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두 게시판이 넘 허전하다구 배째라 뭐째라 할까봐 글쓰는 재주는 없고
해서리 긴글 하나 퍼다 깐다.
42.195를 먼저 달린 사람들
송재익님 이야기
'42.195를 먼저 달린 사람들'를 시작하면서
예고(?)한대로 네티즌 마라토너와의 인터뷰 시리즈의 첫 순서를 개봉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 처럼 이 인터뷰는 만남의 광장을 다녀가는 많은 달리기에 관심있는, 그러나 아직은 주저주저 하는 이들을 주 독자로 삼아, 그분들에게 먼저 42.195를 달려간 분들의 솔직한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그 머뭇거림을 힘찬 달리기로 변화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소박한 취지에서입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는 이미 서로 잘 알고 지내는 네티즌 마라토너 사이의 서로에 대한 이해가 좀더 깊어졌으면 하는 주제넘는 바램도 있습니다. 읽으시면 아시겠지만, 그러나 이 글은 단순히 달리기에 관한 노하우를 담는 것만이 아닌, 인터뷰에 등장하는 분의 삶의 모습도 조금은 엿보고자 하는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달리기의 동력은 달리는 노하우에서도 오지만, 누군가, 어느 공간에서인가, 어떤 생각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로부터 비롯되는 이상한 종류의 연대감에서도 많은 부분이 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 인터뷰에서 전해지는 개인의 삶의 모습은 인터뷰어의 부족함으로 인해 혹시 잘못 전달되고,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여러 달리기의 고수님들이 계시지만, 첫 인터뷰의 대상으로 송재익 반달코디님을 청한 것은, 송재익님이 이제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많은 분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평범을 갖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이제 달리기 경력 2년 조금 넘은 분으로 열심히 달리는 송재익님의 이야기가 조금은 초보 러너들에게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 고수님들은 차례로 만나뵙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난 9월 6일날 송재익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저녁 7시 30경, 인터뷰 중에 듣기로는 송재익님은 방금 상사한테 깨지고 나온 중에 제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혀 내색 않고 즐겁게 필자를 맞아주었습니다. 인터뷰 장소는 송재익님의 단골집으로 보이는 현대 본사 건물 주변의 가정집을 개조한 삼겹살집이었습니다. 옛날 마포 장터에 갔다 놓아도 충분히 손님들로 붐비는 음식집을 만들었을 법한 인상의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차장님 오셨어요?" 하면서 반갑게 맞았고, 우리는 각자의 주량이 소주 한 병 정도에서 적당하다는 등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를 나누다가 술 몇 잔 들고, 고기가 익어갈 즈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아,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드리면 송재익님은 현재 현대종합상사의 차장으로 재직 중이며, 일본 지사에서의 5년 근무를 마치고 금년 2월 귀국하신 분입니다. 이 만남의 광장 맨 앞 부분을 보면 일본에서 부터 열심히 올리신 글을 찾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현재는 반달코디를 자청해서 열심히 하고 계시지요.
인터뷰의 첫 질문은 아무래도 달리기에 관한 인연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달리기를 시작하셨다는 겁니까?(서술의 편의상 경어는생략합니다...)
지금 부터 딱 2년 전, 97년 9월, 한국 나이로 40세 되는 가을이었다. 집 근처에 면적만 80만평이 되는 나가이 공원이라는 큰 공원이 있는데, 그무렵 어느 토요일날 오후에 애들은 수영가고 해서 혼자 공원에 가서, 소위 말하는 낙엽을 밟으며 사색에 잠겨본 날이 있었다. 그날 문득 나이가 실감났다. 아니, 벌써 40세가 되었다는 것인가. 40이면 평균 수명이 칠십 몇 살이라고 해도 앞으로 내가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더 적어진 것 아닌가. 그럼 지금까지 내가 뭘 한 것인가. 게다가 40세가 된지 여덟달이나 지났는데... 그러면서 아찔했다. 게다가 60, 70 살 때는 대외활동도 줄어들거나 못할 테니까 앞으로 실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20 년 정도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해놓은건 아무 것도 없으니, 와,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지금부터라도 무언가 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남자 나이 40 세가 돼서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나이돼서 고시 공부를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인물이 잘 생겨서 영화배우로 데뷔할 거냐.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이거지.
도대체 뭘 시작할 것이냐...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지금 생각하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연히 고개를 돌렸는데, 대여섯 명의 사람이 마라톤 복장을 하고 공원을 뛰어가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지? 달리는 선수들인가? 하지만 그때까지 마라톤은 선수들이나 하는 걸로 알고 있고, 나는 지금 40세란 우주적인(?) 고민에 빠져있으니 나는 또 낙엽을 밟으며 계속 걷고 있었다.
그때 공교롭게 또 그 사람들을 마주쳤다. 말하자면 그들이 공원을 벌써 한 바퀴 돌고 온 것이다. 아니, 공원 한 바퀴가 꽤 걸릴텐데..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별 뜻없이 그 사람들을 주의깊게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벤취에 앉아 그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벤취에 앉아 공원을 보니, 그때부터 주변에 보이는 것이 뛰는 사람들이 그들 뿐이 아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전에도 많았을텐데 그때까지 내 눈에는 안 들어온 거지. 야, 왜 이렇게 뛰는 사람들이 많냐. 달리는 선수들 같지는 않은데. 말하자면 그것이 첫 계기였다. 어쨌든 그렇게 벤취에 앉아 유심히 보는 중에 십 몇 분 지났을까, 아까 그 사람들이 또 지나갔다. 열심히 뛰면서 땀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나도 저걸 한 번 해봐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근데 끔찍하지. 내가 어떻게 저걸 해 이 나이에. 솔직히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 글 올려놓은 거 보니까 국민학교 운동회날 뛰다가 앞에 가는 애 넘어지는 바람에 3등 해서 공책 타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만 나는 그런 경험 한 번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끔찍하지만 내가 한 번 저걸 해봐 하는 생각이 없어지질 않았다. 인생 40세 넘어 뭔가 색다른 목표를 갖고 싶었다. 시도를 해 볼만한 가치는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내가 생각한 목표는 아직 마라톤은 아니었다. 그냥 조깅이라고 할까. 조깅이라면야 20대, 30대에 벌써 몇 번씩 시도했다가 3일 하고 그만두기를 많이 해본 것이 아닌가. 그럼 지금부터 첫 단계로 조깅을 해보자. 얼마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한 번 해보자.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요일 아침에 딱 일어나서 집에 있는 운동화 아무거나 신고, 반바지 하나 입고 나갔다.
뛰는 것도 처음에는 쑥스러워 우선 걷기 시작했다. 걷다보니 주변 사람들이 다 달리고 있어서, 그래서 나도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 사실이지만 나가이 공원의 한 바퀴는 정확히 2.813K. 공원을 만들때부터 마라톤 연습용 조깅코스를 감안해서 15바퀴 뛰면 정확히 풀 코스 거리가 될 수 있게 만든 곳이다. 하여간 3K도 안되는 그 한 바퀴를 뛰니까 되게 힘들더라. 그런데 처음 뛰러 공원 나간 그날 쇼킹한 장면을 목격했다. 내가 뛰는 뒤에서 누군가 대화하면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 무심코 눈을 돌렸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남자와 여자가 헝겊 끈으로 손을 연결해고 뛰고 있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여자가 시각장애인으로 남자가 인도해주면서 함께 뛰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가 "저도 열심히 할테니까 잘 부탁합니다."라면서 남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고 남자는 "무슨 소리냐. 나도 당신 덕분에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라는 식의 대화를 내가 들은 것이었다. 폼을 보니 두 사람다 초보자가 아닌, 엄청 많이 뛴 사람들 같았다. (주 : 참고로 호놀룰루에서는 일년에 한 번 맹인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뛰어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일본인 자원봉사자도 그중 상당수이며, 인기작가이자 마라톤광인 하루키도 그렇게 자원봉사를 하며 달린 경험을 어느 글엔가 적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앞을 못보는 여자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사지 멀쩡한 내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바퀴 뛰고 왔다. (아줌마∼ 여기 술 하나 더. 어느 새 참이슬 두 병째로 접어들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그때의 신체조건은?
키는 지금과 꼭 같이 171, 체중이 71K, 키에 비해 조금 많은 체중이라 안 그래도 운동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체력은 중하 정도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가서 골프를 했는데, 어떤 때는 골프장 6K의 거리를 걷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고생한 적도 있었으니까. 하여간에 그렇게 처음 뛴 후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공원엘 갔다. 어느 날은 비가 왔다. 당연히 쉬었지. 요즘 같으면 비오는 날도 뛰지만. 처음에는 한 바퀴도 힘들던 것이 한 4, 5일 지나니 한 바퀴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두 바퀴째 중간 정도 가니 또 힘든 거야. 그래서 야, 내가 마흔 살 넘어 뭐 이렇게 무리할 필요있냐 하는 생각에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걸어올라고 보니까 시간이 더 걸리는 거야. 그럴 바에야 뛰자 해서 마저 뛰었다. 야, 두바퀴 뛰니까 되네 하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늘려갔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제일 곤란해진 것이 저녁마다 있는 술자리였다. 일 끝나면 거의 예외없이 있는 주재원, 출장 온 사람과의 술자리가 매일 있었다. 그러면 아침에 잘 못 일어날 때도 있고, 그렇게 연습을 빼먹으면 내 자신이 싫어지고... 달린 후 이주 쯤 지난 어느 날인가 그렇게 연습을 빼먹는 내 자신이 싫어져 하루는 저녁 먹고 나서, 저녁이라고 못 뛸 것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 공원을 갔다. 야, 그런데 저녁에도 뛰는 사람이 엄청 많더라고. 가로등 켜 있고, 차들 안다니니. 그때 쾌재를 불렀다. 야,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아침에 못가면 저녁에 가는 스타일로 발전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지나니까 아침에는 계속 안 가게 되데. 심지어는 아침에도 못가고 저녁에도 못가는 경우가 있더라고. 그러면 또 내 자신이 싫어지고... 도대체 발전이 없는 거야. 왜 내가 이렇게 매너리즘에 빠질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내가 달리기를 하면서 목표가 없는 거야. 그래도 마라톤은 생각을 못했지. 그때까지 마라톤은 황영조나 이봉주가 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 가서 우연히 잡지 코너를 훑어 보다가 '러너즈 RUNNERS'라는 잡지를 발견했다. 뭐 이런 잡지가 다 있지, 하면서 펼쳐보니까, 야, 그때 온몸의 피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그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잡지가 다 있구나. 얼핏 보니 달리기 강좌부터, 대회일람표, 선배들의 경험담, 풀코스를 뛰기까지의 과정, 등등... 서서 보다가 당장 사서는 집에 와서 그날밤에 다 읽었다. 그 잡지에 실린 대회일람표를 보니, 그때가 97년 11월쯤인데, 98년 3월1일 오오사카 시티하프마라톤 대회가 처음 생겼다고 광고가 나왔더라고. 하프?, 하프면 21K 인데, 21K? 야, 내가 21K를 내가 어떻게 뛰어...이건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드는데, 대회까지는 한 3개월 남았으니까 이걸 목표로 삼아 연습을 하면 될 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잡지에는 오오사카 시내를 뛰는 첫 대회라 마감이 빠를 것으로 예상되니 빨리 신청하라는 조언이 나와있더라고. 그래서 그 다음날 바로 신청했다. 당선자 발표 한달 있다지만, 일단 신청했으니 목표를 가지고 연습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뛴 것은 고작 공원 두 바퀴 뛰어봐야 5K. 그런데 대회는 교통을 풀어야 하는 사정상 2시간 10분으로 시간제한을 두고 있었다. 야, 내가 두시간 10분안에 뛸 수 있을까. 일본 땅에 와서 뛰다가 잘못해서 쓰러지면 그게 무슨 꼴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짜 열심히 연습했다. 우선 뛰는 거리를 늘려, 두 달 지나 세 바퀴, 다시 네 바퀴...
근데 러너즈 어드바이스를 보니 하프를 처음 도전하는 사람은 대회 한달 전까지 자기가 뛰고자 하는 거리에 육박하는 17∼18K를 뛰어보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고. 다른 얘기지만, 그때 러너즈 부록으로 달리기 다이어리를 주었는데, 참 열심히 쓰면서 연습을 했다. 오늘은 공원에가서 두 바퀴 뛰었다,
날씨는 어땠고, 뛰고나니 체중은 어땠고 하는 식으로. 나중에 참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98년이 되었다. 겨울이지만 오오사카는 별로 춥지는 않다. 추워봐야 영하 1도 정도. 한 겨울에도 뛰는데는 지장이 없어 열심히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1월달에도 대회는 많이 있는데, 이미 신청이 끝나 있다. 어떤 때는 그런 대회의 구경이라도 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가서 보면, 야, 나도 저 정도는 뛸 수는 있을 텐데, 왜 신청을 안했을까 하는생각도 들기도 했다. 그때부터 오오사카 이후의 대회는 이미 신청을 받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그 이후의 대회에 열심히 신청을 하면서 연습을 계속했다.
그리고 드디어 3월 1일 대회날이 되었다. 그 전날 잠이 안오더라. 내가 정말 끝까지 뛸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일본 땅까지 와서 뛰다가 쓰러지는 것 아닌가. 근데, 공교롭게 3월1일은 우리나라는 삼일절. 묘하게 79년전 기미년 그날 조상들은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나는 일본땅에서 마라톤을 뛰는구나, 쓰러질 수는 없지, 하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스타트라인에 서서 출발했다.
책에서 본대로 처음에 오바페이스 하면 안된다고 해서 그렇게 시내를 뛰다가 내가 연습하는 나가이 공원으로 골인할 수 있엇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날 내가 기록은 1시간 49분 55초. 첫 하프기록으로는 상당히 잘 뛴 기록이다.(으쓱) 그 이후로 하프 대회를 연이어 참가하다가 결국 작년 11월 풀코스를 처음 나가서 3시간 48분 42초로 완주했다.(다시 으쓱) 대회는 후쿠지야마 대회. 그러니까 처음 달리기를 시작해 완주까지 채 1년이 안 걸렸다. 그런데 인터뷰인데 나만 이렇게 계속 얘기해도 되나?
하하. 계속 말씀 하세요. 때가 되면 알아서 질문할께요.
한가지 얘기한 김에 말하고 싶은 것이 그 일년 사이에 내가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담배를 고3부터 피우기 시작했는데, 22년 동안 편도선 걸려 도저히 필 수 없는 몇일 빼고는 끊어본적이 없다. 하루에 한갑, 한갑반, 많을 때는 두갑을 피웠는데, 실은 오오사카 하프 출전 이후에도 담배는 계속 피웠다. 그러다가 작년 8월11일 딱 끊었는데, 그 이후로는 술좌석에도 핀 적이 없다. 가만히 보니 우리 네티즌 마라토너들사이에도 아직까지 담배피는 사람이 몇 명 있지요.
선주성씨, 신동희씨, 전차수 교수님... 빨리 끊으세요...(주 : 이 빨리 끊으시라는 말은 녹음된 말은 아닙니다. 아마 마음 속에서 하신 말인 듯...) 솔직히 나도 달리기 시작하고도 1년 가까이 계속 담배를 피웠다. 땀 흠뻑 흘리고 샤워하고 물 마시고 담배 한 대 피는 기분은 너무너무 좋다. 미치지. 더군다나 어느 때 맥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좍 빨면. 흐흐, 나도 안다. 미치는 그 기분. 책에서는 마라톤에 담배는 말할 것도 없이 나쁘다. 심폐기능에 가장 나쁘다고는 하지만. 그때 누가 마라톤을 끊을래 담배를 관둘래 하면, 아, 그럼 마라톤을 관둔다고 나도 대답했을 것이다.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그렇게 상상도 안하고 있엇다. 마라톤의 장점 중의 하나가 끝나고 나서 담배를 피우는 맛에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담배를 피우면서 달리기를 하니 뛰다가 가래가 나온다. 담배 피우면서도 거리를 늘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찌됐건 가래가 계속 나오니, 공원에서 함부로 가래를 뱉을 수도 없고, 숲이 우거진 곳에 가서 뱉고 또 뛰고 했는데...우리 먹으면서 합시다. 아줌마! 여기 야채 좀 더 주고 마늘도 좀 더주고... 신경 좀 써 주세요... 그런데, 내가 편도선이 약하다. 작년 여름에도 목감기가 오더니 편도선이 걸렸다. 편도선이 걸리면 담배맛이 안 난다. 되게 성질나지만 어쩔 수 없이 안 피울 수밖에 없다. 습관적으로 담배에 손을 가 불은 피우지만. 그렇게 몇 일 안 피우는 중에 문득 이 기회에 담배를 한 번 끊어봐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더라고. 정말 끔찍한 생각이지 나로서는. 넌 안돼, 니가 어떻게 담배를 끊냐, 말도 안돼,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어찌됐건 편도선 때문에 하루 이틀 삼일을 안 피웠, 아니 못 피웠다. 어, 내가 삼 일을 안피웠네. 야. 이건 정말 대단한 거잖아. 그럼 일주일까지 가볼까...(아줌마 등장...판 갈아드릴까요? 네, 갈아주세요.)
4일 정도 되니까 목감기가 낫더라고. 그때부터 담배 생각이 나는데 미치겠더라고. 그래도 삼일을 더 참았지. 일주일만 가보자, 그러면 나도 일주일 끊어본 적이 있다고 할 말이 생기지 않는가. 5일째 되는 날 술자리가 있었어. 술자리되니까 미치겠더라고. 또 이를 악물고 참았지. 그런데 술집 아가씨들이 담배 불붙여주면서, 오빠, 오늘 왜 담배 안 피워, 하는 거야. 아, 나, 담배 끊었어. 얼마 됐는데? 4일. 에이, 오빠는. 그거 갖고 뭘 그래, 피워, 피워. 까불지마, 나, 안피워. 내가 불 붙여줄게, 하면서 얼굴에 담배연기를 뿜는데, 하여간에 그래도 안피우면서 일주일을 참았다. 일주일 지나니 금단증상도 오고 미치겠더라고. 머리는 공중에 붕 뜬 거 같고 일도 손에 안잡히고, 정신도 안정이 안되고. 그렇게 일주일 지나고는 이번에는 열흘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다음에는 이주, 한 달, 이런 식으로 계속 갔다. 정말 독하게 맘 먹었지.
아마 그렇게 담배를 끊게 된 것은 독하게 마음 먹은 것도 있지만, 그 전에 이주일 안 피니까 뛰는데 가래가 진짜 거짓말처럼 안나오더라고. 그때는 담배도 꽤 좋아했지만, 이미 마라톤도 꽤 미쳤었던 때였다. 가래가 안나오면서 거리를 늘려가도 별로 힘들지가 않았다. 그때는 10K를 더 뛰던 때니까. 야, 그럼 이걸 한달두달 세달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일기에다 이렇게 쓰곤 했다. 오늘은 담배 끊은지 몇일째. 또 얼마 지나 오늘은 한달째. 한달을 성공적으로 보내다니, 내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다, 그런 말도 쓰곤 했다. 그렇게 세달 네달 다섯달 되니까 금단 증상이 없어지고 일년 지나니까 이제는 내가 담배연기가 싫어진다. 그러나 그 느낌은 남아있다. 담배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그래도 유혹에 빠질 때는 있었지 않은가?
8개월, 9개월 됐을 때에. 꿈에 담배 피우는 꿈을 피웠다. 꿈에 담배 피다가, 어, 내가 담배 피우고 있네, 깜짝 놀라 깨났다. 깨나서는 꿈이구나, 담배 때문에 내가 꿈까지 꾸다니. 그런 자신이 싫어져서, 이건 진짜 끊어야돼 하는 생각이 굳어졌다. 회사 동료들은 담배 끊은지 일년 된 나보고, 아직 안심 못하지, 하면서 은근히 담배를 다시 피는 내 모습을 기대하는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의지는 확고하다..
오오사카 하프 다음에 출전한 대회는?
9월 23일 미시노미야 국제 하프마라톤 대회. 첫 출전 이후 6개월 정도 기간도 있었고, 나름대로 연습도 열심히 했는데, 그날 날씨가 엄청 더웠다. 기온이 30도에 습도가 95%. 처음에 오바페이스를 해서 나중에 엄청 힘들었다. 중간에 쓰러지겠더라고. 하여간에 1시간 45분 41초에 완주를 했다. 시행착오 공부를 한 셈이다.
하프에 첫 출전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와이프하고 애들은 마라톤을 모르니까, 골인 지점에서 기다리면서, 선두는 물론이고, 나중에 할머니, 할아버지도 들오어는데 내가 아직 안오니까, 우리 남편은 언제나 올까,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골인해서도 이제야 왔냐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얼마 뛰었냐고 묻길래 한국 거리로 하면 50리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래도 감을 못잡는 표정이었다. 당신, 우리집 전철역에서 어느 역까지의 거리가 대충 50리야 하니까 그제서야 감이 오는 듯, "아니, 그걸 뛰었단 말이야? 야, 당신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하더라. 애들도 "그럼 그동안 한 번도 안 쉬고 뛰었단 말이야?" 하길래, 그럼 당근이지...했더니 "와, 우리 아빠 대단해!" 하더라. 그런데 말은 그래도 그 감을 백프로는 모른다.
나도 처음에는 가족들 전도할려고 노력 많이 했다. 딸이 둘인데(윤주와 민주, 초등 6학년, 3학년) 공원에 데려가서, 우리 뛰어보자, 뛰면 참 재미있어, 라고 꼬시면서 한 2K는 헥헥 거리면서 뛰어보았는데, 조금 지나니까 죽어도 안 한 대. 결국 전도에 실패하고 이제는 포기 상태이다.
가족들을 전도하는 노하우도 공개적으로 개발해야겠다.
나금풍씨가 별 수단과 방법을 다썼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와이프에게 5킬로 출전하면 출전료를 주겠다는 식으로까지 유도를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우리 와이프 같으면, 아, 나는 싫어 5만원 안줘도 좋아, 할 게 분명하다. (술잔이 잠시 오가면서 얘기가 잠시 다른 쪽으로 흐릅니다.)
다른 얘기지만 나는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상당히 노력을 했었다.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상당히 심취를 했었다. 대학교(영남대 무역과 77학번)도 처음에는 국문과나 영문과를 갈려고 했는데 선배 말이 "국문과 가면 밥도 못먹고 살어" 하길래, "밥을 왜 못 먹는데?" 물었더니, "마, 정신차려. 네 실력이면 상대 법대를 가도 돼." "상대 가서 뭐하는데?" "마, 현실 감각을 가져야지" 등등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찌어찌 상대를 가게 됐다.
대학때나 입사 3년차 까지만 해도 신춘문예 발표 되면 신문 다 사서 모아 읽어볼 정도. 대학교 가서는 신문기자를 좀 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학 다니면서 한때는 상대가 내 적성이 아닌 거 같아 국문과 전과를 심각히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나는 소설가의 꿈을 접은 것이 최인호, 한수산, 특히 한수산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문학적인 평가는 접어두고라도, 우선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는데, 내가 볼 때는 그 두 사람의 글을 보면서 내가 소설가가 된다고 가정했을 때 두사람보다 재미있는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그때 포기했다.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아줌마∼ 여기∼. 청국장 찌개 하나. 가볍게. 밥도 가져와요? 밥? 아니, 그냥 같이 떠 먹을 수 있게. 잘 알면시롱.)
달리는 다이어리는 요즘도 계속 쓰는가?
요즘은 게을러졌다. 다이어리 구성이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월별로 한 장짜리가 있고 그 다음 매일 일력이 있는데, 대충,. 날씨, 달린 거리, .그 달의 합산 거리, 간단한 내역 등을 적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요즘은 앞에 월간만 쓴다.
네티즌 마라토너들이 모이게 된 계기는?
사이버 공간에서만 만나도 충분히 얘기는 된다. 실제로 금년 4월 28일까지는 그렇게 해 왔다. 그때 선주성씨가 주도해서 한번 만나자는 얘기가 나왔고, 만나고 보니 단순히 사이버 공간에 있을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틀렸다. 나로서는 5, 6개월 정도 이름만 익숙해진 사람들을 만난 셈인데, 아,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하는 반가운 느낌이었다. 첫 모임 후 한달에 한 번 만나는게 자연스러워졌고 요즘에는 그도 부족해서 가끔 번개 모임으로 만나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알다시피 마흔 살 넘으면 자기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다. 그점에서 네티즌 마라토너 모임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만나 허심탄회하게 공통의 화제를 이야기하면서 친해지고, 서로를 알아가는 기쁨이 있다. 예를 들어 특히 구미의 권수근 박사 같은 분은 이 사이트, 사이트의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노다지를 발견한 것처럼 며칠을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풀 코스 첫 대회 출전은?
오오사카, 미시노미야 하프, 아오가끼 노미지 하프(11월 1일) 까지 하프만 세 번 뛰고, 11월 23일 복지산 마라톤 대회에 풀코스로 출전했다. (그때의 대회 수기 하나가 마라톤 교실에 올라있습니다.) 어차피 달리기를 시작한 거 풀코스를 뛰어보자고 해서 신청을 했다. 하프와 풀코스는 단순히 거리가 두배인 것이 아니라 몸이 느끼는 하중은 네 배, 여덟 배로 온다고 하더라. 내가 정말 뛸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그동안의 연습, 세 번의 하프 뛴 경험 덕인지 첫 하프 출전할 때처럼 그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또 풀코스 뛰기전까지 그와 비슷한 거리를 한 번 뛰어보라는 말이 있어..
내 나름대로 공원을 열바퀴 열한 바퀴 등 한 삼십킬로는 뛰어보았다. 천천히 뛰면 완주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기가 생겼다. 러너즈를 보니 아마추어의 첫 번째 목표는 네시간 안쪽, 그들 표현으로 'SUB FOUR'라고 하는데, 나도 일본까지 와서 뛰는데 완주 정도가 아니라 그 네시간 안쪽에 들고 싶었다. 거리별로 나눠보니까 K당 5분 몇십초에 뛰어야 한다. 6분이면 네시간 십분이다. 만만치 않았지만 일단 목표는 서브포로 잡고 그 무렵에는 술도 안먹고, 일주일전부터 고기 먹는게 안좋다고 해서 탄수화물 중심으로 음식을 먹고, 그리고 대회 전날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인 그곳에 먼저 가서 호텔에서 잤다. 그 다음날 마누라하고, 한국에서 같이 간 친한 직원이 함께 응원을 왔다.
잠깐 대회 소개를 하면, 그 대회는 본래 만명이 참가 상한선인 대회인데, 작년에는 신청자가 조금 미달해 8890명이 참가했다. 종목은 풀코스 하나이다. 종목은 하나이지만, 9천명에 가까운 인원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참가 전에는 미리 신고 타임이 있다. 말하자면 나는 얼마쯤의 기록일 것이다, 예상해서 신고하면, 그 순서에 따라 출발 배치를 한다. 나는 세시간 40분 언저리로 신고를 했는데, 중간쯤에 출발했다.
일본은 벌써 오래전에 칩 도입했는데, 출발 지점, 하프 지점, 골인 지점 밑에 매트를 깔고, 러너가 그곳을 통과하면 센서가 감지, 자동으로 본부 컴퓨터에 입력이 된다. 그런데 9천명이 출발할려면 선두하고 골찌는 출발하는데만 칠, 팔분의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일본에는 네트 타임이라고 해서 러너의 칩이 출발지점의 매트를 통과하는 순간 부터 개인 기록이 측정된다. 상당히 합리적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골인지점에서만 측정하고 있다. 한 번은 동아마라톤이나 조선마라톤 측에 왜 안돼냐고 물었더니 그 특허를 네덜란드가 갖고 있는데 입력이 한글 입력이 안된다고 하더라. 잘 이해는 안되지만, 하여간에 실무자들의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얘기지만, 일본의 달리기, 마라톤은 우리보다 상당히 앞서 있다. 우리가 마라톤을 하면서 배워야 할 것은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식생활, 신체조건 등이 비슷하고... 그래서 러너즈 월드(미국의 전통있는 달리기 잡지) 보다는 러너즈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풀 코스 처음 뛰면서 느낀 소감을 들려준다면?
5킬로까지는 사람이 많아 뛰기가 힘들었고 10킬로 지나니까 조금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반환점을 도착했는데, 하프 뛸 때 같으면 여기가 피니시 라인인데 지금부터 온 만큼 더 가야 하다니, 그 중압감이 상당히 크게 왔다. 그때 참 좋았던게, 연도에 늘어선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자원봉사자들인데, 동네 아줌마는 물론 애들까지, 자기 돈주고 초콜렛, 생수 사가지고 달리는 사람에게 주고 있었다.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뛰는 것은 혼자 외롭고 심심하게 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윽고 30킬로 지점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한 번도 달려보지 않은 거리이다. 심정적으로도 부담되고, 실제로도 다리에 무리가 오면서 힘들기 시작했다. 그때도 동네 아줌마들이 길 옆에 늘어서서 박수 를 치면서 일본말로 간바레, 간바레 하는데, 걷도 싶어도 걸을 수가 없었다.
흔히 풀코스의 벽을 35K 지점이라고 한다. 누구나 여기쯤 오면 에너지도 고갈 되는 때이다. 그런데 나는 초콜렛을 많이 받아먹어서 그런지 뛸 만했다. 그러다가 38, 39K쯤 오니까 정말 힘들더라. 주변을 보니 이미 걷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걸을 뿐만 아니라 길가에 앉아있는 사람, 전봇대 붙들고 스트레칭하는 사람 등등. 아,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계속 뛰었다. 40K 지점을 지나면서 커브를 탁 트는데, 바로 그곳에 와이프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와 있었다. 솔직히 그때는 정말 힘들 땐데 저기서 한국말로 "와, 온다, 온다, 윤주아빠 온다!" 하면서, .박수 치면서, 같이 응원 나온 직원은 비디오 카메라 찍지, 와이프도 사진찍지 하는데, 그걸 보면서 어떻게 걸을 수 있겠어?
뛰었지. 마치 힘이 남아있는 것 처럼 여유있게 손도 흔들면서...그러다 보니 이제 남은 거리는 1.5K, 1K 밖에 안되니 그거야 또 뛸 수 있지. 그래서 결국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었다. 기록은 3시간 48분 42초.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것도 훌륭한 기록이라고 하더라. 마흔살 넘은 사람 치고는. 그 뒤 한국에 들어와서 동아마라톤 뛸 때는 4시간 3분을 기록했다.
골인했을 때의 느낌은?
야, 내가 마라톤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풀코스를 뛰었구나. 그것도 한 번도 안 쉬고. 남들은 주저앉아 쉬기도 하던데. 나도 해냈구나, 하는 엄청 뿌듯한 느낌이 왔다. 한편으로는 내일 되면 다리가 엄청 아프겠구나, 회사도 근무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도 들고. 옷갈아 입고 캔 맥주를 하나 마시는데, 그때의 맛이란...그런데, 그때 또 담배를 다시 한 번 피고 싶은 기분이 들더라고. 근데 안 피웠지.
요즘도 완주 기록증을 볼 때면 기분이 특별할 것 같다.
기록증만 모아놓는 파일이 있다. 일본 마라톤 대회는 재미있는 것이 중간 중간에 사진가들이 스냅사진을 찍어 배번 확인해서 집으로 보내준다. 조그맣게 샘플을 보내면서, 당신 사진을 패널로 만들어 줄 수 있 이렇게 하면 얼마, 저런 사이즈로 하면 얼마하는 식이다. 언제 찍었는지 모르니 사진은 자연스럽고 멋있더라. 그렇게 찍은 사진이 집에 걸려있다. (아줌마∼ 여기 한 병 더. 우리 한병 씩만 하기로 했지만, 먹다 보면 어디 그렇게 되나. 그렇지요. 그래서 참이슬은 세병째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풀코스 뛸 때까지의 훈련 방법이라면?
내가 볼 때는 내가 해온 방법이 어떻게 보면 전통적이고 교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만남의 광장 보면, 예를 들어 김진홍씨의 입문기를 보면 시작한지 두 달 만에 풀코스를 세 번을 뛰고 결국은 부상을 당해 몇 달을 뛰지도 못하고 그랬다고 하는데, 나는 조깅을 시작하고 일년 2개월 만에 풀코스를 뛰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마흔살 넘어 시작한 사람의 경우는 그렇게 일년 정도의 훈련을 쌓고 풀코스를 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싶다. 왜 교과서적이냐는 표현을 쓰냐 하면, 나는 2년 가까이 뛰었지만 이렇다할 부상을 입어본 적이 없다. 조금 안 좋다 싶으면 무조건 쉰다. 나으면 다시 뛰고... 병원을 갈 정도로 나빠진 적이 없다. 일본 러너즈 잡지의도움을 받으면서 조금씩 거리를 늘려간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 지났을 때 남들은 시작한지 몇 달만에 하프, 풀코스를 뛴다는데, 나는 늦은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하루이틀 뛰고 그만둘 것도 아니고, 적어도 60, 70살까지 뛸 것인데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내가 해온 방법이 무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주한 지금의 신체조건은
풀코스를 완주하고 재봤더니 62.8K까지 되더라. 내가 봐도 정말 놀랠정도로 빠졌다. 스스로도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63.8에서 64정도. 요즘은 65까지 올라가면 쇼크먹는다.
직장 동료들이 많이 부러워하겠다.
오년 전 일본 떠나기 전 내 얼굴은 이랬었다.(강호동 만한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때의 내 몸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처음 귀국 했을 때 (아직 사보에 쓴 완주기 같은 것을 못 읽어) 내가 달리기하는 줄은 모르는 사람들은 "어, 왜 그렇게 말랐어? 병 걸렸었나?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고 일이 힘들었으면 저 지경이 되었을까..." 라고 했었다. 반면 달리기 하는 줄 아는 사람들은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 대단하다."라고 한다. 그런 얘기를 할 때 마다 이때다 싶어 "당신도 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시작만 해봐라"라고 전도를 한다.
직장 전도를 많이 했겠다.
두세 명 있다. 아직 대회 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중 한 후배는 엊그제 토요일 날 5K를 뛰었다고 와서 보란 듯이 자랑하더라. 그때까지 5K는 굉장히 먼 거리인줄 알았다면서...바로 그거다. 42K도 처음에는 대단하지만 5K 두세번 뛰고, 하면 10K가 보이고, 그러다 보면 42K도 언젠가 보이기 시작한다. 음...나도 직장에서 마라톤 전도의 한 알의 밀알이 되어가고 있나?
2년 가까운 달리기 기간 동안 얻은 것이라면...
첫째는 표면적으로 일단은 잔병치레가 없어졌다는 것. 예전에는 감기, 편도선이 수시로 왔었다. 내가 알기로는 의학적으로는 편도선은 한 번 걸리면 안없어지는 걸로 알고 있다. 한 번 걸리면 물도 못마실 정도로 부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이 없다. 그리고 내가 원래 십이지장궤양이 있다. 그것도 20년이나 갖고 있는 병이다. 그건 한 번 생기면 불치병에 가깝다. 약먹으면 괜찮고 안먹으면 재발하고.. 그래서 술먹으면 안되는데 회사 다니면서 어디 술 안먹을 수 있나. 그래서 대한민국처럼 궤양약이 발달한 나라가 없다고 한다. 그 최고의 궤양약을 먹으면서 지낸 세월이었는데, 요즘은 약 안먹어도 괜찮다. 또 하나는 매일 몸이 가쁜하다. 몸이 찌들었을 때는 회사를 가도 일할 의욕도 안난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서 뛰면, 뛸 때는 힘들지만 오히려 가쁜해지고 일할 의욕, 아이디어를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그 다음에 최근에 느낀 것으로는 아까도 말했듯이 달리기를 하면서 각계각층에 있는 사람과의 교류의 기회도 생겼다는 점이다. 그런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어디서 이렇게 만나 친해지겠는가. 만남의 광장에서 만난 4, 50명에게 전화해서, 나, 송재익입니다, 하면 다 반갑게 받아줄 것 같고, 오늘 소주 한잔 합시다, 라고 하면 싫어할 사람 없을 것 같고... 그것도 달리면서 얻은 엄청난 효과라고 생각한다..
혼자 연습할 때와 대회 레이스 때의 느낌은 다를 것 같다.
평소 연습할 때는 혼자이다. 요즘에는 반달 모임에서 일주일에 한 번 같이 뛰는 것이 있지만... 혼자 뛸 때는 사실 오늘 내가 10K를 뛰겠다고 시작하면 어느 정도 뛰다가 웬만큼 뛴 것 같고, 출근 시간도 있고 해서 그냥 들어갈 때도 있다. 저녁에 뛸 때도 15K를 뛰겠다고 시작하지만, 밤도 늦었으니까 하면서 웬만하면 도중에 들어갈 때도 많다. 그러나 대회는 스타트 라인이 있고 골인 라인이 있다. 옆에 뛰어가는 사람의 호흡을 느끼면서 기록도 의식하게 되고, 길가에 서서 박수쳐 주는 사람도 있고 등등 여러 가지가 다르다.
한가지, 귀국해서 지금까지 대회를 세 번(서울 마라톤 하프, 동아마라톤 풀 코스, 사카 하프... 인터뷰 시점은 중앙 하프 전이었습니다...) 뛰었는데, 응원하는 사람이 일본보다 절대적으로 적은 것이 아쉽다. 물론 한강 변에 나와서 응원하기도 어려운 것이겠지만, 자원봉사자도 별로 없고, 조직위원회에서 초코파이 놔둔 정도인데, 엄청 힘이 안난다. 일본 대회의 분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양쪽을 다 뛰어본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대회는 힘이 안난다. 막말로 지난번 경주에서 뛸 때 중간에 걷다가 코스 밖에 나와서 스트레칭도 하다가 했지만, 길가에 사람들이 서 있으면 챙피해서라도 그렇게 못할 텐데, 논밭길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으니 그렇게 되더라고.
요즘은 반달 코디를 맡아 바쁘실 것 같다. 성격이 무척 적극적이신가 보다.
우선 내 성격이 적극적이라고 한 부분에 대한 것에 대해 말한다면, 내가 직장생활 하면서 제일 내 스스로 마음에 안드는 것이 바로..적극성이 없다는 것이다.
와, 그런가요?
이해가 안갈 지 모를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직장 윗사람도 나를 두고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가끔 하고 내 자신이 생각해도 그렇다. 그러나 만남의 광장 사이트에서만은 열심히 한다. 왜냐. 선주성씨가 주도해서 처음 만났을 때 앞으로는 지역별로 달리기 모임을 하는 것도 좋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왔고, 반포에서도 기존 서울 마라톤 멤버들도 뛰고 있으니 거기서도 한 번 모이는 것도 좋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그래서 모였는데, 선주성기자가 집이 남양주라 멀더라고. 우리 네티즌 모임에서 그쪽 모임을 주도할 역할이 필요한데, 그 반포는 우리 집에서 뛰어가도 15분 밖에 안걸려. 내가 제일 가깝더라고. 그래서 내가 해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나는 모임을 주도하는 소질이 없어. 남들이 하면 잘 따라가는데 주도하는 것은 절대 소질이 없어...하고 있었다.
정말 의외네요.
의외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좀더 지나보면 알 것이다. 직장에서도 모임을 주도하거나, 일을 주도하는 것은 소질에 안맞았었다. 그렇지만, 단지 집에 가까우니까 네티즌 모임에서 공지하고 하는 것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했더니, 선주성씨가, "형님, 고맙습니다. 해주십시오."해서 맡게 됐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요즘도 가끔 의문이 드는 것이 내가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제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잘 모르겠다.
코디의 입장에서 반달 모임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겠다는 계획도 있는가.
처음에는 반달 모임이 네티즌 마라토너, 서울마라톤이 반반이었다가 지금은 네티즌 마라토너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서울마라톤 분들과 친화감이 조금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은데...어떻게 할 것인가 해서 박영석 회장님하고는 몇 번 말씀 나눈 적이 있다.
직장 생활을 조금 엿보고 싶다. 우선 입사는? 처음 맡은 업무는?
83년 12월. 중전기 설비 파트이다.
중전기?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전기가 아닌, 변전소, 발전소 등에서 사용하는 전기이다. 회사가 종합상사이다보니 그런 것을 해외에 수출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해외수출업무니 출장이 많았겠다.
첫 출장지가 당시 일반 사람이 가보니 힘든 방글라데시였다.(여기서 아줌마가 다가왔다. 차장님, 저 갈께요. 어? 갈라고? 사장이 손님보다 먼저 가면 어떻해. 스트레스 받네 정말...)
직장생활은 즐거운 편이겠지요?
글쎄... 당장 오늘 하루만 보아도 참 힘들었다. 한달에 한 번 사장이 40개 팀장 모아놓고 주재하는 확대간부회의 날이었는데...많이 깨졌다.
요즘 업무는?
화공설비. 정유, 석유, 가스설비 같은 것을 수출하는 업무이다.
현재 업무를 맡은 지는?
지점나가기 전에 담당과장 1년 반, 지점 나가서 5년 동안.
깨졌다고 했는데, 자주 깨지는가?
내가 이 직장에서 막말로 인정받고 잘하고 있느냐고 스스로 평가하면 내 자신이 평가하기로는 낙제점이다. 내 자신이 진짜로 마음에 안든다. 내가 봐도 일을 잘 못하는 것 같고, 윗사람이 봐도 그렇다.
음, 지금 하신 그런 얘기를 만남의 광장에 그대로 올려도 되나요?
나는 오히려 전해졌으면 좋겠다. 다른 얘기지만 얼마전 김명렬씨가 광화문 모임에 다녀와서 올린 글, .각계각층에 사람들이 다 성공을 이룬듯하다면서 괄호하고 나만 빼고, 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을 읽으며 속으로 나도 빼고, 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을 사람들에게 적나라하게 하면 나도 빼고 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월급쟁이 중에 자기가 만족할만한 직장생활하면서 윗사람에게 인정받으면서 앞으로 무궁히 뻗어나가면서 그 직장에서 출세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적어도 자기 직장에서 프라이드를 가지고 이 직장에서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니는 사람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그 범주에도 못들어간다.
언제부터 그 생각이 들었나.
꽤 오래됐다. 다 올려도 좋지만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항상 나는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인정을 못받는 경우가 많았다.
직장생활 16년 동안 직장에서 가장 성취한 것을 꼽는다면
해외 프로젝트를 추진해왔으니까 몇천만불짜리 계약 건 갖고 고생하다가 결국 우리 회사와 계약하게 됐을 때. 그럴 때 성취감을 느낄 수는 있었다.
차장이라는 위치는 직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위치인가.
직장 문화라는 것이..우리가 신입일 때 과장, 차장하면 대단한 존재였다. 그러나 기업이 성숙하고 발전하다 보니, 지금은 과장, 차장이라는 것이 별볼일 없는 존재가 되버렸다. 우선 숫자로도 많고... 희소가치, 존재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신입 시절의 차장이라면 군대로 비유해 연대장 정도 됐는데, 지금은 같은 차장이라도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되버린 것이라는 얘기같다.
딱 맞는 얘기이다. 그때는 과장한테 감히 말도 못 붙였는데 지금은 신입하고 차장하고 같이 지내는 것이 되버렸다. 어느 회사나 비슷한 사정이다. 한편으로는 종합상사의 역할이라는 것이 옛날에 비해 엄청 줄어들었다. 말하자면 옛날에는 상사라는 것이 영어 잘하는 사람 많고 해외지점 많아서 정보와 유통에 강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그만 메이커라도 출장 다 직접 가고, 인터넷 통해 정보 다 얻고 있다. 그래서 종합상사가 설자리가 없어진다. 종합상사 무용론까지 등장하는 시기이다. 그런 식으로 되다보니 여기서 계속 있을 때 어떤 비전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많이 드는 때이다.
그런 회의는 공통적인회의가 아니겠는가.
물론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강도가 다르다. 에이 모르겠다 하고 세월에 몸을 맡기면 견딜수도 있겠지만 뭔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못견딘다. 미친다.
직장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라면.
옛날 신입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이 회사 들어온 이상 사장이 되볼 것이다라고 대답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사생활이 어느 정도 지난 후 부터는 사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내가 언젠가 이 회사를 그만두고 났을 때 내가 이전 직장, 그러니까 현대에서 한때는 이런 일을 하고 있었지, 라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독립을 꿈꾸는 것인가.
독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현재 같은 직장생활에서는 끝까지 남아서 사장까지 해보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있는 동안 잘 버티자가 주된 분위기이다. 막말로 사람을 줄여야 되는 시대니까. 옛날에는 신입사원이 한 사람 그만둬도 온 부서 사람이 나 모여서 회식을 했었다. 지금은 그런 것 없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이 회사가 나를 밀어낼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는가.
그 질문을 한 단계 더 뛰어넘어서 일본에서 들어오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직에서 나를 부담스러워 한다면 언제라도 그만두겠다. 이 얘기는 나로서는 중요하다. 조직에서 나를 부담스러워할 때... 조직이 그만두라라 하면 당연히 그만두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부담스러워 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막말로 나는 들어와서 이렇게 생각했다. IMF니 뭐니해서 사람들 부지기수로 짤릴 때...짤를래면 빨리 짤라라고 생각했다. 짤리면 뭘 할 것이라는 계획은 없지만 뭘해도 잘 할 것이란 자신은 있다.
누군가 알라딘의 램프를 주고 소원 세 개를 쓸 수 있다고 한다면.
근데 마라톤하고 관계없는 얘기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인터뷰를 통해 달리기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 이 인터뷰의 반 정도는 그 사람의 삶에 관한 것이다. 직장생활을 여쭌 것도 그런 뜻이다.
오케이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대답한다면 첫째, 의외일 지 모르지만, 스트레스 안받는 삶을 살고 싶다. 둘째, 직장이 바뀌든 어떻든 내가 뛰고 싶을 때 뛸 수 있는 삶을 살 고 싶다. 세 번째, 생각은 안나지만, 음... 하여튼 우리 두 딸에게 부끄럽지 않는 아빠가 되고 싶다. 요즘 직장생활하면서 생각하는 것이(특히 가끔 남산 번개 모임 같은 것을 한다고 연락이 와는데 참석하고 싶어도 회사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못갈 때) 만약 내가 개인사업을 한다 하면, 아침 여섯시부터 여덟시까지 두 시간 뛰고, 아홉시 부터 저녁 때까지 일 열심히 하고 저녁때 한 시간 정도 뛰고 쉴 수 있는 그런 삶이 된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 현재 시간은 밤 열한시 경. 삼겹살 집이 문닫을 시간이 돼서 우리는 허름한 호프집, 길가에 내놓은 탁자로 자리를 옮겼습습니다.)
평일에 규칙적으로 운동을 못하시는 편으로는 주말에 상당히 많은 거리를 달리는 것 같다.
두가지 측면에서 얘기하자면, 매일 평일 술마시면서 평일날 한두번, 두세번 운동하고 주말에 20, 30K 뛰고 있다. 대단하다면 대단하고, 또 한편에서 보자면, 나보다 훨씬 늦게 시작해서 훨씬 빨리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니다.
꿈꾸는 기록이라면..
처음에는 네시간 안쪽에만 뛰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는데 첫 대회에서 그 기록을 달성했다. 그래서 이건 꿈으로 삼을만한 기록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손기정씨가 베를린에서 우승한 기록을 따져봤더니 두시간 47분 얼마더라. 꿈을 꾸어본다면 세시간 이내이다. 두시간 59분 59초도 좋다. 그렇게 두시간대에 뛰어보고 싶다. 하지만 욕심은 안 부린다. 쉽게 이뤄질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금풍도사가 참가할려고 하는 보스톤 마라톤 대회는 참가자격이 40세 45세까지의 경우 대회 당일 일년 안쪽으로 3시간 20분에 뛴 기록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직 그것도 안된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대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간 제한을 두고 일년 안에 뛴 기록증을 갖고 참가할 수 잇는 대회. 그런 대회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라톤 인구 저변이 두텁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기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한다면...
달리기는 내 자신이 만족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어떤 누가 시켜하는 것이 아닌, 내 자신이 기분좋고 만족해서 하는 것이다. 음... 표현이 별로 마음에 안드는데.. 하여간 내 자신의 만족...나의 만족...내가 만족하는 것이라서 기본좋은 것이 달리기이다. (아줌마, 아니, 언니....5백 하나 더)
달릴 수가 없다, 라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달리기를 빼놓고는 이제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힘들고 비참하다...막말로 최악의 경우에 교통사고가 나서 달릴 수가 없다고 하면..너무 힘들고 비참할 것이다..솔직한 얘기로 자살할 것 같다.. 몰라. 그 상황이 되면 어쩔지 모르지. 그건 그렇고, 김명렬씨가 아까 그 자리가 아니라 여기서 보니. 얼굴이 많이 또 틀리네. 음... 처음 볼 때보다는 잘 생겼네...(하하, 드디어 송재익 반달코디님이 소주 한병반, 5백 두잔의 주량으로 취하셨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실은 저도 제법 취했습니다. 그 말에 저도. 그렇지요?, 라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으니까요...)
달리기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처음엔 많았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안드는 편이다. 내가 좋아서, 그것도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하는 일인데 힘들다고 느끼면 되겠는가. 애들이 놀러가자는 것을 뿌리치고 하는 일인데... 이전까지만 해도 - 가까운 예를 들자면, 지난 해 경주동아마라톤 갔을 때인데, 한국에 와서 풀코스 처음이었는데... 야, 벌판하고 마을을 뛰는데 춥고 배고프고 미치겠더라고. 그때 생각이, 야, 송재익. 너 왜 사서 고생이니. 이런 날은 그냥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 덥고 코미디나 보면 제일 좋은 것인데...내 자신이 한심하고 그렇더라고. 그때는 풀코스를 뛰어야 겠다는 사명감도 느껴지지 않고, 그냥 내 자신이 싫어졌었다. 그런데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출발하고 두시간 20분이 지난 거야.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하는 거지. 미치겠더라고. 하여간 뛰다가, 걷다가 하면서도 어떻해? 끝까지 가야지. 결국 4시간 3분 28초로 들어왔는데 뛸 때의 심정에 비하면 그것도 엄청 잘 들어온 거지.
요즘 훈련 방식은 즉흥적인 부분이 좀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나름대로는 로직을 세워서 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기에 관한 도움은 역시 러너즈?
그런 셈이다. 하지만 국내 러너를 위해서는 조선일보 마라톤 교실에 보면 내가 처음 러너즈에서 만나 미치게 좋아했던 내용이 충분히 다 있다.
살면서 인생의 하이라이트 였던 순간은?
아직 없다. 그게 불만이긴 하지만... 오늘 밤 그런 질문 받으면 불만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일 아침이 되면 달라질게 하나도 없다. 평소와 똑같이 정시에 출근해 지난 16년 동안 그런 것처럼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긴 인터뷰가 끝났습니다. 시간은 이미 열두시가 넘었고, 녹음 테이프는 180분 이상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달리기가 인연이 돼서 시작한 인터뷰인데, 아마 이 인터뷰로 인해 내일 아침 송재익님은 또 달리기를 빼먹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재익님께 사족 한마디... 여러 좋은 말씀, 솔직하게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늦게 글 올려 죄송합니다.)
서울 번개때 느낌이 심상치 않았는데. 내 짐작이 많았구먼. 아무튼 즐달하고, 여기 카페에서는 자네가 앞장섰으니 자네 소원 풀었네. 직장 또한 열심히 혀. 나 같이 계약직으로 전락하면 안돼. 그리고 애기아빠 꼬리 내릴 수 밖에 없네 뭐. 이렇게 긴 글 읽다가 숨 넘어갈 뻔 했네 그려. 기자녀석도 고생했구먼.
이번주 금욜 12/12날이 만 20년임. 오늘 아침 창립 기념식에서 이미 금 10돈짜리 행운의 열쇠 받았슴. 만 20년이 되고 보이 참 이제 떠밀려 나가야 할 날이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마니 듬. 다 운명이거니 생각하고 있슴. 이 글은 나도 몇년전꺼라 잊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읽어보았슴.근데 솔지키 넘 길다.
첫댓글 흐미~~ 이거 몇년전(1999년) 껀데.... 이런 통일 신라적 야그를 새삼스럽게 왜 퍼왓대? 쑥스러버라~~~
졌다! 꼬리 내린다!
서울 번개때 느낌이 심상치 않았는데. 내 짐작이 많았구먼. 아무튼 즐달하고, 여기 카페에서는 자네가 앞장섰으니 자네 소원 풀었네. 직장 또한 열심히 혀. 나 같이 계약직으로 전락하면 안돼. 그리고 애기아빠 꼬리 내릴 수 밖에 없네 뭐. 이렇게 긴 글 읽다가 숨 넘어갈 뻔 했네 그려. 기자녀석도 고생했구먼.
이 글 춘마 마라톤 에세이에서 읽었는데 형이었쓰~~. 다시 읽느라 질려 나자빠진다.
마우스 wheel만 돌리는 데 23바퀴 돌렸다. 집게 손가락 바닥이 아프다. 진짜 졌다.
대단허이 .. 20년근속이 언제더라 . 강남벙개맞을때 20년 근속 추카해 주기로 했는디
나도 읽은 적 있다. 배째라 이후 대전의 박신석씨, 이름이 기억 안나는데 당시의 걸출했던 묘령의 여성 마라토너와 인터뷰도 이어졌고 재미있었는데 시리즈가 아쉽게 중단되더라. 근디 인터뷰함서 녹음테푸 몇 개나 갈았었는감?
이번주 금욜 12/12날이 만 20년임. 오늘 아침 창립 기념식에서 이미 금 10돈짜리 행운의 열쇠 받았슴. 만 20년이 되고 보이 참 이제 떠밀려 나가야 할 날이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마니 듬. 다 운명이거니 생각하고 있슴. 이 글은 나도 몇년전꺼라 잊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읽어보았슴.근데 솔지키 넘 길다.
금 열돈이라구??? 열쇠루 썩히면 모해... 나랑 커플링 하장~~.
20년 근속. 그거 대단한 것이데이. 나도 했거든. 근데 남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지나간 세월, 그냥 슬퍼진다. 아무튼 축하한다. 13일날 한잔 안할 수가 없네
애주와 쥔장은 맨날 금타령이냐? 애주 껏 노리더니 이제는 애주한테 5돈은 나눠줘야 될 것 같은디?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
나두 밥 벌러 다닌지 20년 됬다! 지난 직장에서 15년 다녀서 금메달은 못 받았어.하지만 마라톤 완주 메달을 올해 받았으니 난 그걸루 족한다.(참가비 내구 고생 직싸게 해서 받은게 좀 다르지만...)
나도 이 글 읽은 적 있는데, 이게 배째라 장군 이야기였다니 아우~~`신기하구만....아무튼 ㅊㅋㅊㅋ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 다 읽지는 못했네. 장군 대단한건 다 알지. 20년 근속 축하하고 20년간 잘 다니게 해준 회사에 감사하세.
와 길다 길어... 밤에도 기니(?)... ^^~~ 난 얼마전에 아이들 돌반지와 회사다닐때 받은 금반지 팔아서 내 개목걸이 하나 장만했다... 비상금으로... ㅎㅎㅎ ^^~~
읽는 것도 이틀에 나누어서 읽었네. 글구 쥔장 20년 근속이라구. 정말 축하해야 허것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