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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고 나서 딱 떠올랐던 생각은 '이 책은 왜 이렇게 소박하지?'라는 것이었다.
이 책은 요즘 책들이라면 다들 달고 있는 띠지도 없고, 보람줄도 없고, 그렇다고 양장도 아니며 표지는 허여멀건하고, 그나마 디자인이라고 해놓은 것이 전태일 수기의 한 구절을 눌러서 인쇄해놓은 것이 전부다.
서평쓰기 전에 나 솔직히 전태일에 대한 편견 있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전태일은 22세에 죽었다. 나는 이제 스물 아홉으로 두달뒤면 서른이 된다.
사회짬밥을 더 먹은 나이가 되니까, 전태일이라고 하는 사람 솔직히 인생이 잘 안풀리니까,
노동운동 핑계 삼아 자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책은 택배 아저씨가 밤 10시 가까이 되어서 배달해준 책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하니까, 요즘 워낙 배달할 것이 많아서 그랬다고 사과하던 아저씨.
듣는 내가 미안할 만큼 피곤에 지친 목소리였으나, 나도 미래 불투명한 젊음 중 한 사람이라서 떨떠름하게 책을 받아들고 앞부분만 보자 하고 책 열었더랬다.
고백하자.
나, 두 시간동안 초집중해서 이 책 읽었고,
자정이 되어 책장 덮었을 때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책, 소설 아니다. 만들어진 허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 언급된 전태일은 지금도 우리 곁에 숨소리 내며 살아 있는 사람들 중 하나다.
원래 책이라는 놈들은 참 기묘한 놈들이라서 가끔 인생을 살다보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뭐랄까 같은 부류라고 생각되는 놈들이 자주 마주치는 시즌이 있는 법인데 추석 명절 전후로 [전태일 평전] 읽고, 또 아주 우연히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고 나 월급받으며 살아가던 것, 월급 봉투 두툼한 걸로 인간 가치가 결정된다 믿었던 것, 그리고 숫자가 곧 의義가 되어버렸다 믿었던 것에 대해 절절히 회개하는 호시절을 맞았다. 연휴기간 동안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고민하면서 회개하면서 성찰하면서 이상하게 무거워지기는 커녕 더 가벼워지고 영혼이 행복해지는 진기한 체험도 했다.
온전한 지성은 두려움을 내어쫓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법이다.
이 책을 쓴 분은 조영래 변호사이다.
그 유명한. 사회 개혁가이자 인권변호사, 서울대 입학시험에서 전체 수석을 한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지만 수많은 옥고를 치르고, 모든 변호사들이 꺼려하는 성고문사건이나, 망원동 수재 사건을 맡아 활약했다. 조영래씨는 학생시절 수배생활을 하던 3년동안 이 책을 써내렸다.
처음에는 저자가 누구라는 것도 밝히지 못했다.
그는 전태일이 죽기 전에 남겨 놓은 수기에서 인용문을 넣어가며 이 책을 하나의 논리적 유기체로 써내려갔다. 장기표씨가 이 책의 마지막에 써놓은 발문에서 말한 대로 이 책은 가이 '복음서'라 할만하다. 낮은데로 임한 희망과 지성의 목소리이다.
나는 전태일씨가 그 마음 속에 이성의 빛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수기를 읽으면서, 결국 이론이든 사상이든 하는 것은 현실에서 뿌리를 가지고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며, 현상적으로 나타날 때 그 진정성이 증명이 되는 것이라는 깨달았다.
전태일은 노동자를 계몽해주는 지성인을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노동자 자신이 노동 운동의 당위성을 깨닫고 행동에 옮긴 만큼 순수한 행동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총명했다. 너무 총명해서,잠들어 있는 시대의 공의를 깨우기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겠다는 서글픈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의 잔인하도록 교활한 손아귀 속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는 21세기, 몸뚱아리 노동자로서 전태일이 써내려갔던 수기들은, 그리고 조영래씨가 묶어 정리한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이 과거의 평전을 넘어서 미래의 묵시가 아닌가 염려하는 마음이 들었다.
함부로 이 책을 잡지 말길 바란다.
이 책은 타죽은 그의 몸뚱아리처럼 뜨겁고, 도무지 꺼지지 않는 진리의 불덩어리를 품고 있는 책이다. 소시민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같은 인간들에게는 날카로운 칼날이다.
이 책에는 눈 똑바로 뜬 진실이 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전태일 수기에서, 본책 180p)
지금 우리가 누리는 노동권이 어떻게 얻어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인지는 임금으로 먹고사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해야 할 고민일 것입니다. 임금을 받아 먹고사는 이 땅의 모든 이와 함께 읽고 싶은 책입니다.
요즘이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80년대만 해도 대학 내에는 선물 포장지나 달력 종이로 표지를 싼 책들이 서가나 캐비닛 안쪽에 잔뜩 꽂혀 있었습니다. ‘금서’가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부는 몇몇 책들을 콕 집어 판매 금지, 열람 금지 처분을 내렸고, 당연히 학생들은 더욱 책을 구하고 읽으러 다녔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90년대만 해도 마르크스 저작물을 가지고 경찰이 시비를 거는 게 가능할 정도의 분위기였으니, 80년대는 말도 못할 것입니다.
그 엄혹했던 시대에 권력의 눈을 피해 몰래 돌려 읽던 책들은 분명 놀라운 열독률을 보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판매 자료가 없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한 책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출판사 이름들도 없이 ‘애국’ ‘등불’ 같은 야릇한 발행처를 달고 나와 학교 세계의 지하를 떠돌며 어둠의 지식이 되었던 해적판 서적들은 학교 밖 청계천 중고책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야한 소설류의 해적판과 함께 당대 해적판 출판계를 지배하는 카테고리였습니다.
그중에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저자도 출판사도 없는 채로 시중에 떠돌던 이 책은 단순한 사상교양 학습서 일색이던 지하 출판물계에서 독자들의 눈물샘을 터뜨리며 인기를 모았고, 나중에는 대학 새내기들에게 선배가 추천하는 제1번 서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모르던 대학 신입생들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일종의 대학생 입문서로 기능했던 이 책은 이제는 『전태일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저자도 당당히 밝힌 채 서점 책꽂이에 올라와 있습니다.
『전태일 평전』은 한참 근대화, 산업화를 추진 중이던 60년대 말의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과 아픔을 그 현장의 주인공이었던 한 젊은이를 축으로 풀어낸 논픽션 인물 평전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그 어두웠던 시절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젊음의 이름이었고, 실제로 그 불사름은 한국 현대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태일 평전』은 그래서 개인을 다룬 평전에 앞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인간의 노동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실천의 전환을 다룬 시대서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전태일은 말 그대로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서울로 올라온 전형적인 청소년입니다. 7~80년대 영화에서 자주 보던, 서울역 광장에 보따리 하나 안고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던 딱 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청년들이 가장 많이 몰려 왔던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미싱 ‘시다’로 노동자의 길로 접어들고,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의 열악한 환경에 경악합니다.
지금도 평화시장의 복잡한 상가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면 어렴풋하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뒷방의 미싱 공장의 당시 모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엔 충격적일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좁은 가게 뒷편을 가내수공업 공장으로 활용하는 터라 공간은 매우 비좁았고,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환경 때문에 작업장은 24시간 백열전구 하나로 밝기를 유지했습니다. 허리조차 펴기 어려운 환경에서 토, 일요일 없이 (사실, 주5일 근무제도 그리 오래된 역사는 아닙니다만) 하루 12시간 이상의 격무에 시달리는 미성년자들은 잦은 질병으로 쓰러져가기 일쑤였습니다.
단순히 급격한 산업화에서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워낙 인건비가 저렴했던 당시의 대한민국에서는 외화벌이의 주력 사업으로 섬유 관련 산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또한 평화시장의 비극을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좋지 않은 기술과 품질로 세계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선 결국 인건비를 더욱더 쳐내는 전략이 필요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이 들어가는 미성년 노동자를 고용해 24시간 공장을 돌리는 효율을 강요했습니다. 그렇게 폐렴과 진폐증에 쓰러져가고 눈병으로 눈알이 짓무르는 노동자들의 희생 속에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성공’이라는 이름을 달고 위정자들의 빈 잔에 샴페인을 부었습니다.
평전 속의 전태일은 사실 이러한 모순의 심층부까지 접근한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못 배운 노동자 신세였던 전태일은 그런 이론적인 접근보다 자신의 삶 속에서 피부로 와 닿는 문제부터 파고드는 방식을 취합니다. 당장 그와 함께 일하던 여직공은 폐병을 얻자마자 해고되는 설상가상의 상황을 맞이했고, 1년 365일을 하루같이 일해도 불확실해 보이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깊게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노동자 스스로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접근이야말로 어떤 거시적 접근보다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당장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 수출 몇 달러를 달성했느냐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맑은 공기 마시고 몸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태일은 열악한 노동환경을 지켜줄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애초에 대한민국은 ‘근로기준법’이라는 노동권 보장법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비록 산업화라는 국가적인 대명제를 군사정권이 전 국민에게 던지면서 그 법의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완전히 폐기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엄연히 법전에 존재하지만 정작 그 대상인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말 그대로 불법적인 현실을 직시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확인받기 위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근로기준법에 의거한 작업장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윤이 최우선이었던 자본가, 자본가의 실적으로 나라를 굴렸던 정부는 노동환경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는 권력과 폭력으로 묵살할 수 있었고, 그들은 그것이 효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폭압 앞에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60년대 말 개발독재 대한민국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현실 앞에 전태일은 분신을 택합니다. 원래 그날은 무의미한 근로기준법을 불태우는 화형식 퍼포먼스를 치르기로 한 날이었는데,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스스로를 불사르고 맙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일요일은 쉬게 해달라는 그리 길지도 않은 마지막 유언이자 구호를 남긴 채 전태일은 스물두 살의 나이로 그렇게 떠나갑니다.
『전태일 평전』도 평전이겠지만 인간 전태일의 삶 자체가 그의 죽음으로 이슈가 되면서 1970년의 한국 사회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습니다. 당시 군사독재의 폭정 아래에서 숨죽이고 살던 수많은 대학생들은 전태일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울분을 삼켰습니다. 전태일의 이야기만을 듣고 졸업장이 제공하는 안락함을 등진 채 노동 현장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변화는 그러나 전태일 그 자신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가장 크게 일었습니다. 친구이자 동료이자 형이었고 동생이었던 인물을 그렇게 떠나보낸 평화시장은 노동운동의 힘에 대해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되었고, 마침내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운동을 이끌어내는 ‘청계노조’를 조직하게 됩니다. 사실상 조직화된 노동운동 단체의 시초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이 흐름은 전태일로부터 시작된 흐름입니다.
그런 전태일의 일대기를 정리한 『전태일 평전』, 아니 그 이전의 제목이었던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의 저자는 얼마 전 인권변호사 고 조영래 선생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전태일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듣고 보았고, 또 그의 이야기를 직접 글로 정리한 저자는 그 이후로도 전태일, 아니 전태일 이상의 삶을 살았다는 평까지 들으면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동시대에 전태일의 영향으로 인해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던 다른 많은 인사들이 밟아 온 부패와 타락의 흐름과 다른 점은 『전태일 평전』의 저자가 가져야 할 위엄을 끝까지 지켰기에 가능했던 점이겠습니다.
조영래
(1947~1990)
전태일과 가까운 시대의 사람들은 평전이 아닌 그의 삶 자체로써 감동을 받았다면, 그 이후의 사람들은 바로 이 책을 통해 세상과 삶과 나를 새롭게 깨우치는 계기를 얻었습니다. 삶. 나의 삶. 그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방식은 굳이 가방끈이 길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돈이 많아야 하는 것도 아님을 『전태일 평전』은 보여줍니다. 다만 그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자신의 삶만큼이나 타인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가고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는 점을 평전은 주인공의 불꽃 같던 삶을 통해 강렬하게 들려줍니다.
다만 평전이 품는 안타까운 점들 또한 존재합니다.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후회 중에는 ‘결국 평전이 죽음을 미화했다.’는 후회도 포함됩니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가치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던졌던 이들이 수없이 존재했고, 그때마다 많은 이들이 한탄하고 오열했습니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음들이 정국이라는 변수 앞에서 가끔은 유행처럼 사그라져 가는 모습에 대한 반성도 필요했고, 『전태일 평전』은 그러한 점에서 위험성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전이 과도하게 주인공을 미화하고 있다는 뉘앙스도 일각에서의 비판 요소입니다. 사실 전체적인 문장 톤이 마치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 찬양하는’ 수준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부분이 없지 않으며, 연구와 조사에 기반해 쓰여졌다기보다는 다분히 소문과 낭설에 근거해 쓰여진 점은 ‘팩트’가 중요한 요소가 되는 요즘 같은 시점에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지금이야 우리는 9시 출근에 6시 퇴근, 토요일, 일요일은 쉬는 날(네, 물론 저도 그렇게 못 살고 있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그게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멀리는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 방직공장에서 거대한 증기 다리미 밑에 들어가 압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루 스무 시간을 일했던 꼬마 제임스가 있었고, 주 40시간 노동을 요구하다가 사형당한 미국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일요일은 쉬게 해달라고 소리지르면서 죽어간 전태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노동권이 어떻게 얻어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인지는 임금으로 먹고사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해야 할 고민일 것입니다. 임금을 받아 먹고사는 이 땅의 모든 이와 함께 읽고 싶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