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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는 이야기부터 하나 하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살던 동네에 커다란 공원이 있었습니다. 옛날 저수지를 공원으로 만들었어요. 지금은 율동공원이 되었습니다. 그 공원 근처에 살 때 낮이고 밤이고 산책을 많이 나갔습니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면 한 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산책을 하고, 차 생각이 나면 매점에 들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아주머니가 반겨주었습니다. 매점 안에는 조그만 탁자가 있고, 빙 둘러서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아마 한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에요. 보통 낮에는 할아버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녁 때가 되면 할아버지들이 집으로 들어가시니까, 그때는 매점도 한산하고, 의자가 늘 비어 있습니다. 매점은 거의 10시가 되어야 문을 닫았습니다. 한 9시쯤 해서 공원에 가면 대개는 아줌마하고 한 시간 정도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키가 자그마한 아주머니인데 참 이야기를 잘 했습니다. 살다보면 이야기꾼을 만납니다. 무슨 말을 꾸며내서 연기를 하는 그런 과장된 몸짓을 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진솔하게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은 자연 거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가 살아온 내력을 어쩌면 그렇게 술술 말로 잘 풀어내는지 우선 그 솔직함에 참 놀라곤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주머니가 정서가 불안한 인상은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키는 자그마했지만, 아주 단단한 인상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가끔 저녁에 산책을 하다, 그 아주머니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는데요. 그런데 아쉽게도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매점의 운영권을 둘러싸고, 시에서 입찰을 하는데 무언가 남편이 절차를 잘못 밟아서 그만 감옥에 까지 가게 될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참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늘 이야기를 들어주던, 이야기 친구가 되었던 내가 아주머니를 도우려고 해도 무슨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안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주머니에게 동화책을 가져다 드리는 일 뿐이었습니다. <몽실언니>를 가져다 드리면서 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아무리 눈물이 나더라도 이 동화책만은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과연 아주머니가 그 책을 읽으실까 했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인데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나는 아주머니가 동화책을 읽었단 소리를 듣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아, 저 아주머니는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쓰러지지 않는다. 틀림없이 다시 일어난다.'
저렇게 힘든 상황에서 동화책을 읽는다는 건 대단한 마음의 힘입니다. 그때 그 아주머니를 보면서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예로 한 십년 만에 만난 두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한 친구는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또 한 친구는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얼굴이 힘겨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합시다. 이런 두 친구를 볼 때, 얼핏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저 얼굴이 좋은 친구는 하느님이 특별히 사랑해주고, 저 힘겨운 친구는 하느님이 특별히 벌을 주셨구나 하구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물론 삶이 처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마 하느님은 우리 사람 누구에게나 똑같은 양의 고난을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고난이 밀려올 때, 그만 자기 내면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며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만 그 고통에 삶이 통째로 먹혀 버린 것이 아닐까. 얼굴이 좋은 친구에게도 고난은 왔겠지만, 그럴 때 그 친구는 문제를 아마도 자기 내면에서 찾고, 대화하는 그런 마음 여행을 하는 힘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매점 아주머니는 그 힘든 상황에서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문학의 힘이 있습니다. 동화책 속에는 아주머니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그 어떤 실제 삶의 처세술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동화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는 아주머니 삶에 상당함 힘과 위안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동화책을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는 아주머니가 자신의 마음속 여행을 할 수 있는 그런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단 훌륭한 증거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정신놀이를 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기 때문에, 일상의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삶에 직면해서 겪고 다시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대안을 찾아나갈 것입니다.
2.
그럼 다시 옛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보통 동화 공부하는 어머니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옛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입니까? 그러면 많은 어머니들이 권선징악이란 말을 합니다. 물론 이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옛이야기를 권선징악이란 어떤 교훈의 틀 안에 가두어 놓을 때, 정작 우리가 꼭 새겨둬야 할 그 이면의 문제를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나라 옛이야기 예를 들었으니까, 이번에는 일본의 옛이야기 한 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꽃 피우는 할아버지>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마음씩 착한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자식도 없는 할아버지는 개를 한 마리 길렀습니다. 하루는 개를 데리고 밭에 나가 일을 하는데, 개가 자꾸만 땅을 보고 짖으면서, 여길 한번 파 보라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그리 거길 파보라 그러냐면서, 일을 하다 말고 땅을 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구덩이 속에서 금돈 은돈이 나왔습니다. 이래서 할아버지는 금돈 은돈을 갖고 집에 와서 이제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하고 있는데, 이 소식을 옆집 마음씨 나쁜 할아버지가 들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아, 자네 거 밭에 나가서 그렇게 많은 금돈 은돈을 얻었다는데, 그 개 좀 나한테 빌려주게나” 하였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아마 다른 건 몰라도, 이 개만큼은 못 빌려주겠네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옛이야기 주인공들은 물론 개를 빌려줍니다. 마음씨 나쁜 할아버지는 그 개를 데리고 밭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개가 짖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씨 나쁜 할아버지는 개를 발로 차고 해서 억지로 짖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 여기를 파보란 말이냐, 하면서 땅을 파보았습니다. 그러자 땅 속에서는 온갖 오물투성이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 마음씨 나쁜 할아버지는 무슨 이런 개가 있느냐면서 그만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옛이야기를 보면 착한 사람과 마음씨 나쁜 사람이 늘 나옵니다. 지난 달에 들어본 눈이 먼 동생 이야기에도 착한 동생과 나쁜 형이 나옵니다. 옛이야기 공부를 볼 때, 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아가 봅시다.
3.
위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보겠습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마음씨 나쁜 할아버지가 개를 돌려주지 않자, 착한 할아버지는 마음씨 나쁜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거 우리집 개는 어찌되었느냐 하니까, 마음씩 나쁜 할아버지는 아니, 무슨 개가 그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느냐구, 밭을 파보니까 글쎄 똥오줌만 잔뜩 나와서 화가 나서 돌로 쳐 죽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착한 할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그럼 그 죽은 시체라도 달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개를 들고 집으로 가서, 착한 할아버지는 안 마당에 묻고, 거기에 무덤표시 나무를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며칠이 지나자 쑥쑥 자라서 아름드리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 나무를 보고 착한 할아버지는 우리 개 하루 공양이라도 해 주어야겠다 하고는 나무를 잘라 절구를 만들고, 그 절구 안에 쌀을 넣고 빻는데, 그 쌀이 또 금돈 은돈으로 변했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나쁜 할아버지가 또 찾아왔습니다. 그 절구를 빌려 달라 그래서, 착한 할아버지는 또 아무 말 없이 빌려주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도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절구를 빌려가서 쌀을 넣고 빻았는데, 절구 안에서 또 오물 투성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마음씨 나쁜 할아버지는 절구를 도끼로 뽀개서 불에 넣어 태워버렸습니다.
착한 할아버지는 며칠이 지나도 절구를 돌려주지 않자, 나쁜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절구를 불에 태워버렸단 사실을 알고, 그러면 그 재라도 달라 하였습니다. 재를 얻어다가 집으로 돌아와 죽은 나무에 뿌려주었더니 글쎄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죽은 나무에 꽃을 피워주며 다니는데 이 소식을 원님이 들었습니다. 착한 할아버지는 마을 원님 앞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착한 할아버지에게 또 금돈은돈을 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나쁜 할아버지도 듣고, 아궁이에 남은 재를 갖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마을 원님이 지나자, 자기도 꽃을 피울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한번 해 보라 그래서, 이제 나쁜 할아버지가 죽은 나무에 재를 뿌리는데, 꽃은 피지 않고 그 재가 원님의 눈구멍 콧구멍으로 들어가, 저 놈은 가짜다 하면서 오랏줄에 묶어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 옛이야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 옛이야기도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온갖 기적의 선물, 구원자가 되는 목숨이 나옵니다. 아마 이렇게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면, 보통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지 모릅니다. “거 봐라, 이렇게 나쁜 짓을 하면 꼭 벌을 받게 되지. 너도 나쁜 짓하면 안돼.”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즐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이들 몸은 굳어버리는 거지요. 나쁜 짓을 하면 저렇게 벌을 받게 된다는 어떤 강박관념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야기는 아이들의 내면을 자유롭게 열리게 하고, 풍요롭게 해야 하는데, 이런 교훈을 강요한 이데올로기가 아이들에게 주입되면, 잘못하면 어떤 가면(페르소나)을 쓰게 함 위험성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4.
지금 페르소나를 쓰게 된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옛이야기를 지나치게 권선징악의 자리에서 보는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으로 뚜렷하게 구별하는, 또는 선과 악을 대립의 관점으로만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힐 위험성이 있습니다.
옛이야기는 예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의 분신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착한 할아버지도 나고, 나쁜 할아버지도 나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옛이야기를 보면 우리는 인간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위와 같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오는 옛이야기를 들려준 다음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애들아, 이것봐라. 우리 마음 속에는 착한 할아버지도 살고, 나쁜 할아버지도 사는 거지. 그러니 어떻게 하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냐.”
이런 식으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저 선과 악 이 두 유형의 인물을 앞에 놓고 우리는 우리 마음을 솔직하게 돌아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 속에도 나쁜 사람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아이는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남의 탓으로만 문제의 본질을 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의 내면에도 나쁜 사람과 같은 속성이 들어있으니, 자기를 돌아보게 되고, 참회하고 또 용서하는 마음 또한 생겨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5.
앞에서 살펴본 눈먼 동생 이야기에도 후편이 있습니다. 눈찔린 동생이 금독 은독을 얻어 잘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쁜 형은 자기가 자기 눈을 부지깽이로 찌릅니다. 그래서 눈이 멀어서 산으로 가 목을 메려 하는데, 승냥이 들이 어디 사람 냄새가 난다고 나타났습니다. 나쁜 형을 보고는 저 놈은 마음씨가 나쁜 놈이다면서 잡아먹어버렸습니다.
앞에서 들어본 <꽃 피우는 할아버지>나 <눈먼 동생 이야기>나 우리는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옛이야기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삶의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착한 동생은 자기에게 해를 끼친 나쁜 형을 스스로 미움의 감정을 갖고 앙갚음 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꽃 피우는 할아버지>에서도 착한 할아버지는 소유할 줄 모르고, 화낼 줄도 모르고, 또 벌줄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보면 나쁜 사람은 벌을 받게 됩니다. 스스로 욕심을 부려 화를 자초하긴 하지만, 확실하게 벌을 주는 목숨은 제 삼자인 이야기속 구원자로 나온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구조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언제나 죽이는 일을 맡은 자가 죽이는 법이니, 무릇 죽이는 일 맡은 자를 대신해서 죽이는 것을 일컬어 큰 목수 대신 나무를 벤다고 하거니와 큰 목수를 대신해서 베는 자는 손을 다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74장)
옛이야기에 보면 나쁜 사람을 벌주는 ‘죽이는 일을 맡은 자’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직접 칼을 휘두르지는 않습니다. 저 죽이는 일을 맡은 자가 바로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구원자들일 겁니다. 그 구원자들은 아마도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던 어떤 우주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원형을 상징하는 목숨들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권선징악의 자리에서 옛이야기를 보는 관점은 문제의 본질을 나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만 찾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외부세계에서도 물론 문제의 본질을 찾되, 자기 내면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빛과 그림자가 되는 양면의 속성을 찾을 때 그 아이는 훨씬 성숙한 자리에서 전체성을 읽어내는 아이로 성장해 가겠지요.
6.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잠깐 매점 아주머니 이야기도 하였는데요. 문학은 정신놀이 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요즘 밥의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굶어죽지는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밥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그만큼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은 훨씬 자유로워졌습니다. 밥을 먹고 나면, 그 다음에 사람들은 놀이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이 정신놀이인 문학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 갑니다. 다시 말해서 밥의 문제가 해결된 세상에서 사는 아이들일수록 이 정신놀이인 마음속 여행이 점점 중요한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마음 속 여행을 돕는 훌륭한 스승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 그렇군요...
요즈음 옛이야기 공부를 새롭게 하고 있는데 이 글을 보니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