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법성포초등학교 학교사(學校史) 뿐만 아니라 법성향토사 전체를 공론화하기 위해 보다 정확한 향토사를 기록하기 위한 On-Line 계획의 일환으로 시도된 글이다.
글에 미흡한 부분이나 사실과 다른 부분, 보완이 필요한 부분과 반론 등은 이 글을 읽는 이 누구나 개진하실 수 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의견과 학교사의 기록에 소중한 사료나 문헌이 있으신 분은 학교 또는 운영위원회로 연락해 주기 바란다.
개교 100주년을 즈음해 학교 운영위원회(위원장 정명수)는 법경헌에 자료를 의뢰, 기록을 정리해서 게재하게 됐다. / 편집자 주
법성공립보통학교는 1938년 인의산 교정의 화재로 22년간의 인의산시대를 마감하고 1939년 9월1일 지금의 법성포초등학교가 자리로 옮겨 대덕산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고 1941년 4월1일, 교육령 개정으로 학교의 이름이 보통학교에서 법성포 동공립국민학교로 바뀌게 된다. <법성향지>는 1940년대 당시의 학교 상황을 '1943년 졸업반까지 1학급 남녀 혼합학교였는데, 여학생 수가 10명도 안되었다.
그 다음해 졸업반부터 2학급이었는데, 남학생반 1학급과 여학생반 1학급이었지만 여학생 수가 한 학급에 부족하여 3분의 1정도의 비교적 어린 남학생들을 섞어서 한 학급을 편성하였다.
'1940년경까지 홍농, 전북 공음의 소학교가 4년제였고, 성제동 대성학교가 4년제, 용현부락의 간이학교가 2년제여서 이들 학교의 졸업생들이 모두 법성포 동공립보통학교(후에 심상소학교)의 해당 학년에 전학. 편입돼 여기에서 6학년 정식과정을 마쳤다.' '한달 월사금이 80전이었고, 한 집에서 둘 이상이 다니면 나머지 학생은 반액인 40전이었는데, 이 돈이 없어 못 다니는 학생이 다니는 수보다 훨씬 많았다.'
'교무실 앞 히말라야시다 거목(巨木)과 기타 정원수는 1939년 신축 당시에 광주에서 정원사들이 와서 심은 것이고, 운동장 주변의 벚꽃나무는 법성리 전(前) 교사(주 인의산 교정) 운동장 가에 있던 것을 옮겨 심은 것들이다.'
'부임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인의산에서 대덕리 신교사로 이전 직후까지 쓰쓰미다(堤田)라는 교장이 재직했었고, 1941년에 와다(화전(和田)교장으로 교체되었다. 쓰쓰미다 교장은 철저한 황국신민주의자로 학생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소위 '닝꾸단랭(忍苦鍛鍊의 일본말)'을 시킨답시고 서릿발이 내리는 겨울철에도 어린것들을 맨발로 등하교시켰다.
발이 시려 견딜 수가 없던 꼬마들이 선생님의 눈을 속여 고무신을 신고 학교 근처까지 와서는 민가에 고무신을 맡기고 등교를 했다가 하교(下校)때에 다시 찾아서 신고 돌아가기도 했다.
쓰쓰미다 교장은 그 후 전라남도 학무과 장학사로 승진되어 갔다가 해방되던 때까지 재직하고 있었다. 이전하기 전, 구 교사시대(주 인의산에 학교가 있을 때)의 한국인 훈도(주 선생님)는 범재진(范在鎭), 김형석(金炯錫), 정운경(鄭雲慶) 제씨였고 유일하게 여선생으로 영광 출신 노함풍(魯咸風)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지금 60세 이상 70세가 가까운 분들(주 <법성향지>가 집필된 1987년 기준)은 이 분들에게서 배웠다.
그 중 일본인 요시노(吉野)라는 훈도가 있었는데 일본말 교가를 지었다. "조선반도 남단에 세상에도 이름 높은 법성…"으로 시작되는 가사였다. 작곡은 아마도 범 선생(주 범재진)이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범 선생은 바이올린을 잘 켰는데, 으레 학예회 때는 전등불을 모두 끄고 바이올린 독주를 했었다. 교사(校舍) 이전(주 1938년 이전)에 범 선생은 곡성으로, 정 선생(주 정운경)은 서울 교동보통학교로, 김 선생(주 김형석)은 송정리 서소학교로 전근하고 남녀 일인 교사들이 판을 치게 되었는데 일제 말기에는 교사들이 군대에도 나가게 되고 학급 수가 늘어나서 교사가 부족하게 되니 중학교를 졸업한 이 고장 출신의 청년들도 여러 사람이 교사직에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덕과 진양 그리고 대성학원 이와 같이 법성사립보통학교나 법성공립보통학교의 초창기 학교사(學校史)는 1938년 그리고 1946년 두 차례나 학교가 불이나 학교에 소장되어 있어야 할 사료나 문헌보다는 당시 이 학교를 다니셨던 어르신들의 증언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법성포초등학교의 학교사(學校史)인 성제동의 대성학원이나 예전의 삼덕초등학교 학교사는 통폐합 과정도 명료하고, 화재 등 특별한 사고도 없었던 학교였기 때문에 오히려 법성사립보통학교나 법성공립보통학교보다는 더 많은 사료나 문헌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성향지>에서는 성제동에 있던 대성학원은 '1915년, 이 고장에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가 대덕리 성제동에 세워지면서 포교의 일환책으로 설립되었다. 4년제로, 설립자는 장성군 출신의 장로(長老) 성재원과 성제동 출신의 한학자요 (법성)사립보통학교 제1회 출신인 나상희였다. 초대 원장에 나명수, 부원장에 안동운이었다.
학생은 대부분 가정이 빈한하고 보통학교 적령기를 놓친, 나이 많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학비는 무료이니 포내(浦內)(주 법성포내)는 물론 외촌(外村)(주 법성포외)의 많은 소년과 총각들이 대부분이었다. 기혼자도 있었다.
2대 원장에 영광출신 정헌영, 3대 원장에 전북 공음출신 류억석, 4대 원장에 전북 무장출신 손성태, 5대 원장은 일본 제국대학 출신 손진환, 6대 나상희, 7대 안동운이었다. 1930년에 성제동 김옥천 여사의 헌금으로 교사를 신축했다. 그때까지 교사는 예배당 마루바닥에 석유 궤짝을 책상 삼아 공부를 했었다.
1941년 4년 졸업생 전원이 법성초 동공립보통학교(주 지금의 법성포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학되었다. 그 후 1948년에 법성포초등학교 분교로 흡수되었다가 1955년에 폐교되고, 법성포국민학교로 병합(후략)'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삼덕초등학교는 '일정치하인 1936년 4월21일에 법성포 동공립국민학교 부설 용덕간이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동년 6월7일 개교하였다. 1944년 3월31일에는 6년제(종전에는 2년제)로 승격되면서 법성포 남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50년 6월5일에는 현재(주 <법성향지> 집필 당시인 1987년 현재)와 같이 삼덕국민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다.(후략)'라고 기록돼 있다. 법경헌
1946년 4월2일 화재후 피땀어린 법성면민의 노력으로 새로 마련된 법성포초등학교 모습 |
첫댓글 잘보고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