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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철 시집, < >(서정시학), 2014. 9.
지식인의 길
맹문재(시인, 안양대 교수)
1.
어릴 때 어른이 되면 트럭을 몰고 세상의 길을 달리고 싶어하던 신원철 시인은 “삼척해변에서 미루나무 아득한 울진 국도, 정선 아우라지, 백복령, 속사 운두령”을 거쳐 “로키를 넘어 대평원을 가로지르고 미시시피를 건너 캐나다까지 내달”(「트럭, 꿈」)려왔다.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누런 코트 걸친 초로의 사내”(「풍경」)가 되었다고 토로하지만, 세상의 길을 달리려고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아직도/아라비아 초승달과 사막이 눈앞에 아른거리고/하이에나 떼랑 아프리카 사바나를 달리고 싶”(「트럭, 꿈」)어하는 것이다.
시인이 세상의 길을 달리려고 하는 이유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으로 볼 수 있지만, 의도 또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풍광과 문화 유적지를 찾아가는 차원을 넘어 시인으로서 추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번 시집에서 갈산 시인을 비롯해 광산촌 출신인 노시인, Y교수, M교수, D교수, 토마스 모어, 스티븐 호킹, 히스클리프, 캐더린, 브론테, 히드, 닥터 존슨, 서화담, 황진이, 허준, 퇴계, 신사임당, 아랑, 임꺽정, 임경업, 백범 김구, 다산 정약용, 최제우 등을 노래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시인은 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 시인이 찾아가는 사람들은 여러 부류이지만, 그중에서도 지식인들을 만나고 있는 면이 주목된다. 시인은 지식인들을 만나 그들의 업적과 행적과 사상으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은 물론 자기반성과 성찰의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은 지식 전문가와는 다르다고 정의하고 있다. 지식 전문가는 지배 계급이 제시하는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이다.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거나 의심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과학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인 양 신봉한다. 그리하여 지식 전문가는 지배 계급의 통치 수단으로, 즉 앞잡이로 존재한다. 이에 비해 지식인은 자기비판을 수행하면서 인간 가치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기존의 질서와 계급에 대항한다.
신원철 시인은 자신 역시 지식인의 범주에 든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르트르가 구분한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 전문가에 가깝다고 자기반성을 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가 사회의 보편적인 진리와 결코 유기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있음을, 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 진리와 갈등 관계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혼자 저녁 먹고 논문들을 읽다가/출석부를 체크하다가/상담일지를 작성하다가/다시 강의 준비를 하다가/책상 앞을 바라보며” “나쁜 놈들”(「교수형 대기실」)이라고 중얼거린다. 지식인다운 시인의 양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마치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장에서 추기경에게 무릎을 꿇고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고 한 자신의 주장이 오류와 이단이라고 사죄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린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지식인들을 찾아가는 행동은 주목된다.
2.
이름마저 쓸쓸한 삼척 후진 갈천리 바닷가에 태어나
갈산이라
스스로 불렀던 이,
그의 가난은 거머리였다
어릴 때는 홀로 파도소리에 잠들고,
어른이 되어서도 봉황산 아래 가건물 삼광학교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던
칡뿌리 운명,
저녁거리 꾸러 가던 어머니를 노래하며 장가도 못 가고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폐칩일기」를 쓰다가
차가운 하숙집에서 쓰러졌다
삼척문화의 할아버지로 마지막 불씨까지 태웠으나
어른이기는 끝내 싫어
칡 내(葛川) 마을, 어머니의 기억을 되새기는
시 몇 편 남기고
앞바다에 뿌려졌다
우르르 와르르
지금도 들려오는 파도의 자장가.
―「시인 갈산」 전문
“갈산”은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세상은 뜬 김영준(1934~1996) 시인이다. 김영준 시인은 유고 시집으로 『누가 무엇을 숨길 수 있으랴』『길‧세월‧밤』을, 유고 산문집으로 『빛나는 아침의 땅에서』를 남겼다. 김영준 시인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자신의 고향에서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한 뒤도 고향에서 활동하다가 자신의 뼈를 묻었다. 삼척문화원의 설립에 동참했고, 삼척직업소년학교(삼광고등공민학교)의 설립에 참여해 26년이나 교사의 길을 걸었다. 삼광고등공민학교가 폐교된 뒤에는 자신이 소장한 책으로 새마을문고 청소년도서관을 운영했고, 삼척문화원장으로도 봉사했다. 김영준 시인은 1972년 시전문지인 『풀과 별』에 「거리」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중앙 문단에 기웃거리지 않고 자신의 고향에서만 작품 발표를 할 정도로 자존심을 지켰다. 삼척문화를 창간하고 동예문학회, 삼척문학, 두타문학을 이끄는 등 삼척의 문화예술에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생전에 금전욕이나 명예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 시집 한 권 발간하지 않았다.
“갈산”은 거머리 같은 가난을 헤쳐나갈 수 없었지만 “봉황산 아래 가건물 삼광학교에서/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등 “삼척문화의 할아버지로 마지막 불씨까지 태웠”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산 것이다. 시인은 그와 같은 “갈산”을 찾아가 헌신적인 삶의 자세와 경건한 시인 정신을 배우고 있는데, 광산촌 출신 노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꿈은 하늘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 아버지 괭이질하시던 밭두렁에 누워 풀피리 불면
그때부터 곧잘 시를 써보이던 하늘,
발간 석양 아래
산새들 무더기로 날아오르고
겨울이면 눈이 지붕 아래까지 쌓이는 산골,
이십 리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으나
일곱 색 무지개는 하나씩 꺼지고
아버지의 산비탈 밭 대신 태백의 탄맥을 파내려갔다
죽음을 오르내리며
고생대의 화석을 풀어내자 시가 되었다
봄날 진달래 무더기처럼 피어오르던 광부 시인의 꿈
오래지 않아
석탄의 불길과 함께 스러지고
오늘은 서울 가리봉동 골목
좁은 하늘 쳐다보며 옛날을 노래한다
세상은 나를 잊었어도
이따금 청탁 오면 무료로 시를 주고
젊은 시인 찾아오면 호프 한 잔 같이 하고.
―「어느 노시인의 노래」 전문
아버지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자식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특별한 재능으로 큰돈을 벌거나 복권에 당첨될 수 있겠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흔히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점을, 다시 말해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이거나 사회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점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면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지지할 수도 없다. 가난은 한 개인의 능력이나 태도나 세계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잘살아보고자 하는 “꿈”으로 “하늘의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괭이질하시던 밭두렁”을 개간하고, “이십 리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렇지만 “일곱 색 무지개는 하나씩 꺼지고” 말아 “아버지의 산비탈 밭 대신 태백의 탄맥을 파내려”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화자는 “석탄의 불길과 함께 스러지고” 만 자신의 “꿈”을 버리고 광산촌을 떠나 “서울 가리봉동”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그 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작품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탄광촌에서 살아가는 광부들이 가난을 극복하기란 매우 힘들다. 도급제에 의한 사업주의 노동 강요와 임금 착취, 사업주의 비인격적이고 차별적인 대우, 암행독찰대라는 비밀 조직에 의한 사생활 감시, 빈번한 안전사고로 인한 불안한 작업장, 목욕탕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주거 환경,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 시설이 전혀 없으면서 즐비하게 서 있는 술집과 퇴폐업소, 부실한 의료 시설, 열악한 교육 환경 등으로 가난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가 국내외 에너지 환경의 변화, 체탄 급증, 원가 상승, 인건비 상승 등을 근거로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면서부터 광부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정부가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정책을 시행하는 바람에 탄광촌이 급속하게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수도권 등 다른 지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나이가 들거나 부상당하거나 진폐증 등 재해를 입은 광부들만 폐광촌에 남게 되었다. 광산촌을 떠난 광부들이나 남은 광부들이 겪은 삶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모두 거부하는 핵폐기물 처리장을 오히려 유치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한 사실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보여준다.
시인은 광산촌을 탈출해온 광부 출신의 “노시인을” 찾아갔다. “노시인”은 현재 서울의 가난한 골목에서 “좁은 하늘 쳐다보며 옛날을 노래”하고 있다. “세상은 나를 잊었어도/이따금 청탁 오면 무료로 시를 주고/젊은 시인 찾아오면 호프 한 잔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처지가 어렵지만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있는 “노시인”으로부터 지식인의 자세를 배운다. 시인이 주체성을 지키는 모습이란 곧 지식인의 태도이다.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기에 도덕주의자나 이상주의자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 “노시인”은 원고 청탁이 오면 원고료나 발표 지면이나 저널리스트의 평가보다 시 창작 자체에, 즉 진리의 추구 자체에 몰두한다. 시인은 그와 같은 “노시인”의 자세에서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시 쓰기를 되돌아보면서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지식인을 만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간다.
3.
18세기 영국의
가난했지만 뱃심은 아주 좋은 사내,
박식하고 달변이고 칼날처럼 정확하고
가스버너처럼 폭발성이어서
왕실도 슬슬 눈치를 보던
당대의 논객,
그의 우산 아래 재주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커피숍까지 만들어주고
글쟁이들이야 원래 시끄럽게 마련이니
실컷 떠들어라,
온갖 법석을 떨어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버티고 앉은
황소의 숨소리
못생긴 사내
영어사전을 만들어 그때까지의 영어를 정리하면서
일갈하길
“연금”(pension)이란
바로 공무원들이 나라를 망친 대가로 받아 처먹는 돈이니라.
―「닥터 존슨」 전문
“닥터 존슨”은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 학자, 사전 편찬자, 소설가, 전기 작가 등 다양한 명함을 갖고 있는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년~1784년)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가난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뱃심은 아주 좋은 사내”여서 1755년 “영어사전을 만들어 그때까지의 영어를 정리”했다. 또한 풍자시집을 간행했고, 시인들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한 『영국 시인전』을 간행했다. 그가 간행한 “영어사전”은 최초의 것은 아니었지만 뜻풀이를 제대로 하고 10만개 이상의 실례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사전다운 체계를 갖추었다. 이후에 출판된 옥스퍼드 사전에 권위를 내주기는 했지만 무수한 문헌들을 뒤지며 이루어낸 대업인 것이다. 그리하여 1995년 『워싱턴 포스트』는 “닥터 존슨”을 지난 천 년 동안의 최고 저자로 선정한 바 있다.
“닥터 존슨”은 “박식하고 달변이고 칼날처럼 정확하고/가스버너처럼 폭발성”을 지니고 있어 “왕실도 슬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이다. 그가 “영어사전”을 만들면서 “연금”에 대한 개념을 “공무원들이 나라를 망친 대가로 받아 처먹는 돈”이라고 정의한 것이 그 여실한 면이다. 시인은 그와 같은 “닥터 존슨”을 찾아가 그의 신념과 실천행동을 본받고 있다. 목숨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지식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간 그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실용적인 지식을 지닌 전문가들 속에서 배출된다. 지식인은 더 이상 지배 계급에 속하지 않고 지배 계급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고용되고 있다. 지배 계급은 지식과 경험을 자신들에게 공급해줄 수 있는 지식인을 교육을 통해 마련하고 있다. 즉 지식인을 전문적인 연구자이자 그들의 봉사자 또는 그들의 수호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식 전문가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거나 그것에 만족한다. 자기 검열을 실시하여 비정치적인 자세를 띠는 것이다. 그에 반해 지식인은 계급 구조에서 비롯된 사회적 금기를 타파하고 심리적인 억압과 자체 검열을 추방해 소외 현상을 없애고 사상의 자유를 실현시킨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잔디밭에는
웃음소리, 말소리 느긋하게 앉아 있지만
물속처럼 적막한 벨리얼칼리지 연구실 앞마당은
발 딛기도 미안하다
탄식의 다리에서 어디 한숨만 새어 나왔으랴?
책을 쌓아놓고 읽다가 밖을 내다보면
뜨락에서 햇살이 숨을 쉬고
상상은 날개를 펼쳤으리
저 잔디밭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던 토마스 모어
우주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스티븐 호킹.
―「옥스퍼드에서」 전문
“토머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는 대법관을 포함해 여러 관직을 역임한 잉글랜드의 법률가이자 정치인이다. 개신교를 거부하고 탄압한 로마 가톨릭의 성인이면서 이상적인 정치 체계를 꿈꾸어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저술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에 따라 살고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는 공동체 사회를,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지고 전쟁이 없는 이상향을 추구했다. 그가 제시한 유토피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지만, 근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왕위지상령의 서약 강요에 동의하지 않아 반역죄로 처형당하면서도 세속인은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킨 지식인이었다.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은 1942년 영국에서 태어난 이론 물리학자로서 블랙홀과 관계된 우주론과 양자 중력의 연구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21세 때 루게릭병을 앓기 시작해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지만, 2009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의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시간의 역사』『위대한 설계』 등의 대중 과학서를 저술하는 놀라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는 우주는 중력과 같은 법칙이 존재하므로 무(無)에서 스스로 창조된 것이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외계인은 존재하며 시간 여행은 가능하고 밝히면서 인류의 미래는 우주의 건설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천국이나 사후 세계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창조론을 지지하는 자들로부터 비판받고 있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신념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작품에서 시인이 “옥스퍼드” 대학에 찾아가 “토머스 모어”와 “스티븐 호킹”을 떠올린 것은 그들을 지식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은 그들의 연구와 신념을 다시금 새기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은 그런 것은 그렇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닌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지만……’ 같은 식으로 타협하는 지식 전문가와는 다르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에게는 전문가다운 지식과 경험뿐만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지식인은 항상 자기비판을 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와 같은 면을 “토머스 모어”와 “스티븐 호킹”을 통해서, 그리고 또 다른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
4.
서화담의 도력은 어여쁜 황진이를 물리치고
밥솥을 뒤집어쓴 이토정이 천지비결을 풀고 있을 때
허준은 지리산에서 약초를 찾아다녔다
안동 땅 와룡에서는 퇴계가 학동들의 종아리를 치고
율곡의 어머니가 대관령을 넘어 다니며
센 바람에 치맛자락을 날릴 때마다
예교의 향기가 자자했었다
생각하면 나라의 기운이 잔뜩 올라 있던 때
명문과 명필들은 팔도 곳곳에서
붓을 휘두르고 있었다
밀양의 아랑도 그때 사람이었으니
똑똑하고 아름다운 인재들이 많고도 많았지만
꺽정이는 목을 놓아 꺽꺽 울고
서림이는 헤헤 웃고 있었던 것이다
예성강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지만
섬뜩한 초승달이 동해바다 너머 떠오르고 있었다.
―「명종시대」 전문
“명종”은 열두 살에 즉위했기 때문에 친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권력이 문정왕후 쪽으로 기울어 왕후의 친동생인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원형은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갖가지의 죄목으로 유배시키거나 사사한 을사사화(1545)를 일으키는 등 전횡이 심했다. “명종”은 윤원형의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량을 등용시키지만, 그 역시 청렴하지 않아 조정을 농단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라남도 강진과 진도 일대에 왜구가 침략해 큰 피해를 입힌 을묘왜변이 일어났고,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빈번하게 침입했다. 국정이 지식 전문가 혹은 사이비 지식인들에 의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명종”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뜬 뒤 국정을 전횡한 윤원형 일파에 철퇴를 가하고, 비변사를 새롭게 설치하는 등 국방의 대책을 수립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등 선정을 펼쳤지만, 문정왕후가 타계한 지 두 해 뒤인 서른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위의 작품에서 시인은 “명종시대”가 영위될 수 있었던 것은 사이비 지식인의 전횡 속에서도 지식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물론 무수한 백성들에 의해 “명종시대”가 이루어진 것이지만 지식인들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여쁜 황진이를 물리”친 “서화담”, 천지의 비결을 풀어낸 “이토정”, 지리산에서 약초를 찾아다닌 “허준”, “안동 땅 와룡에서” “학동들의 종아리를” 친 “퇴계”, “대관령을 넘어다”닌 “율곡의 어머니”, “밀양의 아랑” 등을 지식인으로 내세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을 놓아 꺽꺽 울”던 “꺽정”도 지식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는데,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해 황해도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관청이나 양반 및 토호의 집들을 습격하거나 정부에서 거두어들인 공물이나 진상물을 탈취해 빈민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꺽정”의 활약은 1562년(명종 17년)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의 등장은 부패한 정치에 대한 농민들의 봉기가 집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지배 계급의 입장에서는 “꺽정”을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말하겠지만 민중들은 의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시인이 이와 같은 평가에서 “꺽정”을 시대적인 의의 차원에서 선택했다.
지식인은 계급의 대립과 시대의 갈등 속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갈등이 지배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식인은 근본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억압받는 계급의 편에 서서 연대 관계를 맺는다. 근본적인 진리란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것, 즉 휴머니즘이다. 중세의 성직자나 귀족, 근대의 부르주아 등에서 보듯이 어느 시대나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이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 가치를 복원시키고 자유의 실현을 위한 지식인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신원철 시인은 지식인들을 만나려고 부단하게 달려가고 있다. 그것을 힘들어하지 않는데, 지식인의 역할이 우연이나 한 번의 행사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실천 행동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식인의 의무는 물론 자부심을 인식하고 자신의 길을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