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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 5 보내신 이에게 가는데 - 요 16: 9 죄에 대하여
2. 성령의 의무 ( 16: 5 – 15 )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 16: 5 보내신 이에게 가는데 -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
예수께서는 가시는 목적지가 있었다. 자신을 보내주신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것이다. 오히려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마 8: 20,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셨다.
1] 지금
예수가 7: 33에서 '조금 더 있다가'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직 하던 일이 남아 있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지금'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제자들에게 암시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지금(nu'n 뉜) "현재"를 말하는데 요 7: 33, "조금 더 있다가"의 표현은 하실 일이 남아 있었음을 말하는데 본 절에서는 그 모든 일이 마쳐진 상태에서 떠나가실 것을 말씀하신다.
2]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여기서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고'(*)는 14: 2에서 '가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떠나 가다'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그런데 예수는 목적지가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집'을 향해 가시는 것으로(14: 2), 본 절에서는 자신을 '보내신 이' 곧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보내신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이 땅에 사명을 받고 오셨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간다'라는 표현은 그 사명을 다 이루시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감을 가리킨다.
3]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이 말은 13: 36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말한 베드로의 질문과 14: 5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도마의 질문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문의 "묻다"ejrwtavw(에로타오)가 현재시재로 사용되어 과거가 아닌 지금 묻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본문에서 '묻다'라는 용어가 부정 과거 형태인 '에로테세'(*)로 쓰였다면 그 의미는 묻는 자가 과거에도 없었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요한은 이러한 모순을 피하려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예수가 말씀하고 계신 그 시점을 강조한다.
즉 예수는 자신의 교훈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들의 문제에만 집착하여 예수님의 가시는 길(십자가, 죄 사함,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다.
요 16: 6 너희 마음에 근심이 -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말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했다.
1] 도리어
"도리어"(ajlla 알라)는 부정문으로 제자들에게 근심과 염려를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고난과 핍박만을 생각한다면 염려가 크겠지만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생각한다면 기쁨이 넘칠 수 있었다.
* 요 15: 11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2]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1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본 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신다.
이 책망은 제자들의 영적 무분별과 관련이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 요 15: 11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근심이 가득찼다. 그들이 예수가 떠나시는 목적과 의도를 명백하게 이해했다면 슬픔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
* 요 14: 18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6: 7 실상을 말하노니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러해야 보혜사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실상'(*, 해 알레데이아)이란 말은 단순히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실 자체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상"으로 번역한 (ajlhvqeia 알레데이아)는 "진리, 참되다, 사실"의 의미로 본문에서도 "진리 또는 참"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 롬 9: 1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그러나 이 말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 도다'(8: 45)라고 책망하실 때 사용하신 '진리'와 같은 용어이다.
개역 성경은 본 구절에서 '알레데이아'의 의미를 약화시켜 번역하여 본 절 전체의 의미도 약화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실상'보다 '진리'로 번역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진리를 펼쳐 보이시겠다는 강화된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예수의 떠나심은 세상에 오심과 같은 유익을 제자들에게 준다. 여기서 '유익하다'(*, 쉼페레이)라는 말은
(1) 유익의 근거와
(2) 유익하게 되는 대상 없이는 매우 막연한 의미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은 죽으심과 부활, 승천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주실 보혜사 성령이 있기에 유익한 것이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를 돕기 위한 영으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신'과는 구분되어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본 절 하반절에서 이 두 가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2]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유익의 근거이며 '너희'는 유익하게 되는 대상을 지칭한다.
보혜사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을 얻기 전에는 오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신 후 성부께 가기 전에는 결코 오시지 않는다.
3]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주께서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리우시면 그는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실 것이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일이요 예수께서 영으로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다.
요 16: 8 세상을 책망 -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성령의 사역 가운데 하나인 "책망"(ejlevgxei 엘렝크세이)은 "훈계, 꾸짖다, 죄를 깨닫게 하다"에 대해서 언급하신다.
이 단어는 미래형으로 앞으로 역사 하실 성령을 말한다(행 2장 이후).
성령은 우리가 죄를 깨닫게 하셔서 궁극적으로 회개를 도우며 잘못된 생각들을 늘 바로잡아 주신다.
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본 절에서부터 예수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 설명하신다. 성령께서는 오셔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깨우치실 것이다.
성령께서 죄에 대해 깨우치시는 것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성령께서 의에 대해 세상을 깨우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셨던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셨고 또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께서 심판에 대해 세상을 깨우치시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으로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4: 26에서는 성령의 가르치며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본 절부터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14: 26의 대상은 제자들이지만 본 절에서의 대상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게 된다. 여기서 '책망하시리라'로 번역된 '엘렝크세이'(*)는 '엘렝코'(*)의 미래형이다.
'엘렝코'는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잘못을 꾸짖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행 2: 36-37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과 같이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convict)을 의미한다.
* 행 2: 36-37 –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 '어떤 잘못에 대해 꾸짖는 것'(reprove)을 의미한다(KJV).
(3) '세상의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J. Knox).
(4) '허물을 드러내는 것'(NIV 난외주) 또는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는 것'(Jerusalem Bible)을 의미한다.
(5)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공동번역).
이처럼 제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시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드러내는 사역에 의해 세상 중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판단은 단호하다. 그러나 성령의 단호함이 곧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폭로함으로 그리스도의 죄 없음을 증거하고,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의를 선포하며,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심판에 처해졌음을 드러내신다.
요 16: 9 죄에 대하여 -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죄"(aJmartiva 하말티아)는 "과녁을 못 맞히는 것" 빗나간 화살을 뜻하는 용어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잘못된 생각을 말한다.
* 요 15: 22 -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세상에서의 죄란 사람의 실수, 악덕, 만행을 죄로 생각하지만 제일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 롬 1: 18, 21, 25, 28 –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1]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죄'(*, 하마르티아)는 '빗나감', '악행', '위범' 등의 의미를 지니지만, 원래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예수에 대한 불신앙으로 국한되고 있다.
성령께서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것이다.
이는 15: 22, 24에서 예수에 의하여 명백히 선포되었다. 그들은 직접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으며, 예수를 보았지만, 메시아로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워했다.
* 요 1: 11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결국 자기들의 메시야를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워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죽게 했다.
* 요 15: 25 -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그들의 죄를 성령이 드러내신다. 이는 15: 26에서 말씀하신 성령의 증거 사역과 일맥상통한다.
(2) 예수를 보지 못한 세상의 죄에 대한 것이다.
성령 강림 후 복음이 세계 각처에 전파되는데 성령은 그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죄인임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자신을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 요 1: 12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리라(3: 18)고 말씀하셨다. 또 8: 24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의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믿지 않는 자의 죄와 그에 따른 사망에 대해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각 사람의 양심에 빛을 비추심으로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셔서 죄에서 돌아서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도우신다. 이것이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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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움켜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꽃이고 열매라고 합니다.
오늘도 꽃피고 열매 맺는 행복한 하루 힘차게 만들어 가시길 기원 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