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친구들은 이 학생의 집으로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다, 라디오끈으로 이 학생의 목을 묶어 개처럼 끌고다니고,
바닥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개처럼 핥아 먹게 했다. 이 모욕을 견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면 안된다. 우리 인류는 자연이든 집단이든 수시로 덮쳐오는 시련, 환난, 고난을 물리치고 오늘날 이렇게 우뚝 서 있다.
1981년, 내가 늦은 나이에 군에 갔는데, 나보다 어린 선임병들이 내무반 바닥을 기어가라는 벌을 준 적이 있다.
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던 자리라 거부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개처럼 더러운 내무반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나는 옥상에 올라가거나 목을 매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이 목숨이 누가 준 것이며, 이 고귀한 생명을 어찌 그런 발칙한 상상으로 훼손한단 말인가.
취침 전, 나는 함께 모욕을 받은 동기들을 불렀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대학원까지 마치고 군에 갔기 때문이다.
새벽 두 시에 마침 불침번을 서는 동기가 있었다. 내가 말했다.
"우리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린 나라 지키러 군에 왔지 저런 놈들에게 모욕받으러 온 게 아니다.
새벽 두 시, 우리 모두 기상한다. 그리고 걸레자루를 하나씩 준비한다. 그런 다음 우릴 모욕한 선임병 동기들을 하나씩 맡아 내가 신호할 때까지 때린다. 다만 부상을 입혀서는 절대 안된다. 정신적인 폭력만 가한다고 보면 된다."
새벽 두 시,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한 스물여섯 살 짜리 동기가 우릴 깨웠다.
나는 먼저 주번사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멀리 있었다.
선임병 동기는 네 명, 우리 동기는 다섯 명, 내가 내무반 전등 스위치를 잡고 각자 잠자고 있는 선임병들을 찾아 그 앞에 서라고 했다.
"내가 불을 켜는 순간 담요 위로 공격하고, 내가 불을 끄면 중지한다. 그런 다음 의무실로 집결한다."
우리 동기 네 명이 선임병 네 명 앞에 자리를 잡았다. 지정해주지는 않고 마음대로 서라고 했더니 알아서들 원한 관계에 따라 자릴 잡았다.
불을 켰다. 그 즉시 매질이 시작되었다. 담요를 덮어 쓴 채 자던 선임병들은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3분간 나는 형벌을 집행했다. 그러고는 불을 껐다.
갑작스런 소동에 내무반원 전원이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그들을 향해 내가 조용히 말했다.
"전원 취침!"
사병들은 즉시 담요를 덮고 누워 잠을 자는 척했다.
우리 동기들이 내무반을 나간 뒤 내가 마지막으로 나섰다.
우리가 의무실에서 기다리니 아니나다를까, 선임병들과 우리 동기 사이에 있는 고참이 먼저 찾아왔다.
말하자면 중재자다.
우리는 "같이 영창 가자."고 요구했다. 물론 협상용 발언이다.
나는 혹시 모를 영창에 가게 될까봐 작전시간도 조심해서 정하고, 폭력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들키지 않으려고 주도면밀하게 했지만, 혹시 걸릴 경우 부대 내 징계로 끝낼 수 있는 수준의 폭력만 가한 것이다.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은 우리 요구에 기겁했다.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테니 이 선에서 모든 걸 끝내자고, 중재자를 통해 연락해왔다.
나는 한 가지 더 요구했다. 내무반 권한(당시 주번판을 주고받는 것으로 권력승계가 이루어짐)을 그들에게서 박탈하고, 중재자가 포함된 동기들이 이어받으라고 요구했다. 그 동기 중에는 내 대학 후배도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렇게 요구한 것이다.
협상 끝에 우릴 모욕한 선임병들이 주번판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만나서 악수하고 서로 격려했다.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우리는 내무반으로 돌아가 모두 잠을 잤다.
선임병들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을 이어갔지만 이미 권력은 넘어와버렸다.
이후 구타도 모욕도 사라졌다.
이런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내가 그때 맞서지 않았다면 고질적인 내무반 구타, 기합, 모욕이 일상적으로 계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저항함으로써 이후 그런 것들이 다 없어졌다.
우리 아버지는 육이오전쟁 때는 질병으로 입대하지 못했다가 전후에 가셨는데, 군대 폭력이 지긋지긋했다고 늘 회상하셨다.
우리 막내는 청송교도소에서 경비교도대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면회갈 때 보니 무릎팍을 하도 맞아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땐 내가 직접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어 울분을 안고만 있었다.
내가 우리 막내 처지였다만 난 참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영창가는 한이 있어도 소대장인가 하던 그 폭력범을 기어이 응징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만으로도 막내 면회갔을 때 느꼈던 그 분노가 마구 치민다.
난 고등학교 1학년 때 교련교사가 기합을 너무 자주 주고, 폭력적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걸 보고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학교로 옮긴 적이 있다. 덕분에 난 고등학교만 4년을 다녔다.
그 교련교사는 이듬해 기어이 내 친구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나서야 폭력을 그쳤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실패한다. 담금질일 뿐 결국 제련되는 것이다.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 <사회적 관계>를 지혜롭게 가꿔나가는 학습을 더 잘 시켜야 한다.
투신 자살한 학생이 좀 더 용기를 냈더라면, 부모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교사들이 좀 더 애정을 가졌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살자면 그런 의무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아래 유서 전문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그래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가 뭔지 똑똑히 알 수 있다.
피하지 말자. 눈물이 흐르더라도 끝까지 읽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쓰자.
이렇게 논리정연하게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학생을 잃다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열네살 나이에 투신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전문
- 제가 그동안 말을 못했지만, 매일 라면이 없어지고, 먹을 게 없어지고, 갖가지가 없어진 이유가 있어요. 제 친구들이라고 했는데 ○○○하고 ○○○이라는 애들이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절 괴롭혔어요. 매일 라면을 먹거나 가져가고 쌀국수나, 용가리, 만두, 스프, 과자, 커피, 견과류, 치즈 같은 걸 매일 먹거나 가져갔어요.
3월 중순에 ○○○라는 애가 같이 게임을 키우자고 했는데 협박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매일 컴퓨터를 많이 하게 된 거에요. 그리고 그 게임에 쓴다고 제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 등수는 떨어지고, 2학기 때쯤 제가 일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 친구들이) 계속 돈을 달라고 해서 엄마한테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담배도 피우게 하고 오만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고, 빡지까지 써줬어요. 게다가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때리고 나중에는 ○○○이라는 애하고 같이 저를 괴롭혔어요.
키우라는 양은 더 늘고, 때리는 양도 늘고, 수업시간에는 공부하지 말고, 시험문제 다 찍고, 돈벌라 하고, 물로 고문하고, 모욕을 하고, 단소로 때리고, 우리가족을 욕하고, 문제집을 공부 못하도록 다 가져가고, 학교에서도 몰래 때리고, 온갖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는 등 그런 짓을 했어요. 12월에 들어서 자살하자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저를 막았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저도 정말 미치겠어요. 또 밀레 옷을 사라고 해서 자기가 가져가고, 매일 나는 그 녀석들 때문에 엄마한테 돈 달라하고, 화내고, 매일 게임하고, 공부 안하고, 말도 안 듣고 뭘 사달라는 등 계속 불효만 했어요. 전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너무 죄송했어요. 하지만 내가 사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족이었기에 쉽게 죽지는 못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몸은 성치 않아서 매일 피곤했고, 상처도 잘 낫지 않고, 병도 잘 낫지 않았어요. 또 요즘 들어 엄마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냐는 전화를 했을 거예요. 그 녀석들이 저한테 시켜서 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은 다음 오시기 전에 나갔어요.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남한테 말하려고 했지만 협박을 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쯤에 ○○○이나 ○○○이란 애들이 자세하게 설명해줄 거예요.
오늘은 12월 19일, 그 녀석들은 저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어요. 그리고 5시 20분쯤 그 녀석들은 저를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무차별적으로 저를 구타했어요. 또 제 몸에 칼등을 새기려고 했을 때 실패하자 제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할머니 칠순잔치 사진을 보고 우리 가족들을 욕했어요. 저는 참아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걔들이 나가고 난 뒤, 저는 제 자신이 비통했어요. 사실 알고 보면 매일 화내시지만 마음씨 착한 우리아빠, 나에게 베푸는 건 아낌도 없는 우리엄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우리 형을 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제가 일찍 철들지만 않았어도 저는 아마 여기 없었을 거에요. 매일 장난기 심하게 하고 철이 안든 척 했지만, 속으로는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사랑했어요. 아마 제가하는 일은 엄청 큰 불효인지도 몰라요. 집에 먹을 게 없어졌거나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혼내실 때, 부모님을 원망하기보단 그 녀석들에게 당하고 살며 효도도 한번도 안한 제가 너무 얄밉고 원망스러웠어요. 제 이야기는 다 끝이 났네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그 녀석들은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알고 있어요. 우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저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저희 가족을 기다릴게요.
12월 19일 전 엄마한테 무지하게 혼났어요. 저로서는 억울했지만 엄마를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그 녀석들은 그날 짜증난다며 제 영어자습서를 찢고 3학년 때 수업하지 말라고 ○○○은 한문, ○○○는 수학책을 가져갔어요. 그리고 그날 제 라디오 선을 뽑아 제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 하였고, 5시 20분쯤부터는 아까 한 이야기와 똑같아요.
저는 정말 엄마한테 죄송해서 자살도 하지 않았어요. 어제(12월 19일) 혼날 때의 엄마의 모습은 절 혼내고 계셨지만 속으로는 저를 걱정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부모님한테나 선생님, 경찰 등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지만, 걔들의 보복이 너무 두려웠어요. 대부분의 학교친구들은 저에게 잘 대해줬어요. 예를 들면 ○○○, ○○○, ○○○, ○○○, ○○○, ○○○, ○○○, ○○○, ○○○, ○○○, ○○○, ○○○, ○○○, ○○○, ○○○, ○○○ 등 솔직히 거의 모두가 저에게 잘해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저는 매일매일 가족들 몰래 제 몸의 수많은 멍들을 보면서 한탄했어요.
항상 저를 아껴주시고 가끔 저에게 용돈도 주시는 아빠, 고맙습니다. 매일 제가 불효를 했지만 웃으면서 넘어가 주시고, 저를 너무나 잘 생각해주시는 엄마, 사랑합니다. 항상 그 녀석들이 먹을 걸 다 먹어도 나를 용서해주고, 나에게 잘해주던 우리 형, 고마워. 그리고 항상 나에게 잘 대해주던 내 친구들, 고마워. 또 학교에서 잘하는 게 없던 저를 잘 격려해주시는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바꿔주세요. 걔들이 알고 있어서 또 문 열고 저희 집에 들어올지도 몰라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아빠 매일 공부 안 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되셨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온답시고 먹을 걸 먹게 해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내가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앞에서 밝혔으니 전 이제 여한이 없어요. 저는 원래 제가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제가 진실을 말해서 억울함과 우리가족 간의 오해와 다툼이 없어진 대신, 제 인생 아니 제 모든 것들을 포기했네요. 더 이상 가족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저는 오히려 그간의 오해가 다 풀려서 후련하기도 해요. 우리가족들, 제가 이제 앞으로 없어도 제 걱정 없이 앞으로 잘 살아가기를 빌게요.
저의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저도 분명 행복할 거예요.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언젠가 우리는 한 곳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아마도 저는 좋은 곳은 못갈 거 같지만 우리가족들은 꼭 좋은 곳을 갔으면 좋겠네요.
매일 남몰래 울고 제가 한 짓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을 듣고 매일 맞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그리고 제가 없다고 해서 슬퍼하시거나 저처럼 죽지 마세요. 저의 가족들이 슬프다면 저도 분명히 슬플 거예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우리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막내 ○○○ 올림-
P.S. 부모님께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 못 전했지만 지금 전할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12월 19일, 친구들은 이 학생의 집으로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다, 라디오끈으로 이 학생의 목을 묶어 개처럼 끌고다니고,
바닥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개처럼 핥아 먹게 했다. 이 모욕을 견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면 안된다. 우리 인류는 자연이든 집단이든 수시로 덮쳐오는 시련, 환난, 고난을 물리치고 오늘날 이렇게 우뚝 서 있다.
1981년, 내가 늦은 나이에 군에 갔는데, 나보다 어린 선임병들이 내무반 바닥을 기어가라는 벌을 준 적이 있다.
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던 자리라 거부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개처럼 더러운 내무반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나는 옥상에 올라가거나 목을 매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이 목숨이 누가 준 것이며, 이 고귀한 생명을 어찌 그런 발칙한 상상으로 훼손한단 말인가.
취침 전, 나는 함께 모욕을 받은 동기들을 불렀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대학원까지 마치고 군에 갔기 때문이다.
새벽 두 시에 마침 불침번을 서는 동기가 있었다. 내가 말했다.
"우리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린 나라 지키러 군에 왔지 저런 놈들에게 모욕받으러 온 게 아니다.
새벽 두 시, 우리 모두 기상한다. 그리고 걸레자루를 하나씩 준비한다. 그런 다음 우릴 모욕한 선임병 동기들을 하나씩 맡아 내가 신호할 때까지 때린다. 다만 부상을 입혀서는 절대 안된다. 정신적인 폭력만 가한다고 보면 된다."
새벽 두 시,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한 스물여섯 살 짜리 동기가 우릴 깨웠다.
나는 먼저 주번사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멀리 있었다.
선임병 동기는 네 명, 우리 동기는 다섯 명, 내가 내무반 전등 스위치를 잡고 각자 잠자고 있는 선임병들을 찾아 그 앞에 서라고 했다.
"내가 불을 켜는 순간 담요 위로 공격하고, 내가 불을 끄면 중지한다. 그런 다음 의무실로 집결한다."
우리 동기 네 명이 선임병 네 명 앞에 자리를 잡았다. 지정해주지는 않고 마음대로 서라고 했더니 알아서들 원한 관계에 따라 자릴 잡았다.
불을 켰다. 그 즉시 매질이 시작되었다. 담요를 덮어 쓴 채 자던 선임병들은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3분간 나는 형벌을 집행했다. 그러고는 불을 껐다.
갑작스런 소동에 내무반원 전원이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그들을 향해 내가 조용히 말했다.
"전원 취침!"
사병들은 즉시 담요를 덮고 누워 잠을 자는 척했다.
우리 동기들이 내무반을 나간 뒤 내가 마지막으로 나섰다.
우리가 의무실에서 기다리니 아니나다를까, 선임병들과 우리 동기 사이에 있는 고참이 먼저 찾아왔다.
말하자면 중재자다.
우리는 "같이 영창 가자."고 요구했다. 물론 협상용 발언이다.
나는 혹시 모를 영창에 가게 될까봐 작전시간도 조심해서 정하고, 폭력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들키지 않으려고 주도면밀하게 했지만, 혹시 걸릴 경우 부대 내 징계로 끝낼 수 있는 수준의 폭력만 가한 것이다.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은 우리 요구에 기겁했다.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테니 이 선에서 모든 걸 끝내자고, 중재자를 통해 연락해왔다.
나는 한 가지 더 요구했다. 내무반 권한(당시 주번판을 주고받는 것으로 권력승계가 이루어짐)을 그들에게서 박탈하고, 중재자가 포함된 동기들이 이어받으라고 요구했다. 그 동기 중에는 내 대학 후배도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렇게 요구한 것이다.
협상 끝에 우릴 모욕한 선임병들이 주번판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만나서 악수하고 서로 격려했다.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우리는 내무반으로 돌아가 모두 잠을 잤다.
선임병들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을 이어갔지만 이미 권력은 넘어와버렸다.
이후 구타도 모욕도 사라졌다.
이런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내가 그때 맞서지 않았다면 고질적인 내무반 구타, 기합, 모욕이 일상적으로 계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저항함으로써 이후 그런 것들이 다 없어졌다.
우리 아버지는 육이오전쟁 때는 질병으로 입대하지 못했다가 전후에 가셨는데, 군대 폭력이 지긋지긋했다고 늘 회상하셨다.
우리 막내는 청송교도소에서 경비교도대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면회갈 때 보니 무릎팍을 하도 맞아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땐 내가 직접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어 울분을 안고만 있었다.
내가 우리 막내 처지였다만 난 참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영창가는 한이 있어도 소대장인가 하던 그 폭력범을 기어이 응징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만으로도 막내 면회갔을 때 느꼈던 그 분노가 마구 치민다.
난 고등학교 1학년 때 교련교사가 기합을 너무 자주 주고, 폭력적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걸 보고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학교로 옮긴 적이 있다. 덕분에 난 고등학교만 4년을 다녔다.
그 교련교사는 이듬해 기어이 내 친구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나서야 폭력을 그쳤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실패한다. 담금질일 뿐 결국 제련되는 것이다.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 <사회적 관계>를 지혜롭게 가꿔나가는 학습을 더 잘 시켜야 한다.
투신 자살한 학생이 좀 더 용기를 냈더라면, 부모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교사들이 좀 더 애정을 가졌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살자면 그런 의무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아래 유서 전문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그래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가 뭔지 똑똑히 알 수 있다.
피하지 말자. 눈물이 흐르더라도 끝까지 읽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쓰자.
이렇게 논리정연하게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학생을 잃다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열네살 나이에 투신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전문
- 제가 그동안 말을 못했지만, 매일 라면이 없어지고, 먹을 게 없어지고, 갖가지가 없어진 이유가 있어요. 제 친구들이라고 했는데 ○○○하고 ○○○이라는 애들이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절 괴롭혔어요. 매일 라면을 먹거나 가져가고 쌀국수나, 용가리, 만두, 스프, 과자, 커피, 견과류, 치즈 같은 걸 매일 먹거나 가져갔어요.
3월 중순에 ○○○라는 애가 같이 게임을 키우자고 했는데 협박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매일 컴퓨터를 많이 하게 된 거에요. 그리고 그 게임에 쓴다고 제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 등수는 떨어지고, 2학기 때쯤 제가 일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 친구들이) 계속 돈을 달라고 해서 엄마한테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담배도 피우게 하고 오만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고, 빡지까지 써줬어요. 게다가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때리고 나중에는 ○○○이라는 애하고 같이 저를 괴롭혔어요.
키우라는 양은 더 늘고, 때리는 양도 늘고, 수업시간에는 공부하지 말고, 시험문제 다 찍고, 돈벌라 하고, 물로 고문하고, 모욕을 하고, 단소로 때리고, 우리가족을 욕하고, 문제집을 공부 못하도록 다 가져가고, 학교에서도 몰래 때리고, 온갖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는 등 그런 짓을 했어요. 12월에 들어서 자살하자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저를 막았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저도 정말 미치겠어요. 또 밀레 옷을 사라고 해서 자기가 가져가고, 매일 나는 그 녀석들 때문에 엄마한테 돈 달라하고, 화내고, 매일 게임하고, 공부 안하고, 말도 안 듣고 뭘 사달라는 등 계속 불효만 했어요. 전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너무 죄송했어요. 하지만 내가 사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족이었기에 쉽게 죽지는 못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몸은 성치 않아서 매일 피곤했고, 상처도 잘 낫지 않고, 병도 잘 낫지 않았어요. 또 요즘 들어 엄마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냐는 전화를 했을 거예요. 그 녀석들이 저한테 시켜서 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은 다음 오시기 전에 나갔어요.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남한테 말하려고 했지만 협박을 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쯤에 ○○○이나 ○○○이란 애들이 자세하게 설명해줄 거예요.
오늘은 12월 19일, 그 녀석들은 저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어요. 그리고 5시 20분쯤 그 녀석들은 저를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무차별적으로 저를 구타했어요. 또 제 몸에 칼등을 새기려고 했을 때 실패하자 제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할머니 칠순잔치 사진을 보고 우리 가족들을 욕했어요. 저는 참아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걔들이 나가고 난 뒤, 저는 제 자신이 비통했어요. 사실 알고 보면 매일 화내시지만 마음씨 착한 우리아빠, 나에게 베푸는 건 아낌도 없는 우리엄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우리 형을 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제가 일찍 철들지만 않았어도 저는 아마 여기 없었을 거에요. 매일 장난기 심하게 하고 철이 안든 척 했지만, 속으로는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사랑했어요. 아마 제가하는 일은 엄청 큰 불효인지도 몰라요. 집에 먹을 게 없어졌거나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혼내실 때, 부모님을 원망하기보단 그 녀석들에게 당하고 살며 효도도 한번도 안한 제가 너무 얄밉고 원망스러웠어요. 제 이야기는 다 끝이 났네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그 녀석들은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알고 있어요. 우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저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저희 가족을 기다릴게요.
12월 19일 전 엄마한테 무지하게 혼났어요. 저로서는 억울했지만 엄마를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그 녀석들은 그날 짜증난다며 제 영어자습서를 찢고 3학년 때 수업하지 말라고 ○○○은 한문, ○○○는 수학책을 가져갔어요. 그리고 그날 제 라디오 선을 뽑아 제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 하였고, 5시 20분쯤부터는 아까 한 이야기와 똑같아요.
저는 정말 엄마한테 죄송해서 자살도 하지 않았어요. 어제(12월 19일) 혼날 때의 엄마의 모습은 절 혼내고 계셨지만 속으로는 저를 걱정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부모님한테나 선생님, 경찰 등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지만, 걔들의 보복이 너무 두려웠어요. 대부분의 학교친구들은 저에게 잘 대해줬어요. 예를 들면 ○○○, ○○○, ○○○, ○○○, ○○○, ○○○, ○○○, ○○○, ○○○, ○○○, ○○○, ○○○, ○○○, ○○○, ○○○, ○○○ 등 솔직히 거의 모두가 저에게 잘해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저는 매일매일 가족들 몰래 제 몸의 수많은 멍들을 보면서 한탄했어요.
항상 저를 아껴주시고 가끔 저에게 용돈도 주시는 아빠, 고맙습니다. 매일 제가 불효를 했지만 웃으면서 넘어가 주시고, 저를 너무나 잘 생각해주시는 엄마, 사랑합니다. 항상 그 녀석들이 먹을 걸 다 먹어도 나를 용서해주고, 나에게 잘해주던 우리 형, 고마워. 그리고 항상 나에게 잘 대해주던 내 친구들, 고마워. 또 학교에서 잘하는 게 없던 저를 잘 격려해주시는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바꿔주세요. 걔들이 알고 있어서 또 문 열고 저희 집에 들어올지도 몰라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아빠 매일 공부 안 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되셨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온답시고 먹을 걸 먹게 해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내가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앞에서 밝혔으니 전 이제 여한이 없어요. 저는 원래 제가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제가 진실을 말해서 억울함과 우리가족 간의 오해와 다툼이 없어진 대신, 제 인생 아니 제 모든 것들을 포기했네요. 더 이상 가족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저는 오히려 그간의 오해가 다 풀려서 후련하기도 해요. 우리가족들, 제가 이제 앞으로 없어도 제 걱정 없이 앞으로 잘 살아가기를 빌게요.
저의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저도 분명 행복할 거예요.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언젠가 우리는 한 곳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아마도 저는 좋은 곳은 못갈 거 같지만 우리가족들은 꼭 좋은 곳을 갔으면 좋겠네요.
매일 남몰래 울고 제가 한 짓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을 듣고 매일 맞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그리고 제가 없다고 해서 슬퍼하시거나 저처럼 죽지 마세요. 저의 가족들이 슬프다면 저도 분명히 슬플 거예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우리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막내 ○○○ 올림-
P.S. 부모님께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 못 전했지만 지금 전할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20세정도의 성인아이들하고 지낸시간이 35년, 결론은 20세이하의 아이들에게 옳바른 인생관을 교육시키지 않으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와 똑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지식하나 더 암기시키는 것은 손에 칼하나 더 쥐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약한자는 강하게 만들어 주고 강한자는 그힘을 옳바르게 행사하는 법(바른 인생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나도 어릴때 힘쎈 형이나 동급생들에게 돈도 빼았기고 맞기도 했는데, 좀 과격하게 복수를 했습니다. 몽둥이로 기습해서 정신없이 패기, 상급생이나 형, 체육선생에게 공정한 감독을 부탁하고 대결을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깔려서 얻어 터지면서 남자의 급소인 0알을 잡아 당겨 무승부를 하기도하고, 어떤때는 통쾌하게 이기기도하고요. 아무튼 대판 싸우고나면 친구가 되기도 하거나, 더이상 괴롭히는 일이 없어지더군요. 오늘 나를 초등학교 동창 자녀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나를 괴롭히던 몇몇 동창들도 왔는데 반갑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고.
첫댓글 끝이 없는 선생님 이야기 보따리~ 군대문제. 해피엔딩이어서 다행입니다.
20세정도의 성인아이들하고 지낸시간이 35년, 결론은 20세이하의 아이들에게 옳바른 인생관을 교육시키지 않으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와 똑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지식하나 더 암기시키는 것은 손에 칼하나 더 쥐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약한자는 강하게 만들어 주고 강한자는 그힘을 옳바르게 행사하는 법(바른 인생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나도 어릴때 힘쎈 형이나 동급생들에게 돈도 빼았기고 맞기도 했는데, 좀 과격하게 복수를 했습니다. 몽둥이로 기습해서 정신없이 패기, 상급생이나 형, 체육선생에게 공정한 감독을 부탁하고 대결을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깔려서 얻어 터지면서 남자의 급소인 0알을 잡아 당겨 무승부를 하기도하고, 어떤때는 통쾌하게 이기기도하고요. 아무튼 대판 싸우고나면 친구가 되기도 하거나, 더이상 괴롭히는 일이 없어지더군요. 오늘 나를 초등학교 동창 자녀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나를 괴롭히던 몇몇 동창들도 왔는데 반갑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