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회 계룡전국여성백일장 심사평
“독창적인 생각을 참신하게”
<계룡 전국여성백일장>은 계룡시가 기존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문화예술도시로서 위상을 높이고, 또한 향토문학 발전에 부응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여성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열두 번째를 맞는 동안 대단히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올해는 시와 시조, 동화와 동시, 수필, 단편소설까지 총 104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어쩌면 문학은, 인생의 덧없음으로 존재한다. 글을 읽는 내내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공유했다. 좋은 작품이란 인간의 조건에 대해 배우게 하고 우리의 삶과 행동에 대한 통찰력으로 인해 종국에는 자신을 바꿔놓는 힘을 지니게 된다.
‘나도밤나무’라는 키가 크고 늠름한, 노란 꽃을 피우는 관상수가 있다. 밤나무는 아니지만 잎이 밤나무와 닮아서 붙여준 이름이다. 독자적 개성을 과시하느니 이미 알려진 유사성에 동조하여 묻어가려는 우리의 의식구조가 슬그머니 투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바람꽃, 나도생강, 나도송이꽃. 나도냉이’ 같은 “Me Too”주의가 결국은 시대정신의 질을 떨어뜨리게 만든다. 조금 서툴더라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참신하게, 장르에 맞게, 잘 짚어낸 작품을 선정하고자 했다. 그만그만한 글들도 사실 많았지만, 치열한 자세를 보여 준 분들도 적지 않아서 작품을 선정하는데 쉽지 않았음도 밝힌다.
200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세대는 종이텍스트를 기반으로 공적 담론과 로고스의 세계를 꿈꾸는 기성세대를 반영하는 층이라면, 이후세대는 구체적 물적 토대인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자동차 등을 소유하며 끊임없이 접속하고, 접속을 꿈꾸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도 이만큼이나 달려 온 지금, 아직도 ‘여성 백일장’이 유효한 것은 여성이 우리 문학의 긍지와 정서함양에 원초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상으로 뽑힌 김정아(대구 달서구)의 시조 「바다 자수刺繡」는 제목부터 강한 서정의 힘과 전통적 수사로 대상을 밀도 있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함께 보낸 「가을, 연어」에서도 그렇듯, 잘 마름질된 언어의 피륙이 넉넉한 모성을 거느림에 따라 정서의 공간 또한 넓었다. 수를 놓는 행위를 ‘빛나는 바늘 작살로 대어大漁를 꿰고’처럼 바다의 영역으로 확장시켜낸 너른 품과 멀리 가는 울림이 있었다. 대상에 접근하는 감성과 비유가 돋보이고 파격적인 이미지 연결이 압권이었다.
금상, 양옥선(경북 김천시)의 시조 「우포 블로그」 의 강점은 의식의 지층이 두텁고 사물을 보는 참신한 시각이다. 그런 시적 해석은 의외의 무게감이 실려 있기 마련이지만 현대적 삶의 공간인 컴퓨터를 끌어와 쉽고도 정감 있게 이끌어 갔다. 셋째 수 종장에 ‘가시를 밖으로 밀어 연꽃으로 피는 일’에 이르면 동시대인의 삶의 표정이 어른거린다. 피상적인 발상을 과감히 걷어내고 시상을 다잡는 독특한 빛깔이 돋보인다. 다만, 함께 보내온 「여름 한 권」 종장에서 음보가 걸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은상, 박정순(인천광역시 부평구)의 수필 「벼룩콧등 텃밭과 몽당호미」는 '인간 정체성 회귀'의 장중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팔순의 시어머니가 경작중독증 치유를 위해 도심 속 텃밭에서 농사를 고집스럽게 짓고 있다는 설정으로 토착 세력으로부터 수난당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아픈 단상까지 이끌어 내 사회적 경종을 울리고 있다. 장인정신과 비유할 수 있는 그의 치열한 산문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동상, 황명희(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동화 「수제비꽃」은 할머니와 손녀의 끈끈하고 애틋한 가족적 삶을 연결해주는 장치이다. 두 사람의 에피소드를 형상화함에 있어 ‘목련’의 등장은 곧 ‘엄마 닮은 꽃 손님’이란 캐릭터와 일치시키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더불어 구수한 수제비국 향 가득한 동심의 세계는 아동문학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장려상, 김춘녀(충남 계룡시)의 시 「그런 물」은 감각적 사유와 존재론적 인식에 깊이 닿아 있다. 홀로 자신의 주변을 맑히며 막막한 어둠을 물리치는 물줄기가 느껴진다. 현실에 근거를 두되 의식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연과 인간이 소통을 하고 있다. 함께 보내 온 「조금 기다려」에서 보면 시 한편으로 일생을 훑고 가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장려상, 한향숙(전주시 덕진구)의 동시 「밥」은 어린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일상의 소재를 통해 삶과 시가 딱 맞아떨어지게 작품을 빚어냈다. 밥 차리는 것만 봐도 침이 고여 얼른 숟가락을 들 때마다 버릇없다고 하는 엄마. 그러나 알고 보면 내 ‘손’보다 ‘침’이 더 버릇없다는 말에 빙그레 미소가 번진다. 동시는 뻗어가는 상상과 움직이는 비유가 필요하다. 「밥」은 발랄한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수상자분들께 축하드리며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총욕불경寵辱不驚의 자세로 무량한 초록을 만끽하시길 바란다.
- 심사위원: 박몽구(문학평론가), 이승은(시인)
-제12회 계룡 전국여성백일장 당선작
<대상ㅡ시조>
바다 자수刺繡
김 정 아
팽팽한 연줄 따라
신경선이 살아나고
포경선 띄워놓자
불현듯 깨는 바다
빛나는 바늘 작살로
대어大漁를 꿰고 있다
촘촘히 엮어간다
짙푸른 물길 따라
땀땀이 타는 밤을
달빛으로 둘러놓고
고래가 물을 뿜는다
내 마음도 띄운다
<금상ㅡ시조>
우포 블로그
양 옥 선
공룡이 지나가다 한줄 인사 써놓고
뒤 쫒던 느린 시간 물가에 댓글 달자
흐르던 구름도 차마 액정화면 열었다
궁금한 산들이 굽어보다 빠져들고
둥개는 날 바람도 손님으로 와서 읽다
초성만 쓰던 파문도 가라앉은 바탕화면
한 생각 돌아보면 기억의 늪 깊디깊다
골똘한 일상에서 빈 하늘을 열어보며
가시를 밖으로 밀어 연꽃을 피는 일
흙주접 엉긴 머리 디밀어 담가 보면
땀 절은 시간 묶어 올올이 견딘 파일
수억 년 무게의 침묵 스렁스렁 열린다
<은상ㅡ수필>
벼룩콧등 텃밭과 몽당호미
박 정 선
<1>
직장인 겸업주부라 주중에 밀려놓은 일 더미를 겨우 끝내놓은 휴일오후.
호미며 모자, 목장갑을 챙긴 우리 부부는 어제 저녁부터 조바심하던 어머니를 모시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승용차로 30여분 거리의 주말농장, 차에 올랐다하면 속 울렁증 도지는 어머니 손까지 빌려야 할 만큼 바쁜 일거리 없음에도 동행하는 건 요즘 당신 열정을 몽땅 거기에 바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님 소일거리 삼으시라고 분양받아 농사 시작한 텃밭은 이름이 좋아 농장이지 산자락 끝에 닿아있어 산골 뙈기밭이나 진배없는데 누비조각 같은 땅을 몇 고랑씩 몫 나누어서 소꿉장난보다 나을 것 없어 뵈는 작물 몇 가지나마 제법 실하게 가꾸어놓았다.
땡볕 피하여 그늘을 찾아다니고 힘쓰는 걸 겁낼 팔순 줄의 노인네가 무릎관절 통증 견디며 넓던 농토를 줄이고 줄여서 짓는 경작중독증 치유 농사인 셈이요, 생명 있는 씨앗들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해주려는 경작 본능이리.
옹색하면 옹색한 대로 저 하나 몸 간수 잘 하는 곡식들, 혹여 주인 눈에 벗어날까봐 작은 바람결에 여기에 나도 있소! 몸통 까딱까딱 흔드는 옥수숫대가 그래서 더욱 대견해보인다.
한 구덩이에 씨앗 세 개를 묻는 이유가 있다한다. 한 알은 하늘의 새를 위하여, 또 한개는 땅에 사는 벌레 차지로, 나머지 하나가 농사지은 사람 몫이라신다. 모두 차별 않고 어루만져준 보람으로 땅을 뚫고 솟아난 것이든, 모종 사다 심어놓은 것이든 골고루 잘 컸다.
밭고랑 하나씩 차지하여 풀을 뽑는다.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벌써 무당벌레 유충한테 피해 입은 감자 싹이 시름시름할망정 자세 꼿꼿하다. 그동안 잡초란 이유로 뽑아버린 풀들이며 내 밭곡식들한테 해가 된대서 잡아 없앤 진딧물, 응애, 굼벵이... 온갖 버러지들은 얼마나 되려나. 모진 역경 겪는 식물도, 꿈틀꿈틀 자라는 벌레도 저리 악착스럽거늘 한세상 살자고 생겨난 것들 중에 제 목숨 스스로 버리는 건 머리카락 검은 짐승들뿐이지 싶다.
수십 년 지나도록 아직 다 버리지 못한 채 온몸이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토지 집착증을 오래 전에 남편이 귀띔해줘서 알고 있다.
고향의 강변 마을은 연례행사처럼 수해가 덮치곤 했다한다. 어느 해는 흙을 다 파내가서 돌 자갈만 앙상히 남고, 이듬해엔 남의 땅 흙더미까지 산처럼 모아다 쌓는 터전.
‘흉년일세. 보나마나 또 흉년이여.’ 이웃 누군가의 입방정대로, 그해 역시 곡식 절반을 장마물이 휩쓸어갔고 그만큼의 땅을 잃었다. 비록 황톳물 힘으로 어쩌지 못한 바위배기와 자갈바닥 땅이지만 아직 반은 남아있지 않으냐. 저 땅에 의지하자고, 악착같이 다시 일궈내야 한다고, 식구들이 몸 전체를 농기구로 삼아 일했음에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수확의 계절이지만 거둘 것 별로 없는 그해 가을, 젊은 아들은 힘 줄어가는 어른들을 설득하여 고향을 떴다. 섶다리를 건넜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도시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섰다. 그 뒤 수십여 년 세월이 느린 강물처럼 흘러버렸다.
그 애증의 토지일망정 끝까지 지키지 못한 회한이 갈수록 사무쳐서인가. 거기 남겨두고 왔어야 될 올개심니 농심을 어머닌 왜 아직도 못 털어내시는지. 생애 한 시절 희망과 애환이 함께 서렸던 고향 땅 한 귀퉁이를 당신 가까이 옮겨 놓아왔다고 생각하시는 듯 추억자리 조각밭의 어머니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불손한 비유인 줄 알지만 끝 무뎌지고 굽은 호미와, 몸 줄어들고 허리 굽은 어머니 모습이 왠지 닮았다.
<2>
작년까진 우리 아파트 인근에 어머니의 농사 터전이 있었다.
드러내놓기 겸연쩍은 사실을 밝히자면, 붙임성 부족에다 경로당 발길조차 뜸한지라 맺어놓은 인맥 거의 없다시피 한 시어머님이 무슨 수완을 썼는지 텃밭 귀퉁이를 한 몫 차지하셨는데 꽤 넓던 농경지를 밀어버리고 주택단지가 들어선 한쪽에 추가사업 용도로 남겨둔 유휴지로서 (경작을 엄금하며 어길 경우 의법 조치함) 붉은 글자 섞어 쓴 경고판이 버젓이 서있음에도 이런저런 작물들이 주인 정성 따라 실하거나 부실하거나, 제 한 몸 간수한 채 자랐다.
길지 않은 고랑, 반듯하지 못한 이랑을 내면서 주워낸 돌무더기가 옆 밭과의 경계를 삼은 조각밭뙈기들이지만 제각각 임자가 있으며 네 밭, 내 터, 주장할 근거가 없으니 먼저 씨앗 묻거나 모종 심어놓은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지난 이태동안 굳어진 관례라 했다.
햇살 미지근한 이른 봄부터 시작해, 보쌈구름 뒤에서 잠깐씩 숨 돌린 태양이 대지를 태워버릴 듯 땡볕 쏟아 붓던 여름내 식구들 만류에도 어머닌 거르지 않고 거기다 발 도장 찍으셨다. 오른쪽 무릎한테 사정해 놓으면 왼쪽다리가 덩달아 들고 일어나는 관절통에 시달리면서도 밭에만 나오면 땅의 기운이 야윈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듯이.
일년 소출이고 뭐고 셈해봐야 종달새가 씨앗 값 받으러올 허튼 농사, 화초 가꾸기보다 나을 바 없는 허튼 농사가 끝났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가 수확한 곡식들을 베란다 바닥 가득 펴 널었다. 젤 반듯한 것들을 골라낸 뒤 봉지봉지 여미어 갈무리하셨다. 물으나마나 내년 농사에 쓸 종자들, 그리곤 몽당호미를 씻어 건조대에 걸어놓으셨다. 그런데...
무단경작이라 해도 땅 주인 맘대로 못 건드리는 골칫거리 작물들을 거둬갈 때만 기다린 듯 재빨리 공사가 시작됐다. 공터 주위에 장벽이 둘러쳐지고 중장비들이 줄지어 드나들었다. 입구에 세운 안내판에 의하면 체육시설을 갖춘 소공원이 들어선단다.
어머닌 허망한 듯 공사현장을 바라보고 계셨다. 이나마 게꽁지 땅조차 없어졌으니 내년엔 코딱지 농사도, 남의 땅 도둑 농사 설움도 다 틀려버린 것이다.
<3>
긴 겨울 끝나 봄이 되자 그예 사단이 불거졌다. 직장에서 퇴근해 돌아오니 어머니가 낮에 아파트 화단 귀퉁이를 파 엎어서 비닐을 덮어놓았고 그 때문에 1층 거주자와 언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화단은 당연히 1층 거주자한테 점유권이 있다는 입주민 주장에 대해 한 뼘 땅이라도 놀리면 죄악이거늘 노는 땅에 뭘 좀 심었기로서니 왜 트집이냐는 당신 나름의 논리로 맞섰고, 결국 젊은 여자는 관리소장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공공용지를 훼손하면 아파트 관리규정상 불법이고 벌금도 부과될 수 있으니 빨리 원상복구 해놓으랬다기에 내려가 보니 화단은 연세 드신 경비원에 의해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그 자릴 먼저 차지할 명분 만들겠다고 그래놨을 어머니가 ‘몰상식 청승늙은이’ 취급당할 판국이니 자식이 대신 나서야 수습하기 쉽다. 공개사과에 재발 방지 약속하고서야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버스 몇 정류장 가면 주말농장이 있다니 거길 알아보십시다.”
바구미벌레 이마빡만한 터마저 잃고 상심하는 어머니를 그렇게 설득하여 마련한 주말텃밭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머니만이 아니라 노인들 여러분이 일하고 계신다. 아무리 삶이 고되어도 밭에만 나오면 땅의 기운이 야윈 다리 힘줄을 타고 올라오는 듯이. 뼈에 박힌 경작본능을 멈출 수 없고 끊을 수도 없는 땅 중독증에 시달리며 텃밭에서 흙벗 맺은 인연, 도회지로 흘러왔을망정 당신 사시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곰삭히는 것일까.
당장 아니 되면 여러 해 뒤라도 어머니의 옛 터전에다 풀어놓을 짐을 꾸리면 좋으련만 우리 사정으로 귀농이든 귀촌이 됐든 결정하기 쉽질 않다. 툭 떨쳐버리고 떠난 그 땅과 다시 화합하기가 호락호락하랴.
석양 무렵, 흙손 툭툭 털고 내려오다 돌아보니 저만치 떨어진 참나무 위에서 ‘저 염치없는 밉상들, 남의 땅에서 언제 자릴 뜨려나.’ 끈기 있게 기다리던 텃새들이 본디 그들의 영토였을 밭뙈기에 우르르 내려와 앉았다.
<동상ㅡ동화>
수제비 꽃
황 명 희
“쌩쌩”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싫은지 꽃샘추위로 밖은 매우 춥다.
“덜컹덜컹, 쿵쿵쿵”
겨울바람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차가운 입김을 뿜어낸다. 창문도 흔들리고 나무도 이리저리 흔든다.
“톡, 톡, 톡”
“누가 왔나보네. 어서 문 열어드려라.”
할머니가 나를 흔들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라 얼른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기쁜 마음에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누구세요. 어, 벌써 가셨나?”
나는 현관문을 닫고 으스스한 몸을 웅크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할머니, 아무도 안 계시던데.”
“누구였지?. 빨리 문을 열어주지 않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가셨나 보구나!”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봄은 왔지만 아직 밖은 춥다. 개학을 해 겨울방학보다는 덜 심심하지만 토요일이라 집에서 책을 읽고 있다. 학교도서관이 다시 열어 책을 빌려볼 수 있어 정말 좋다. 책을 읽으면 하루가 금방 가기 때문에 덜 심심하다. 할머니는 내 옆에서 멸치를 다듬고 계신다.
나는 아주 오래된 아파트에 할머니하고 단 둘이 살고 있다. 우리아파트는 5층짜리아파트라서 엘리베이터가 없다. 우리는 1층에 살고 있어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한테는 무척 다행한 일이다.
“은지야, 밖에 나가서 놀지.”
“아직 밖은 추워요. 그리고 미연이는 오늘 가족여행 갔어요.”
미연이는 내 단짝친구이다. 늘 같이 학교에 가고 같이 논다. 하지만 오늘 미연이는 가족과 함께 친척집에 간다고 했다.
“아이들은 뛰어다녀야 하는데 이 할미 때문에 집에 있는 거냐?”
“아니야. 놀이터에 가도 아무도 없어. 아이들은 모두 학원에 갔기 때문이야.”
“으음.”
“아, 할머니, 저번엔 고양이하고 놀았어.”
“우리 은지도 학원에 가고 싶지 않니?”
“괜찮아. 학원 다니는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하는데 뭐. 학원 다니면 책 읽을 시간도 없잖아. 난 할머니 옆에서 책 읽는 것이 더 좋아”
나는 요즘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그건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하루 종일 집에 계시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작년 겨울에 길바닥에 미끄러지셔서 다리와 허리가 많이 다치셨다. 할머니는 아파트 노인정에도 이웃집에도 놀러 갈 수 없어 하루 종일 심심하시다. 이웃집 할머니가 놀러 오시면 굉장히 반가워하신다. 요즘은 날씨가 추워서 이웃집 할머니가 놀러 오시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할머니와 함께 있으려고 한다.
“쿵 더러러 덜컹”
또 한 차례 바람이 불어 오래된 아파트의 창문은 흔들어 된다. 난 바람소리와 창문소리가 때문에 무서워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톡, 톡, 톡”
“어, 또 누구지”
나는 얼른 문을 열어주려고 일어났다.
“또 아무도 없는데. 누구였지.”
몇 년 전에 길거리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은 음주운전 차에 치어 돌아가셨다. 아빠, 엄마가 살아계실 적에 우리 집에도 손님이 자주 찾아오곤 하였는데 지금은 늘 조용하다. 어떤 때는 쓸쓸하기도 하다. 특히 오늘같이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은 엄마, 아빠가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는 부엌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아빠는 나와 노는 상상을 가끔 한다.
“톡, 톡, 톡”
이번에도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또 없네. 동네 꼬마들이 장난을 친 것 같아요.”
“그래, 원 녀석들도. 은지야,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까?”
“할머니, 수제비 먹고 싶어.”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수제비이다. 그때 우리 가족은 자주 수제비를 끓여먹었다. 특히 오늘같이 찬바람 부는 날에는 뜨거운 수제비 한 그릇을 먹으면 춥지 않고 몸이 따뜻하였다.
“그래. 부엌에 가서 소금, 밀가루, 물 한 컵을 가지고 오너라.”
나는 부엌에 가 수제비 재료들을 찾아왔습니다.
“은지야, 노란냄비에 물 반 정도 붓고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끊어야 한다.”
“할머니, 저도 이젠 그 정도는 다 알아요.”
요즘 내가 부엌일을 한다. 할머니가 방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가르쳐주신다. 음식 만드는 것이 재미있지만 설거지는 정말 하기 싫다. 찬물에 설거지 하면 손이 어는 것 같다.
“할머니, 내가 밀가루 반죽할까요?”
“괜찮아. 아직 할미 손은 튼튼해. 밀가루 반죽할 때는 처음부터 물을 너무 많이 부으면 안 된다. 찰지게 반죽되도록 조금씩 넣어야 한다.”
수제비국에는 호박, 감자 등을 넣어 끊이면 더 맛있다. 그때도 반죽은 언제나 할머니가 하셨다. 엄마도 더러 시도해보았지만 할머니가 하는 밀가루 반죽처럼 찰지게 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께 반죽을 얻어 찰흙처럼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도 할머니는 어느 정도 반죽이 되자 한 덩어리를 떼어주셨다.
“오늘은 우리 은지가 무얼 만들까?”
나는 반죽 덩이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얇게 길게 폈다. 8개 정도 만들어 하나로 묶으니 예쁜 꽃이 되었다.
“오늘은 목련꽃을 만들었구나.”
“응, 엄마가 제일 좋아하던 꽃이잖아.”
또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부리나케 현관문을 열었지만 또 아무도 없었다. 오늘 같은 날 누군가 와서 같이 수제비를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할머니 옆에 앉아 수제비꽃을 만졌다.
“우리 은지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니?”
할머니도 많이 실망하신 표정이다. 나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다.
“자, 여기 반죽 다 되었다. 솜씨를 발휘해보아라.”
난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꽃을 책상 위 가족사진 앞에 두었다. 사진 안에는 아빠, 엄마가 활짝 웃고 계신다. 이년 전 우리 집 앞 아파트화단에 목련이 활짝 필 때쯤 나무아래에서 찍은 사진이다. 엄마는 목련을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목련 앞에서 사진을 꼭 찍고 싶어 하셨다. 내 어릴 적에 찍은 사진을 보면 목련은 자주 등장한다.
“은지야, 끊는 국물에 조금씩 떼어 넣어라. 할 줄 알지?”
“그럼요. 내가 이걸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 것 알잖아요.”
“뜨거운 국물이 튀니 조심해.”
나는 감자와 양파를 일정한 크기로 썰었다. 처음엔 무섭고 어설퍼 몇 번 손을 다쳤지만 이젠 제법 요리사처럼 야채도 잘 썬다. 나는 뜨거운 국물에 반죽을 조금씩 떼어 넣었다. 목련꽃잎 닮은 수제비가 처음엔 바닥으로 가라앉더니 차츰 조금씩 위로 올라오며 꽃을 피우는 것 같아 신기하다.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 가득 퍼져나간다. 할머니는 방문을 열고 날 계속 쳐다보고 계신다.
“할머니, 배고프지요? 은지표 수제비 곧 대령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톡, 톡, 톡”
그 소리는 현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부엌 창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누구세요”
나는 얼른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목련 한 송이가 환한 얼굴로 있었다. 아직 이른 봄이라 추운 날씨이지만 그 목련은 오늘 아침에 봉오리를 우아하게 펼친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다른 가지에 있는 목련은 아직 봉오리채로 추위에 온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톡, 톡, 톡>한 것은 너였구나. 네가 핀 것을 알리고 싶어 그렇게 <톡, 톡, 톡> 했구나. 현관문의 초인종 소리는 <딩동, 딩동>이지. 너인 줄도 모르고 나는 현관문만 열었다 닫았다 했네. 빨리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할머니! 이 목련 좀 봐요.”
할머니는 절뚝거리시면서 오셨습니다.
“벌써 목련이 피었구나. 참 곱기도 하다.”
“할머니, 목련도 내가 만든 수제비국 냄새를 좋아하나 봐요?”
엄마는 오늘처럼 목련이 피면 부엌 창문을 열어두시곤 하셨다. 엄마는 목련을 보며 요리를 하면 더 맛있게 할 수 있다면서 행복해하셨다.
나와 할머니는 오늘 우리 집에 찾아 온 봄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직 찬바람이 불지만 가지를 뻗어 목련이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엄마처럼 창문을 열어두었다. 나와 할머니는 엄마 미소 닮은 꽃손님을 보며 따뜻한 수제비국을 먹었다.
<장려상-시>
그런 물
김 춘 녀
가장 보드라운 속살을 내어놓는,
봄버들 타고 오르는 물길
모난 돌마저 유순하게 끌어안는,
절벽을 달래고 휘도는 물길
온갖 역풍을 견디고도
홀로 돌아앉아 깊어지는 물길
제 마음 다 비우고
바다로 몸을 뉘는,
<장려상-동시>
밥
한 향 숙
배고프지 않다가도
밥만 차려지면
고이는 침
얼른
제일 먼저
숟가락을 들면
엄마의 호통
‘버릇없는 녀석’
그런데도
자꾸 침이 고인다
나보다 더
‘버릇없는 침’
첫댓글 수상자 선생님, 모두합니다
메르스 조심하시고 한국 문인협회 계룡지부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좋은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선생님 모두 무궁한 건승을 기원합니다
회장님과 사무국장님 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