는 천국을 상속받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담의 잘못된 선택 이후로 인간의 삶이나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정의보다도 불의가 더 판을 치는 곳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보듯이 세상은 악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고 득세하며 세상의 힘을 쥐고 있는 현실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적극적으로 그 가운데에서도 의의 수호자가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대저 의인에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는 시편 1편의 가르침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의의 최후의 승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자 만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을 마칩니다. 선택은 두 번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마음으로 결정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과정은 몸으로 하는 선택입니다. 이 두 번째 선택을 결단 혹은 헌신이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의 선택만으로는 기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의 선택에서 기능이 발휘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첫 번째 선택을 하고서도 두 번째 선택의 관문에 못 미처 방황하기 쉽습니다. 거기에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우리의 인생은 소모되고 삶의 기능은 마비되고 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두 가지의 올바른(완전한) 선택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복되게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잠 22:17-29
22:17-24:22은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잠언들로, 두 절로 된 잠언들 그리고 명령형으로 표현된 권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17-21절 지혜 교사의 서른 개 잠언(22:22-24:22)의 서론입니다. 지혜교사는 이 지혜의 말씀들을 마음에 보존하고 말과 행동에 적용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 역시 이 특별한 말씀을 스승으로 삼은 제자로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을 남은 한 해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단장하여 의문으로 물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이 어떤 진리의 말씀들을 증언했는지 물으실 때 회답할 수 있습니까?
22,23절 강자에게는 머리를 조아리지만, 만만한 약자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세상의 처세술을 거스르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문은 재판이 이뤄지던 장소이므로, 억울한 이들이 부르짖을 통로가 되어야 할 법과 제도조차 권력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찾아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에 나는 어떤 삶의 모습으로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24,25절 늘 부정적이고 쉽게 화를 내며 불평만 하는 사람을 멀리 하십시오.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고 깨달을 줄 모르고, 모든 것이 자가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부정적인 말과 행동에 익숙해지진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26,27절 사람 사이의 신뢰를 보증으로 증명하라는 요구 자체를 거절해야 합니다. 인정과 체면 때문에 내 수준과 여력을 넘어서는 일에 개입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며, 대가 없이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선을 넘는 것은 자기 과신이자 교만입니다. 보증 부탁을 받았거든 상황을 좀 더 멀리 보고, 나와 빚진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28,29절 이스라엘에서 지계석은 하나님이 공평하게 분배하신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입니다. 그것을 옮기는 것은 이웃의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비교우위에 서야 행복이라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지계석 옮기기에 동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재능을 부러워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말고, 내 인생의 참 경영자이신 하나님께 인정받는 능숙한 종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매일성경, 2021.05/06, p.130-131, 재물과 사귐, 잠언 22:17-29에서 인용).
①22:17-24:22은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잠언들로, 두 절로 된 잠언들 그리고 명령형으로 표현된 권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지혜 교사의 서른 개 잠언(22:22-24:22)의 서론입니다. 지혜교사는 이 지혜의 말씀들을 마음에 보존하고 말과 행동에 적용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 역시 이 특별한 말씀을 스승으로 삼은 제자로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을 남은 한 해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단장하여 의문으로 물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이 어떤 진리의 말씀들을 증언했는지 물으실 때 회답할 수 있습니까?
② 강자에게는 머리를 조아리지만, 만만한 약자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세상의 처세술을 거스르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문은 재판이 이뤄지던 장소이므로, 억울한 이들이 부르짖을 통로가 되어야 할 법과 제도조차 권력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찾아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에 나는 어떤 삶의 모습으로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③ 늘 부정적이고 쉽게 화를 내며 불평만 하는 사람을 멀리 하십시오.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고 깨달을 줄 모르고, 모든 것이 자가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부정적인 말과 행동에 익숙해지진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④ 사람 사이의 신뢰를 보증으로 증명하라는 요구 자체를 거절해야 합니다. 인정과 체면 때문에 내 수준과 여력을 넘어서는 일에 개입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며, 대가 없이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선을 넘는 것은 자기 과신이자 교만입니다. 보증 부탁을 받았거든 상황을 좀 더 멀리 보고, 나와 빚진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⑤ 이스라엘에서 지계석은 하나님이 공평하게 분배하신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입니다. 그것을 옮기는 것은 이웃의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비교우위에 서야 행복이라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지계석 옮기기에 동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재능을 부러워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말고, 내 인생의 참 경영자이신 하나님께 인정받는 능숙한 종이 되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