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落西海)
인천에 사는 寸 代父에게 문안 인사만 전하고 오랜만(초등학교 수학 여행 이후 처음으로)에 자유공원을 찾는다.
뱃고동 소리 들려오는 연안 부두를 내려다 보며 월미도 건너 수평선으로 落照를 뿌리는 붉은 해를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또 떠오르겠지만 오늘의 해가 지는 순간은 조금은 비감하다. 오늘 하루는 잘 살은 것인가.
이 공원 부지가 한 때 만국 공원이었다니 그 유래를 알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弱體인 조선이 누구라도 쉽게 차지 할 만국의 연인이 되었을 때 열강이 서로 차지하겠다고 각축하고 다투는 과정에서 갈등의 봉합 차원으로 만국 공원이 생긴 것이 아닌가.
공원 아래 차이나타운 식당가의 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한다. 저 항구와 이 언덕에서 임오군란을 진압하기위한 청국출병(1882), 일청 租界地 신설(1883), 한미수교(1883), 인천항 개항(1883) 같은 구한말의 역사적 사건들이 숨가쁘게 일어났던가.
최근세의 6.25 전쟁 기간만 하더라도 인천은 맥아더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상륙작전을 한 곳이다. 최근 동상의 철거 시비가 있었던 맥아더는 2차 대전 종료 후 일본과 일왕을 쥐락펴락할 정도의 실력자였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도 몇 번의 청탁과 편지를 보낸 끝에 어렵사리 맥아더의 허가를 받아내 하와이를 떠나 錦衣還鄕 하여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들었던가.
골목안에 小說 <三國志演義>의 극적인 장면들을 四字成語를 사용하여 함축적으로 표현한 벽화를 살펴보며 식당가로 내려선다. 저 식당가도 그렇고 삼국지의 세계도 그렇고 세상사 모든 것이 소설 보다도 더 기구하고 복잡한 인간사의 이야기이다.
복사꽃 피는 언덕에서 한 번 맺은 인연과 약속한 信義를 죽을 때까지 지키는 유비, 관우, 장비의 <桃園結義>가 자꾸 생각난다. 그런 신의를 주고 받을 知己가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마음에 담은 뜻을 나눌 人才와 벗은 <三顧草廬>의 禮로써 찾아볼 일일 터인데 어찌 마음은 사람을 향해 너그럽지 못하고 항상 <七步詩>의 한 구절처럼 다급하단 말인가.
형제가 콩깍지의 콩처럼 본디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 이리 콩 볶듯 볶아대는 것인가. 조비의 아우 조식이 文才 덕택으로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어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잔인한 존재이고 형제는 경쟁자이며 他人이 시작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
(인천대교의 건설로 융성하는 인천)
(맥아더 동상)
(공화춘 신건물)
(도원결의)
(왼쪽이 청나라 조계, 오른쪽일 일본 조계)
(일곱 발자국 떼기 전에 지은 시)
1. 차이나타운에서
"華"는 중국을 상징하는 글자이고 大陸人들의 自矜心을 나타내는 글자 같다. 그래서 나라 이름에 中華가 들어가고 대륙을 떠나 이민을 갔어도 대륙, 또는 타이완의 국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華僑라 부르니 그들은 언제까지나 중국인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화교 숫자가 현재 약 26,000명이고 인천 지역의 화교는 약 1,700명이라 한다.
구한말 조선의 노동 이민자들이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 멕시코의 애니깽 농장, 간도 지역에서의 개척 농업 등에서 엄청난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듯이 "꾸리"(苦力)로 대표되는 중국 인민의 이민사도 끈질기고 억척스러운 그들의 삶에 바탕을 둔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고난의 역사이자 삶을 향한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캘리포니아 금광의 금을 누가 캤으며 상상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대륙횡단철도를 누가 건설하였는가. 바로 "꾸리"들이다.
먹고 사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소위 3刀(요리, 옷, 이발 또는구두)로써 고단한 삶의 그림자를 딛고 일어서 이민 생활의 기반과 화교 공동사회의 터전을 잡고 또 나아가 3緣(地緣, 血緣, 業緣)으로 기업을 융성시켜 동남아 각지 등 상당수의 나라에서 경제적 실권을 움켜쥔 사람들이 화교들이 아닌가.
오죽하면 한 때 인도네시아에서 漢字의 사용과 중국 서적의 반입을 금지시키고 화교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했겠는가.
허름한 옷을 입고도 주머니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현금을 갖고 다니며 값비싼 호텔비와 음식 사치 등에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사람들이 화교들이다. IMF 시절 우리도 화교 자본을 끌어들여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들은 풍월로 잠시 역사를 돌아본다.
전국 각지에 華商들이 代를 이어 운영하는 중국집의 경우 개인적으로 이주해왔거나 인천의 화교들이 흩어진 경우가 많겠지만 인천에 화교들이 이주하게 된 것은 임오군란(1882)의 산물이라니 무능하고 부패한 閔씨 척족들이 그들을 끌어들인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 한다.
그 당시 산동반도에서 淸軍을 따라 약 40명의 華商들이 무역상의 신분으로 인천의 조계지에 자리를 잡은 것이 정착 화교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당시 수천명의 청군들이 발빠르게 일본에 앞서 출병하여 군란의 배후로 지목되던 대원군을 붙잡아 톈진으로 압송하지 않았던가.
초기 인천 이민자들은 赤手空拳의 무일푼 이민자들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이들이 <짱께>라 불리우기도 하는 짜장면이라는 불세출의 한국식 면을 만들어내고 조선 여자를 후리는 비단 장수 왕서방처럼 이동 도소매의 사업 수완이 있는 사람도 많이 생겨나고 조선인들에게 생소한 양파, 당근, 토마토 같은 채소도 길러서 팔았다 하던가.
하지만 청일전쟁(1884~1885)의 패배로 일본 상인들이 득세하게 되어 이들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것이고 일제 시대에도 中日전쟁(1937)과 만보산 유혈사건(1931)의 여파로 기를 펴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때(1950) 불의의 함포 사격을 받은 곳이 차이나 타운이라는데 역대 한국 정부도 화교들의 경제력 집중을 염려한 것인지 이들에게 토지 소유권 같은 경제적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았다니 이들에게 좋은 시절은 거의 없었는 지도 모른다. 한 때 토지 소유권에 제약을 받은 화교들이 헐값에 부동산을 처분하고 한국을 떠났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후손들이 자기들의 언어, 문화, 풍습, 음식, 교육 등을 유지해 나가며 하나의 화교 공동체를 이루어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은 이들 특유의 結束力과 끈기와 근면에 바탕을 둔 억척스런 삶의 결과인가. 이들 가족 구성원들의 결속력은 全家福 요리에서 나온다는 하던가.......
어쨌든 맥아더 장군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는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추억의 장소인데 지금 밀가루 반죽을 치대어 짜장면을 뽑고 항아리 만두를 굽고 월병을 빚고 공갈빵(얇게 부풀린 중국 호떡)을 구워내는 사람들이 대개 이민 4세대 중국인들이다.
1)공화춘의 짜장면
한국에서 중국 음식의 대표는 뭐니뭐니해도 서민이 즐겨찾는 짜장면이고 짜장면은 춘장을 양파, 돼지 고기등에 볶아 손으로 뽑은 면국수에 비벼 먹는 간편한 음식이다. 연안 부두의 노동자들이 이 짜장면을 먹고 힘을 얻으며 잠시 포만감과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 아닌가.
요즈음 짜장면의 춘장에 인공 조미료를 너무 넣기에 소화가 안 되고 느끼하다고도 하지만 짜장면은 역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이 짜장면을 차이나타운 공화춘에서 처음 만들어냈다고도 하고 다른 집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데 지금 공화춘 건물은 기업형 식당으로서 예전의 건물이 아닌 것 같다.
예전의 2층 벽돌 건물은 인천시가 문화재로 지정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 영업을 하는 건물은 4층 이상이니 증축을 하지 않은 이상 예전의 그 집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대학교 시절 누구하고 이곳에 일부러 온 기억이 떠오른다.
만만치 아니한 음식 가격에도 불구하고 30~40분을 줄을 섰다가 음식을 먹게 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 푸짐하고 맛있는 중국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어려있는 듯하다. 많고 많은 중국 음식 중에서 무엇을 시켜볼까.
전 가족이 함께 모여 같이 들면 행복하다는 全家福을 시켜본다. 전복, 해삼과 갖은 해물에 송이와 죽순 같은 야채를 넣어 볶은 다음 걸쭉한 녹말 소스를 끼얹어 먹는 음식이다. 이 음식 하나로 가족의 결속력이 증대된다 하여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함께 한 가게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즐겨 드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전복 한 점 씹고 제 맛이 살아있는 해산물과 야채를 골고루 맛보며 화끈한 이과두주 한 모금 들이킨다. 마무리로 짜장면 비벼 먹고 구수한 해물 짬뽕 국물 들이키니 일단은 행복하다.
(전가복)
(짜장면과 항아리 만두)
(짬뽕)
2)항아리 만두
진흙 화덕에서 얇은 빵과 카레 양념을 한 닭을 맛깔스럽게 구워내는 것은 서남아시아 방식인데 중국 사람들은 항아리 같은 화덕에서 직접 빚은 만두를 구워낸다.
만두를 항아리 화덕 안쪽에 붙이고 뚜껑을 닫아 익힌 다음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것인데 구워내는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에 인기가 있어 불티나게 팔린다. 만두속은 돼지 고기, 고구마, 단호박, 깨 섞은 팥 등이 있는데 아무래도 금방 항아리 화덕에서 꺼내어 뜨끈뜨끈한 것을 먹는 것이 맛이 있다. 뜨거울 때 먹으면 만두 속에 넣은 돼지고기 소의 촉촉한 肉汁이 혀를 즐겁게 한다.
열심히 일하거나 걸을 때 간식으로 아주 적당하다(1,500원/개).
(항아리 만두, 붙이고 떼어내는 것이 기술, 한 번에 60개를 붙인다)
3)월병과 공갈빵
8월 보름달을 닮은 月餠은 중국의 대표 銘果이다. 팥속이나 말린 호두 같은 것을 넣어 고급스럽게 만들기에 어쩌다 한 개 먹으면 꽤 귀한 것을 먹는 느낌이니 이런 것이 慕華인가.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밀가루나 호두는 모두 미국산이고 팥이나 깨, 말린 과일 등은 대개 중국산이니 신토불이와는 거리가 있는 음식이다. 어쩌다 맛보거나 윗사람들에게 선물 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보다(2,300원~2,800원/개).
그에 비해 중국 호떡의 일종인 공갈빵은 더 대중적인 음식이다. 만드는 비법이 아마 반죽에 있는 듯한데 동그랗게 떼어낸 반죽에 흑설탕 같은 소를 넣고 화덕에 구으면 껍질이 넓게 펴지며 빵이 럭비공 정도 크기로 부풀어 오르고 속에 넣은 흑설탕 같은 소가 녹아내리며 골고루 내피에 흘러 묻는다.
달콤하고 바삭바삭한 껍질을 주먹으로 깨뜨려 작은 조각을 내어 먹으면 간식으로 아주 그만이다. 기름기는 전혀 없는 밀가루 과자이다(2,000원/개).
(공갈빵)
(월병)
2. 신포 시장에서
인천의 오래된 시장인 신포 시장은 매스컴의 덕택으로 매콤한 닭강정이 유명하지만 사실 만두와 찐빵의 고장이다. 신포 만두는 서울에서 꽤 알려진 브랜드가 아닌가. 그래봤자 만두이고 그래도 만두인가.
1)닭강정
잘게 토막낸 닭을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겨낸 다음 매콤한 양념에 묻혀내는 음식이다. 韓菓를 만들 때 튀겨낸 찹쌀떡 조각에 꿀을 바르고 잣이나 깨 같은 것을 묻혀내는 것과 비슷한가.
이 닭강정을 먹고 사가려는 사람들이 새떼처럼 몰려와 가게 앞을 덮고 있으니 30~40분 기다리는 것은 예사이다. 만드는 집마다 튀김옷과 묻혀내는 양념에 비법이 있을 듯하다. 학생들 같은 젊은 층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누구의 장난으로 새떼가 철새처럼 날아가 버리면 주인은 어찌하나. 실제로 집집마다 손님들이 들고 나는 것이 너무 차이가 있어 희비가 교차하는 듯하다.
(닭강정을 만드는 모습)
2)만두, 찐빵과 생과자
형형색색의 만두와 찐빵이 가게마다 풍성하게 진열되어 있고 가격과 품질도 대만족 수준이다.
주먹 보다 크고 고기 다진 것이 꽉찬 만두, 팥앙금을 가득 넣은 찐빵의 가격이 3개에 2,000원이니 서민의 식사 대용으로 충분하다. 혹시 인공 색소를 쓰지 않았을까 염려 되어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걱정을 붙둘어매라는 이야기이다.
슈크림빵(1,000원/3 개)이나 경주빵(1,000원/3 개) 같은 생과자도 전국 최저의 가격 수준에 맛은 합격점이다. 부드럽게 잘 부풀려 굽거나 쪄내는 밀가루 반죽에 그 비결이 숨어있는 듯하다.
(색과 모양이 제각각인 찐빵과 만두)
(놀랄만큼 싼 가격의 생과자, 맛은 수준급)
3)민어 어란
보통 어란은 숭어알로 만든 숭란을 제일로 친다는데 요즈음 알이 없는 작은 양식 숭어를 먹는 세상에 알이 꽉찬 팔뚝만한 자연산 숭어를 찾아보기 어려우니 숭란도 거의 자취를 감춘 듯하다.
두 개로 된 알집에 몇 번이나 간장과 참기름을 발라 그늘에 말려내는 수고가 깃든 음식이다. 어란을 얇게 썰어낼 때도 칼을 데워 흩어지지 않게 얇게 썰어 혀에 녹이듯이 하여 맛보지 않는가.
숭란이 없다면 꿩대신 닭격으로 민어알 어란을 맛 볼 수 있는데 마침 눈에 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어란을 골라사고(10,000원/어란 한 줄) 맛을 좀 보자 했더니 주인 할머니가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작은 알집을 덤으로 내어 준다.
(어란)
4)달래와 씀바귀
비록 사람이 재배를 하였다 하더라도 냉이와 함께 대표적인 봄나물인 달래와 씀바귀를 먹지 않을 수 없다. 예전 산자락에서 달래 뿌리라도 하나 캐면 아주 횡재를 한 기분이 들었었고 삶은 뿌리를 찬물에 우려낸 다음 무쳐 먹는 쌈싸롬한 씀바귀는 그저그런 음식에 지친 입맛을 되돌려주지 않았던가.
(씀바귀 뿌리와 달래/달래, 냉이, 씀바귀 모두 캐보자)
章
2010. 4
첫댓글 신포 시장의 먹거리는 원래 전국적으로 유명하다지오. 소생이 인천을 간 듯 합니다. 북성포구 근처의 밴댕이회가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터.
본의 아닌 閔씨 험담을 용서하시기를. 사위 덕분에 고급 Chinese dish들을 즐기고 있지 않소? 캘리포니아도 중국 사람 많더만....밴댕이회는 조금 이르오. 나는 냉동은 싫소.
소생이 한양으로 유학오기전에 국민학교시절을 보냈던 곳이 바로 만국공원밑에 전동이라는 동네였다오... 지금은 도크로 막아 전망이 없지만, 만국공원에서 바라보는 일몰광경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있소... 그때도 화교들이 모여살고 있었고 그곳이 지금은 화려하게 차이나타운으로 변했지요. 남공의 글을 읽으며 어린시절 생각에 잘나지 못한 오랜 추억을 더듬게 되는군요.....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