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 장군 탄생- 난중일기와 징비록
남원발전연구포럼 감사 서호련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날은 1545년 음력 3월 8일 이다. 이 날을 양력(4월 28)으로 고쳐서 장군의 나라 사랑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일이다.
지금으로부터 470년 전 오늘, 4월 28일(음력 3월 8일). 이정의 셋째아들로 서울 남촌 건천동(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이정의 아버지, 그러니까 순신의 할아버지는 466년 전 기묘사화 때 초야에 묻혔던 이백록이다.) 어린 시절은 낙향한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향 아산에서 보냈다. 보성군수로 있던 장인 방진의 권유로 32세 때인 1576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때 순신의 개구쟁이 친구로서 세 살 위인 유성룡은 고향이 안동이었지만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남촌에서 살면서 순신과 공부를 같이 했다. 그 역시 당당히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까지 올랐고 임진왜란 땐 임금을 도와 이순신과 함께 공을 세운자다. 순신의 아버지는 순신에게, 힘이 세고 용기만 갖춘 용장보다는 지혜로운 지장이, 지장보다는 용기와 지혜와 덕을 갖춘 덕장이 되도록 격려하였다.
이순신의 첫 발령지는 함경북도 동구비보였고 직급은 권관이었다. 권관은 종 9품으로 가장 말단 벼슬이었다. 동구비는 우리나라 최북단의 험준한 산골이고 이 동구비에 있는 작은 토성이 ‘보’이고 그가 이곳의 파견 대장이었다. 그는 최전방 오합지졸에 불과한 병사들을 훈련시켜 군기를 잡았고, 무기를 고치고 진지를 보수하여 경계태세를 튼튼히 했다. 그래서 오랑캐도 침입하지 못했고, 백성들은 마음을 놓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함경도감찰사 이후백의 국경지대 순시가 있었다. 이후백의 별명은 ‘곤장 감사’였다. 어떻게 트집을 잡아서라도 지휘관인 권관들의 곤장을 쳐야 직성이 풀리는 감찰사였다. 드디어 위풍당당한 이후백 감사가 부하 군관들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동구비보의 고참 병사들은 언제쯤 이순신이 곤장을 맞을까 가슴 졸이고 있었지만 이후백의 생각은 달랐다. “불과 몇 달 만에 어떻게 이러한 진지구축, 군량미 비축, 무기 등을 완비했을까?” 이윽고 이 감사는 입을 열었다.
“오늘 이 동구비보를 샅샅이 조사해 봤으나 허술한 곳은 전혀 없었다. 부임한지 반년도 안 된 이 권관이 어떠한 위인인가를 알 수 있었고, 그를 받드는 여러 병사들의 군기 또한 가상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 책임을 다한 이 권관과 여러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고기와 술을 상으로 내리노라.”
동구비보에서 3년만인 35세 때 종 8품으로 한 계급 승진하여 한양 훈련원 봉사로 전근되었고, 이곳에서 군사훈련과 병서를 강습하였다. 이때 직속상관인 ‘서익’이라는 병부량의 인사청탁을 거절하여 2년인 임기 중 불과 여덟달 만에 충청도 병사의 군관으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다음해 6월에 전라 발포수군 만호가 되었다.
이것은 이순신이 삼군수군통제사가 되어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던 수군생활의 시작인 셈이다. 하늘은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순신을 수군이 되게 하셨는지 모르겠다. 발포는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하면 내발리이고 수군만호라면 지금의 해안 경비대장 격이다. 비록 조그마한 포구인 발포에서의 생활이었지만 독립된 부대를 맡아 지휘하게 되어 즐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순신의 성품이 워낙 맑고 깨끗한데다 강직했기 때문에 시기하는 상관들이 적지 않았다. 그의 청렴이 권세와 재물을 탐하는 권세가에게는 말 못할 걸림돌이었다. 순신은 발포만호로 부임한 이래 무기와 배를 고치고, 수군에 대한 병서를 읽고 해전에 관한 전술을 연구하는 한편 바다의 조수흐름을 연구하며 병사들을 훈련시켜 전라도 수군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정예부대를 만들었다.
어느 날 이순신이 소속된 전라좌수사 ‘성박‘ 수사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발포진영 뜰 안에 큰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그것을 베어 병사들 편에 보내라는 것이었다. 거문고를 만든다는 것이다. 진영 안에 있는 오동나무는 분명 나라의 것인데 전라좌수사란 사람이 만호에게 그런 명령이나 한다는 게 한심해 보였다. 그래서 ’성박‘ 수사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비록 만호라는 보잘 것 없는 직책이기는 하오나, 저는 나라의 은혜와 급료로 살아가는 군인입니다. 어찌
나라의 물건을 하잘 것 없는 제 직책으로서 마음대로 벨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받은 성박은 분노하며 이
를 갈았다.
임기 3년을 마치고 39세 7월에 함경도 병사 이용의 부하가 되었다. 1월에 권원보 권관이 되어 오랑캐 을지
내의 침입을 막고, 11월에 부친이 돌아가셔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3년 만에 상복을 벗고 사복시 주부가 되
었다가 곧 조산보 만호(종4품)가 되었다. 43세 되던 8월에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여 침입하는 오랑캐들을
무찔렀으나 절도사 ‘이일‘에게 모함을 받아 조정의 명으로 백의종군을 하였다. 이것이 이순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이순신은 가족이 있는 서울로 내려왔다. 억울하게 내쫓기고 보니 속이 상했지만 “소인배들과 다투면 뭘 하
겠소? 내가 옳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면 되는 거지. 언젠가는 누명이 벗겨질 것이오!"
하면서 아내를 위로하였다. 당시 조카뻘이 되는 율곡 ’이이‘는 요즈음 내무부장관 격인 이조판서로 있었고, 어려서부터 단짝인 ’유성룡‘은 임금의 잘못을 고치도록 권하는 사간원의 대사간이었지만 단 한 차례 자신의 복직에 대하여 부탁한 일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년 되는 해인 1792년 정조임금은 장군을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추증은(追贈)은 나라에 공로가 큰 관리에게 죽은 뒤에 관직의 등급을 울려주는 것을 말한다. 정조임금은 이순신장군의 노고를 위로하려는 의미로 영의정이라는 최고 관직을 내렸던 것이다. 충무공이란 시호(諡號)는 장군이 세상을 떠난 45년 뒤인 1643년 인조 임금 때 내린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의 문신인 윤행임과 유득공을 불러 ‘ 그분의 삶과 업적을 기록하고 그분이 남긴 글들을 모아 책으로 발간케 하였다. 작업을 시작한 지 3년만인 1795년에 14권 8책에 이르는 전집을 편찬했는데, 이를 ’ 이충무공 전서‘라 한다. 이 전집엔 장군이 손수 쓴 일기가 실려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월 1일부터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으로 치른 노량 해전을 앞둔 1598년 11월 17일 까지의 기록이다. 장군은 자신이 쓴 일기를 연도별로 묶어서 그 겉장에 ’임진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등의 제목을 붙였다.
장군이 쓴 일기기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한 사람들이 책을 구분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 ‘ 전란중의 일기’라는 뜻으로 ‘난중일기’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까 그분이 쓴 일기가 200년이 지나서 ‘난중일기’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난중일기’는 개인의 일기이지만 날마다 교전상황이나 군대 안에서의 생활, 이순신장군의 정치적인 생각과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등을 담고 있다. 또한 당시의 날씨나 서민들의 생활상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중 해전에 관한 자료는 다른 책에서는 보기 드믄 것으로 임진왜란과 세계해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그런 가치를 인정받아’ 난중일기‘는 국보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징비록이란 책이 있다. 이순신장군에 관한 책 중 ‘이충무공전서’ 뿐만 아니라 장군의 집안과 어린 시절 성품과 능력 등을 소개한, 류성룡이 쓴 책이다. 류성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황의 제자였으며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와 영의정 자리에 올라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애 쓴 인물이다. 이순신장군과는 어린 시절 부터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한 인물이다.
‘징비록’ 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그가 낙향해서 쓴 것으로 임진왜란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징비(懲毖) 미리 잘못을 경계해 삼간다는 뜻으로 유교경전 중 하나인 ‘시경’에서 따 온 말이라고 한다. 즉 미리 스스로 잘못을 뉘우쳐 뒷날의 걱정과 근심을 조심한다는 뜻이다. 류성룡은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일어나 백성이 고통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잘못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징비록’ 은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높게 평가 받고 있다.( 지호준의 조선일보 ‘뉴스 속의 한국사’ 참조 )
‘난중일기’에 기록 된 이순신의 어머니
1595년 갑오년 1월 12일에 이순신장군이 쓴 난중일기의 한 구절이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며 조금도 이별하는 탄식을 아니 하셨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 진중에 머무는 3년8개월 동안 늙으신 어머님을 위로해 드린 일은 있어도 아산 본가에
있는 부인에게는 한 번도 간 일이 없었다. 장군이 감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으로 남쪽 병진으로 찾아가는
도중에 아산 선영으로 운구하고 있는 노모의 시신을 만났다. 그러나 어머님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다만
성복만 마친 채 다시 남해로 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