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아노라>
1. 강렬하고 뜨겁고 격렬하며 짜릿한 영화를 만났다. 성적인 자극과 애욕이 넘쳐나지만 상대적으로 폭력은 적은,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유쾌하고 애잔한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모습들은 웃음과 슬픔이 공존하는 페이소스를 만들어낸다.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노라>는 어쩌면 게급적으로 최하급이라 할 수 있는 스트립걸과 러시아 재벌의 아들과의 충동적 이탈을 통해 사랑의 허무감과 계급적 차별로 통제되고 차별되고 있는 현실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성인술집의 스트립걸로 일하고 있는 아노라는 손님으로 방문한 러시아 재벌의 아들 이반과 성적계약을 맺고 파트너 역할을 하게 된다. 일시적으로 맺은 계약이지만 두 사람은 호감을 갖게 되었고 이반은 아노라에게 청혼한다. 분명 말도 안되는 충동적인 결정이었음에도 아노라는 일시적으로 계급상승의 욕망에 휩쓸렸고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기를 기대했다. 그녀는 ‘신데델라 콤플렉스’에 일시적으로 사로잡힌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결혼 사실을 알게 된 이반의 가족들은 사람들을 보내 결혼을 취소시키려 했다. 이 과정은 냉혹하지만 매우 유쾌하게 그려진다. 러시아 재벌이 보낸 사람들 또한 조금은 어설프고 인간적인 존재들이어서 비록 강압적으로 일을 처리하려하지만 그들 또한 재벌의 하수인이라는 한계 속에서 자기의 불이익에 고민하는 존재들이었다.
3. 결국 아노라는 이반의 청혼이 일시적인 객기였으며 마지막 미국 여행을 기념하기 위한 자기만족적 행동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반이라는 인간은 재벌부모 앞에서 제대로 된 자기 의사도 표현하지 못하는 철부지 인간이었으며, 그가 한 행동은 상대가 겪게 될 감정과 비탄에 대해서는 조금도 공감능력을 갖지 못한 철없는 무개념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을 취소시키려는 재벌 측의 협박 또한 아노라에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행위의 현실적인 한계를 알려주는 과정이었으며 그녀의 사회적 위치가 얼마나 초라한가를 확인시켜주는 과정이었다. 계급적 차이를 극복하는 ‘신데렐라’의 실현은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허구적인 일인가를 강렬하게 증언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4.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허탈하게 무너진 아노라와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재벌 측에서 고용한 보디가드일 뿐이었다. 사건 내내 부딪히고 충돌했던 두 사람이지만, 마지막 순간 서로 포옹한다. 그 포옹은 허무하다. 돈과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 속에서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아픔을 서로가 위로하는 포옹이었지만, 결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닫게 하는 포옹이었기 때문이다. 계급적 질서가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정직한 시선은 영화가 끝나고도 어떤 음악도 음향도 없이 침묵 속에서 오르는 크레딧의 쓸쓸함과 함께 더욱 잔혹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 안심되는 것은 끝없는 파탄 속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은 아노라의 모습과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정해주는 누군가의 눈길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존재할만한 이유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첫댓글 - 돈과 섹스, 사랑과 욕망의 다양성 그리고 씁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