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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과 숭고를 잃어버린 세계
예술은 죽었다
무의미의 미학-다다이즘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어났던 다다이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다다이즘은 무척 중요한 문예운동인데,
그것은 다다이즘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중간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 다다이즘은 모더니즘에 속하지만
다다이즘 안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한 것은
다다이즘 선언이 있은 지, 40년 뒤인 1960년대의 일입니다.
실재는 아니더라도 그 자체에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피카소
모더니즘은 인식의 한계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실재를 파악하려 하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실재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인간의 인식은 상대적이고 자의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재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플라톤 이후 내려오던 예술인
실재의 재현(모방)이라는 전통적인 예술관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들은 인식의 한계를 인정할망정
실재 자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재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숭고(Sublime)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모더니스트들은 자신이 표현한 것이 실재는 아니더라도
그 자체 안에서 완벽한 논리적 구조를 지니기를 원했습니다.
모더니스트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통일성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기하학적 형태 피카소
예를 들어,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을 봅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그림 속에서 대상을 재현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모든 형태들을
몇 가지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시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형식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작품안에서 형식적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한 피카소의 작품
그러나 다다이즘은
작품 안에 완결된 형식이나 논리를 보여주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마저 포기합니다.
다다이즘은 숭고를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예술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숭고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논리보다는 무의미가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
다다이즘의 이러한 어린 아이 같은 반항은 세계 1차 대전이라는 시대가 낳은 산물이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반항 다다이즘
세계 1차 대전은 유럽인에게 그들의 문명이 재앙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을 열었던 미래주의는
20세기의 기계 문명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기계 문명은 그들을 낙원으로 인도해주기는커녕
이제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대량 학살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사실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기관총, 독가스, 탱크와 비행기 같은 대량 학살 무기가 등장합니다.
1914년 일어났던 1차 세계 대전은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세계 대전은 한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세계 곳곳이 전선(戰線)이 되었던 전쟁을 뜻합니다.
유럽은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갈라져 싸웠습니다.
동맹국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 투르크(터키), 불가리아가 있었고
연합국에는 세르비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벨기에, 루마니아, 이탈리아,
일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포르투갈, 그리스, 미국이 있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을 황폐화시켰고 850만의 사망자, 2100만의 부상자,
거의 8백만 명의 전쟁포로와 실종자를 만들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이 정도 규모의 파괴력을 보인 전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이 전쟁이 추악한 것은 이 전쟁은 오로지 식민지 경쟁이라는
제국주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식민정책을 지키려는
왕과 관료와 자본가들을 위해 죽어갔던 것입니다.
▲ 영화 무기여 잘 있거라
http://tbn0.google.com/images?q=tbn:cbQXjbv_7c4zCM:http://www.leninimport!s.com/gary_cooper_farewell_shop_dvd.jpg
1929년 헤밍웨이는
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내놓습니다.
그 소설이 바로 ‘무기여 잘 있거라’ 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헨리 프레드릭입니다.
헨리는 미국인이지만 이탈리아에서 건축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1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언제나 일선에서 뛰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이탈리아 군에 입대합니다.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투에 참여한 그는 참호에 떨어진 포탄으로 다리를 다칩니다.
후방의 병원에 입원한 그는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캐서린 바아클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얼마 후 캐서린은 그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는 야전 병원에서 일할 수 없었고 헨리 곁에
머물고 싶었던 캐서린은 결혼을 미룹니다.
전방으로 간 헨리 중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신이 이상해진 군의관 리날디 소령이었습니다.
그는 계속 헛소리를 했는데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상부에 명령에 따라
부상병을 두고 퇴각했다는 것에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병들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리날디를 독일첩자로 의심해 체포합니다.
리날리를 변호하던 헨리 역시 독일첩자로 체포됩니다.
리날리는 간첩혐의로 총살당하고 그것을 목격한 헨리는 군사 재판소에서 탈출합니다.
간신히 캐서린을 만난 헨리는 보트를 타고 스위스로 탈출합니다.
전쟁에 환멸을 느낀 그들은 전쟁을 잊고 그곳에서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미려고 합니다.
스위스에 도착한 헨리와 케서린은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캐서린은 생각지도 않았던 난산을 겪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죽고 아이도 사산되고 맙니다.
헨리는 캐서린이 죽은 병원을 뒤로하고 비를 맞으면서 쓸쓸하게
호텔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 소설을 끝이 납니다.
1차대전이라는 시대가 낳은 산물 다다이즘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국가는 사람들에게 대의(大義)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가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날아오는 포탄과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가 여기서 죽어야 하는가?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서 두고서야 자신들을 전쟁터로 몰고 온
저 대의
(애국심으로 제국주의, 위선적인 부르주아지의 가치관, 탐욕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
가 허구였음을 깨닫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폭군을 몰아내는 전쟁도 아니었고
자신의 생활터전을 지키려는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고
그래서 이긴다고 해도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갔지만 사실 그것은 무의미한 죽음이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그들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명분도 제공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명에 강한 불만 다다이즘
소설 속에 헨리와 캐서린처럼,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무의미한 전쟁에
진저리 치면서 중립국 스위스에 도망쳐 나왔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의 취리히는
유럽에서 온 수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망명지였습니다.
그들은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낳았던
그들의 문명에 대해 강한 불신을 품고 있었습니다.
다다이즘은
취리히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문예 운동이었습니다.
기이한 표현 다다이즘
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위고 발이
취리히에 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합니다.
카바레 볼테르는 다다이즘이 태어난 성지(聖地)입니다.
이 카바레 볼테르에서는 밤마다 기묘한 해프닝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모인 예술가들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낭독하거나
종을 요란스럽게 울리거나 북을 마구 쳐대며 괴성을 질러대는 기행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의 이러한 기행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기행은 기행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다이즘이라는 새로운 문예운동을 낳습니다.
▲ 다다 선언을 이끌었던 트라스탄 짜라, Delaunay 作
http://personal.telefonica.terra.es/web/robertdelaunay/imagenes/tristantzara.jpg
1916년 7월 14일 카바레 볼테르 에서,
네델란드 위고 발 (Hugo Ball), 루마니아 트리스탄 짜라(Tristan Tzara),
독일 한스 아르프 (Hans Arp), 독일 리차드 휠젠버크 (Richard Huelsenbeck),
에미 헤닝스 (Emmy Hennings), 마르셀 얀코 (Marcel Janco), 소피 타우버 (Sophie Tauber)
같은 예술가들이 최초로 다다선언을 합니다.
다다라는 말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들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다다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다선언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기존의 모든 가치와 예술 형식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비합리적이고 반도덕적이며 반예술적인 미학을 선포합니다.
그들의 대표였던 트라스탄 짜라의 말을 들어보죠.
“다다의 등장은 예술의 등장이 아니라 혐오의 등장이다.
3000년 전부터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온
(그게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철학자들의 화려함에 대한 혐오,
이 지상에서 신을 대변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혐오,
정열에 대한 혐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방향으로 쏠린
현실적이며 병적인 악의에 대한 혐오,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본능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촉진하는 독재와 속박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혐오,
분류된 모든 카테고리에 대한 혐오,
그 배후의 황금, 자만심, 질병에 관심을 찾아보아야 하는 가짜 예언자들에 대한 혐오
(어찌하여 녹색보다 빨강, 오른편보다 왼편, 작은 것보다 큰 것이 존중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위선자의 변증법,
빈약한 머리 속에 뿌리도 밑도 없이 음험하고 엉뚱한 관념을 삽입하려는 변증법,
이 모든 것을 맹적인 작태와 돌팔이 의사 같은 감언이설로 행하는 변증법에 대한 혐오.”
트라스탄 짜라가 말한 대로,
다다이즘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다다이즘의 전략은 냉소와 조롱, 빈정거림과 무관심이었습니다.
그것이 다다이즘 예술의 유일한 공통점입니다.
다다이즘은 의미와 형식을 거부하는 예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다이즘은 작품 안에서
논리의 완결성이나 형식상의 통일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예술을 반대하는 예술운동을 한 뒤샹의 모나리자 수염
post-modernism
반면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모더니즘은
재현을 포기할망정 작품 안에서 논리의 완결성과 형식상의 통일성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 완결성을 요구한다면,
다다이즘은 예술을 반대하는 예술 운동인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다이즘은 그 전의 모더니즘 운동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확실히 다다이즘은 모더니즘 미학을 벗어난 예술 운동이었습니다.
다다이즘으로부터 모더니즘을 벗어난 (post-modernism)
예술 운동들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스위스의 취리히는 1차 세계 대전을 피해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가 모여든 망명지였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뉴욕도 취리히와 비슷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알프스 산을 넘는 대신, 대서양을 건넜기 때문이다.
1915년 뉴욕에서는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출신의 예술가가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다다이즘의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뒤샹이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출품한
‘샘(Fountain)’ 이라는 작품입니다.
"나는 변기를 들어
현대 미술의 면상에 집어 던졌다."
- 뒤샹 -
▲ 샘(Fountain), 뒤샹 作
http://www.acsu.buffalo.edu/~jconte/Images/Duchamp_Fountain.jpg
이 작품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소변기였습니다.
단지 이 소변기가 공중화장실에 달린 소변기와 달랐던 것은
이 소변기에는 'R. Mutt'(얼간이)라고 서명이 되어 있다는 점뿐이었죠.
과연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소변기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뒤샹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이것(소변기)에 (예술가가) 서명을 하고 이것을 미술관 벽에 건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에 소변을 볼 수 없게 만든다면,
이것은 예술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리 예술가가 사인을 했다고 해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에는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이나 유일성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량 생산된 상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샹은 대량생산된 상품과 예술품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립니다.
이제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이 경계가 모호해져 갑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한데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구별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것이 다다이즘의 입장인 셈이죠.
상품과 예술품의 차이를 없애버린 뒤샹의 자전거 바퀴
출처 : http://my.dreamwiz.com/mijk
1914년에 시작되었던 1차 세계 대전은 1918년에 끝납니다.
스위스 취리히에 모였던 망명자들과 미국 뉴욕에 머물렀던 망명자들은
이제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망명자들의 예술 운동이었던 다다이즘은 망명자들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망명자들이 조국으로 돌아감으로써, 다다이즘이 유럽각지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다다선언을 했던 예술가들은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다다이즘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고향인 독일로 돌아간 리차드 휠젠버크 와 한스 아르프 는
독일에서 다다이즘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카바레 볼테르의 주인 위고 발 이 다다이즘 운동을 선도했다.
루마니아 출신인 짜라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를 돌며 예술가들에 다다이즘을 전파했다.
뒤샹도 뉴욕에서 파리로 돌아와 자신의 작품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위고 발
[후고 발, 1916년 카바레 볼테르에서 음성시를 낭송하는 장면]
카바레 볼테르의 주인이었던 후고 발이 음성시를 연주하는 장면입니다.
음성시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별한 의미도 없이 단어들을 운율만 맞추어 나열한 시입니다.
그런데 발의 복장이 아주 특이하지요?
그의 일기에 따르면 그가 이 공연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복장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후고 발이 발표한 시 중 하나입니다.
Ich liebte nicht die Totenkopfhusaren,
Und nicht die Moerser mit der Maedchennamen,
Und als am End die grossen Tage kamen,
Da bin dich unauffaellig weggefahren.
해골 바가지의 경기병도
소녀 이름 박힌 구포도 모두 싫도다.
찬란한 그날이 오면
살그머니 집으로 돌아가리라.
문예사조사에서 볼 때,
다다이즘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가는 징검다리입니다.
20세기 초기 모더니즘은 재현을 포기했지만,
재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실재(신이나 진선미)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런 숭고한 것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다이즘은 실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런 숭고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진선미 같은 숭고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봅니다.
우리는 실재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실재에 대해 어떤 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허위일 뿐입니다.
거짓을 말할 바에는 차라리 침묵하라,
이것이 다다이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입니다.
다다이즘 이후,
서유럽과 미국의 예술은
(소비에트와 동유럽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지하기 때문에 제외됩니다)
의 실재에 대해 침묵합니다.
이제 예술은 실재를 재현하지도 실재가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예술은 실재가 아닌 자기 안에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다이즘 이후의 예술가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합니다.
다다이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끊임없는 유희로 바꿉니다.
신은 죽었고 진리도 선악도 아름다움도 알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어떤 것에도 진지해지지 않고 어떤 것에도 책임지지 않고
얼음판을 미끄러지듯, 가볍게 가볍게 스쳐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발화(發話, articulation) 입니다.
삶은 침묵 속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삶이 어떻게든 계속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과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열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일까요?
1차 세계 대전 중에 시작되어 다다이즘 운동은 10년도 못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다다이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문예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그들은 실재를 모방하는 대신, 실재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대신,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이미지들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모방하거나 표현할 대상 없이는
예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늦게나마 인정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다다이즘에 대한 이야기를 접고
다음 시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그럼 모두들 다음주 이 시간까지 평안하시길…….
ⓒ dailyseop 2007-07-13
[출처] 류가미의 문예기행(33) 1차 세계 대전과 숭고를 잃어버린 세계
다다이즘
'다다'라는 어원은 프랑스어로 '목마' 또는 '장난감 말' ,
독일어로는 '출산의 기쁨', '유모차', '바보스런 순진함' 의 의미를 지녔다.
다다는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온 유럽을 급속히 전염시켰고
결국 현대미술에 흐름까지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는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시작 되었건
결국 전쟁을 야기하는 하나의 보조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아주 나쁜 문명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갖도록 한 것이다.
다다는 미래주의(futurismo:이태리)와 함께
20세기 초반의 가장 강력한 문예 운동이었다.
전통을 거부하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미래주의가 산업혁명에 따른 과학과 과학기술을 찬양하는 것과는 반대로
다다이즘은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래주의가 전쟁을 긍정한 반면
다다는 전쟁을 반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행태라고 하며 격렬히 반대 했다.
다다는 이성과 합리에 대한 다른 의미를 지향 했으며
부정과 파괴, 다시 말해 '반예술'의 태도로 우연에 의거한 작업 태도를 보였다.
특유의 유머가 있었고 오브제(object)를 사용하여 기성관념을 부정함으로써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독일
1) 베를린 다다
-다다 그룹중에서 정치적 성향을 가장 강하게 띤 것으로
다다를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져서
좌익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반예술활동을 정치선전 활동에 결부시켰다.
-1918년 리하르트 휄젠벡 에 의해 결성되며 그와 그의 동료
그로츠, 하트필트 등은 사회적 이상론을 가지고 세계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다른 다다운동과 마찬가지도 격렬하게 기존의 미술사회를 공격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전시회뿐 아니라 부조리시를 낭송하고 정치적 토론을 벌이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로츠는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부정에 대한 적대감, 전반적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을 만화기법으로 통해
강한 시각적 효과로 나타내었으며 하트필트와 협력하여 꼴라주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이들의 꼴라주에는 사진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트필트가 이를 포토몽타주라 하였다.
포토몽타주는 사진을 선동의 도구로 사용한 것인데,
병치되고 중첩된 형상들은 명확한 사실성을 가지기 때문에
정치적 선동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 할 수 있다.
2) 하노버 다다
- 쿠르트 슈비터스
-1918년에 최초의 메르츠 회화들을 전시했는데 이는 전통적 재료들을 포기하고
오물더미, 쓰레기통, 길거리·개천에서 수집한 온갖 종류의 폐품
(버스표, 병마개, 신문조각, 걸레, 단추, 옷감)으로 대체하여 미적 작품을 만들었다.
-기존 사물을 차용하는 방법을 통해 예술·삶을 결합하고자 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미학을 창조하였으며 우연에 근거를 둔 폐품꼴라주를 통해
예술작품의 표현적 잠재력을 실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