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 지리산 천왕봉에
2010/07/10
중산리-로타리대피소-로타리 대피소-법계사-대문바위-천왕샘-천왕봉
-통천문-제석봉-장터목대피소-칼바위-중산리
장마 사이 반짝 햇살의 축복을 받고 지리산으로 간다.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산이기에 무리가 있어도 한번 쯤 욕심을 내는 영산이기에, 날씨의 축복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모든 것은 오늘 한가족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평소 참삶을 꾸리는 원초적인 마음의 아름다움이 쌓은 공덕이리라.
10:00
지리산의 줄기가 내려다 보는 공원 입구에서 우람한 위세에 기가 눌리는지 오금을 버스에 맨다. 칼
바위 쪽의 걸어가는 산행로를 버리고, 거리를 얼마 단축시키지도 못하는 셔틀 버스에 오른다. 모다
버스가 우리나라 최고지 1400의 절 법계사 까지 쉬 데려다 줄줄 안 게다. 버스가 가족들을 내려다
놓은 곳에서 법계사까지는 2.6km 산길 2시간여 거리라는 이정표를 보고 실망하고 만다.
'생각해 보구려, 지리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산이랴. 그저 먹자고 하는 마음이 아직도 세속아이가.
아무도 나를 정상에 올려주지 못할 터, 자 한발 한발 나아가세나.'
11:00
숨이 턱에 차고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다. 무리하지 말고 자기 페이스대로 힘겨우면 질퍽하게 앉
아 쉬고, 지리산의 품을 느끼시구려. 동료가 나눠준 수건은 개울에 빠뜨린 듯 푹 젖은지 오래다. 그
래도 법계사까지는 경사가 완만한 편인데, 청옥산의 악몽이 재현되지나 않을까 한사람 한사람 살
펴보니 힘겨움 속에서도 천왕봉을 향한 의지가 역력하다.
12:00
두시간여 만에 로타리 대피소에 다다른다. 시원한 샘물 한모금으로 더위와 피로를 몰아내 보지만,
어지간히 힘을 쏟은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가잔다. 허긴 아침 일찍 아침식사를 한둥 만둥한 출발
이었으니 시장기가 찾아올만도 하다. '점심 묵으면 몬 간다. 밥은 묵지말구 다른 걸로 배채우고 출
발해유.' 법계사 일주문 앞에서 1400고지의 법계사에 미련이 가나 모두 지나가잔다. 적멸보궁 법계사는 오름으로 쌓인 피로 때문에 무시당하는 게다.
'나무아미 타불, 경망함 사하시고 우리 대원 무사 산행을.' 일주문에서나마 산사를 향해 고개숙여 작은 기도를 남기며, 정상을 향한 2km 경사로를 간다.
13:00
천왕을 뵈러가는 입구 입을 쩍 벌인 대문 바위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매무새 갖추란 듯 서슬이 퍼렇다. 자연이 만든 큰 바위 틈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땀을 확 날려 버린다. 멀리 보이던 천왕봉이 갑자기 성큼 앞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먼 길을 걸어 지척에 두고도 산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한다. 계단을 오르다 장딴지가 경직되어 비명을 지를 만큼 기력을 쏟게 하고는 천왕봉 밑에 시원한 석간수를 흘려 다시 기운을 차리게 해 주는 너그러움에 몸안 가득 채워진 화기를 단숨에 잠재운다. 천왕샘의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샘물의 달콤함이 온몸을 휘돌며, 마지막 오름을 쉽게 한다. 깐깐하게 깔린 마지막 돌계단은 그래서 한결 가벼운 걸음이다.
14:00
꼬박 네시간을 걸어 천왕봉 정상석을 안는다. 사방이 구름으로 덮이고, 거센 바람이 몰아쳐, 한여
름의 초겨울을 느낀다. 땀과 찬바람의 조화가 어려운지 대원들의 몸을 떨게 하는 추위가 천왕봉을
올랐다는 과격한 감동을 지우게 한다. 산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랴.'이눔아 난 늘 거기 있는데 모처
럼 올라와서 세상 다 얻은 것겉이 기뻐 날뛰어 봐야 인간사 새옹지마인 걸 와 까 먹누.'라고.
그래도 감동에 가슴 벅찬 것은 어쩔 수없는 게지. 정상표석을 안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늘어선
다. 겨우 순서를 잡아 천왕봉 오름의 감정을 추스린다.
탁 트인 시야를 열어주지 않는 정상은 구름 위로 붕 떠버린 별천지로, 구름바다의 외딴 섬에서 늦
은 점심을 먹는다. '이맛에 산에 오는 거여. 와 이리 맛 있누.' 돌인들 양념 묻히면 맛이 있지 않을
까. 온 힘을 쏟았것다, 때를 넘겼고, 천왕봉이라는 기쁨이 더해졌으니.
15:00
천왕봉에서 비켜, 서북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의 일부 구간 속의 한 점인 장터목대피소로간다. 법계
사에서 오를 때 대문바위가 천왕봉 가는 이의 정심을 갖추라 하듯 장터목에서는 통천문이 천왕봉
가는 이의 마음과 몸을 가다듬으라 한다. 하늘로 뻥 뚫린 바위 구멍으로 보이는 하늘에 다가섬에
경외감을 가지게 하는 통천문을 경계로 우리는 다시 땅의 세상으로 들어서는 게다. 천왕을 떠남을
실감시키기라도 하듯 구름은 위로 솟구쳐 올라가고 운무 속으로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리산 능선을 따라 제석봉에 서나 산은 우리에게 좀처럼 시야를 내주지 않는다. 제석봉 전망대에
서 보는 일몰은 천왕봉의 일출과 쌍을 이루는 환상이지만, 시간상 맞지않고 다만 고사목의 여러 모
양들이라도 눈에 담고 싶은 게다. 산은 그런다. '난 그리 쉬 변하지 않으니 언제건 산이 열리는 날
을 기다리렴. 오늘은 오늘 만큼만 보는 기여.' 라고.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의 긴능선에서 마지막 대피소인 장터목이다. 대부분의 산꾼들이 잠자릴 잡
아두고 천왕봉의 일출을 꿈꾸는 곳이다. 시간이 예상을 벗어나 서둘러 능선에서 다시 중산리가는
급경사 내림길로 들어선다.
16:00
어지간히 지친 모습이 역력하나 길을 재촉한다. 예상보다 산행시간이 길어져서 체력을 안배하는데
익숙하지않음을 염려하여 쉬는 시간을 짧게 짧게 끈덕지게 괴롭히는 돌 길과 급경사도 문제가 되
는 것 같다.
그러나 산행은 언제나 혼자이다. 어지간히 내려왔다 싶을 즈음 천왕봉으로 가거나 그 곳에서 오는
사람들이 지루함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돌탑이 즐비한 너른 너덜이 다가온다. 바닥인가 착각을 일
으키기 좋지만, 작은 탑 위에 돌 하나를 얹으면서 산행의 행복한 마무리를 소망한다.
17:00
칼바위 앞에 선다. 천왕봉 원점 회귀 산행의 시, 종의 상징바위 앞에 서니 산행의 끝이 보인다. 7시간의 예상이 2시간이 넘쳐 버린 게다. 로타리 대피소와 법계사로 가는 갈림길에서 부터 울퉁불퉁한 길에서 벗어나 다소 편안한 걸음을 걷는다.
18:00
야영장가는 찻길, 아침에 버스를 타고 빙 둘러갔던 도로에 들어서면서 수도에서 물을 한 쪽박 들이
키고, 에어펌프로 온몸의 먼지를 털어낸다. 주차장에서 준비한 국수와, 막걸리로 끌고 온 다리의
통증을 달래니 참았던 하늘이 비를 내린다. 하루만에 장마비 사이를 훌쩍 건너 뛰면서 멋진, 굼꾸
던 산행을 마친 게다. 모두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얼큰할 정도로 마시고 버스가 달리는 내내 의
자에 몸을 묻는다.
'그랴, 우리는 장장 9시간여 천왕봉을 만나는 수행을........ .'
내려와서 부슬부슬 내리는 빗 속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천왕봉을
다시 바라본다. 제석봉의 고사목이 휙 지나간다.
죽어 화석같은 뼈가지를 안개 속에서 산 가지와 어울려
꼿꼿하게 선 구상나무 군락을 보면서 제석봉 평전에서의
오손도손 살아 갈 식생들의 나름나름 삶이 경외롭다.
삶도 죽음도 모든 것은 한인 것을 우리는 삶에만 집착하여
반 쪽의 자연이 아닌가.
제석봉 고사목과 싱싱한 푸르름을 뿌리는 구상나무
는 모두 구상나무가 아닌가. 지리산아니랴.
함께 한 모든 이들이 지리산의 커다란 마음으로 세상을
멋있게 살았으면 한다.
2010/07/18
경북 문경의 산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