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예수의 흔적 지님
갈라디아서 6:11-18
우리 교회당 정면 머릿돌에 [주후 1977년 11월 25일]이란 글자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관심 없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글자를 볼 때마다 교회당을 건축할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로 멋진 글씨체로 쓸 수 있지만 그 땐 컴퓨터도 없고 세멘트로 미장 한 후 굳기 전에 못으로 파낸 쓴 글입니다.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는 저의 글씨체가 교회당이 헐리기까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교회당 정면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동성교회]라는 간판은 고려신학대원 장 이근삼 박사님께 부탁했더니 쾌히 허락하시고 붓으로 써 주신 것을 붙혀 놓고 제가 새긴 것 입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이 박사님의 글씨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이 박사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의 흔적이 우리 교회당 건물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17). ‘흔적’은 고대 사회에서 주인이 노예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 노예의 몸에 낙인을 찍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17). ‘예수의 흔적’은 자신이 예수의 소유가 된 흔적이란 말입니다.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으로 인해 몸에 상처들입니다. 자신의 몸에 남게 된 상처들은 바울 자신이 예수님의 신실한 사도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는 것 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12). 요즘 탈렌트나 배우들 대부분이 성형수술을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것처럼, ‘육체의 모양을 낸다’는 말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술수를 감추고 외형적 모양을 다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마치 육체의 모양을 내기 위해서 꾸미는 것처럼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할례 받은 자는 구원이 있고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구원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15). 육체의 모양을 내기 위한 할례나 무할례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 비결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도 할례를 받았지만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17).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 때문에 받은 고난의 흔적입니다. 복음 전하다 잡혀 매 맞은 상처들 입니다. 복음 때문에 잡혀 갇히고 굶주리고 헐벗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하다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했습니다(고후11:23). 매도 사십에서 하나 감한(서른 아홉)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했습니다(고후11:24). 당시 유대인들의 규례는 마흔 번 매를 치면 죽기 때문에 마흔 번의 매를 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마흔에 하나 감한 서른 아홉 번 매를 맞았다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고후11:25). ‘태장’은 가죽끈의 끝에 납덩어리를 매달아 매질하는 형벌로, 로마인들이 노예나 이민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형벌입니다. 그 고통은 극심하여 살이 찢겨지고 피가 터져 나와 집행 중에 죽는 경우가 허다한데, 바울은 세 번이나 태장을 맞았습니다.
여러 번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고후11:26,27). 이 모든 것들을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닌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 흔적들은 매 맞은 자국과 흉터로 남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할례와는 대조가 되지 않을 정도의 예수의 흔적을 바울은 육체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예수의 흔적도 자랑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받은 할례도 자랑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고생한 흔적들이 자기 몸에 남아 있습니다. 지난 날 가난할 때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죽도록 일 하셨던 흔적이 부모님들의 몸에 남아 있습니다. 고생한 흔적들을 온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히 손을 보면 고생을 얼마나 하셨는가 알 수 있습니다. 손에는 고생하신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예쁜 손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생한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곱던 손이 볼 품 없는 흉한 손이 된 것 입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지문도 없습니다. 손가락도 몇 번이나 찍히고 비이고 다쳤던 흔적들 때문에 모양도 없이 비뚤어진 것입니다.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고생한 모든 흔적들이 온 몸에 남아 있습니다. 허리가 굽은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녔던 흔적들입니다. 마음대로 걷고 뛸 수 없는 다리는 지난날에 고생하셨던 흔적들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손톱이나 가꾸고 했던 손은 고생했던 흔적이 없습니다.
외모 뿐 아니라 속마음은 얼마나 썩었습니까? 놀란 가슴에 화병만 남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걱정 근심으로 하루 인들 마음 편한 날이 없었던 것들과, 남편 때문에 속 썩이고 눈물 흘린 것들, 아내 때문에 낙심하고 분했던 흔적들이 불안과 우울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속알이 한 흔적들은 화병으로 남아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예뻤고 건강했지만 고생한 흔적들이 지금은 골병만 남았을 뿐입니다.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도된 나와 여러분의 몸에도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흔적이 얼마나 크냐 작으냐가 다를 뿐이지 성도들에게는 모두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구박을 받으면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지켜 온 것은 예수의 흔적들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손해 본 것들, 예수 믿는 다고 욕 들었던 것, 가까이는 부모나 형제들로부터 받은 핍박들, 친구나 직장에서 받은 손해들은 여러분의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들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목에 걸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나 금메달을 따기까지 피눈물 나는 훈련으로 받은 상처는 그 몸에 흔적들로 남아 있습니다. 피겨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김연아 선수의 발은 흉터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흉터와 흔적들이 있었기에 피겨 여왕이라는 최고의 영광을 얻게 된 것 입니다. 그 흔적들 때문에 금메달을 목에 걸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의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들은 빛나는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여러분들의 몸에 지닌 흔적들이 자랑스러운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서는 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들을 보시고 크게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단독 목회를 하면서 첫 주일부터 주보에 설교를 올렸습니다. 1987년부터 오늘까지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매주일 낮 설교 원고가 수록된 주보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주보에는 저의 목회 흔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날의 주보를 보면 그때의 일들을 생각합니다. 즐거웠던 흔적이나 어렵고 힘들었던 흔적들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문을 작성하여 보관하므로 언제 어떤 설교를 어디서 했다는 것도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설교문을 주보에 올리므로 매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 어려움이 큽니다. 글자 받침도 틀리지 않아야 합니다. 매 주일 설교를 준비 할 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성장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 하면서 기도도 더 많이 해야 하고, 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목사가 강단에 서고 입만 벌리면 말씀이 줄줄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다가도 설교 생각으로 고민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준비한 설교가 명품 설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목회 한 흔적들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흔적들도 있습니다. 유아실에 비가 스며들고 곰팡이를 볼 때 내 스스로 죄송함을 느낍니다. 유아실은 2층에 올라가는 계단이였습니다. 교회당을 지을 때 저의 짧은 생각으로 별 쓸모도 없는 2층을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므로 비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저의 짧은 소견이 오늘날까지도 부끄러운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몸에 흉터 자국을 볼 때 마다 사고로 다쳤던 때를 생각합니다. 믿음 때문에 매 맞은 흔적이라면 자랑스럽지만, 믿지 않았을 때 술 취해서 패싸움을 해서 크게 다쳐서 생긴 흉터라면 부끄러운 흔적이 될 것입니다. 몸에 지닌 흔적들을 볼 때마다 지난날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불교에 입적하면 불계를 받습니다. 교인들이 세례 받는 것처럼, 눈에 잘 띄는 손목에 불침을 놓아 흉터를 남깁니다. 다른 종교로 이적하지 못하도록 불계를 주는 것 입니다. 그러나 불계는 우상 섬기는 부끄러운 흔적을 몸에 지니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하며,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시며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랑스러운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부끄러운 흔적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을 때 뜰에서 불을 쬐다가 작은 여종 하나가 ‘너도 이 사람의 제자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하니까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부끄러운 흔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래위에 걸었던 발자국의 흔적들은 물이 들면 지워집니다. 그러나 몸에 지닌 흔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았다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니까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락으로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요20:2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에 못 자국과 창에 찔린 허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흔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그 몸에 지니신 흔적들입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사탄 마귀는 우리의 죄를 낱낱이 폭로하며 지옥 형벌 받을 자로 정죄할 것입니다. 그때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손에 못자국과 허리에 찔린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내가 대신 죽었노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 마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 흔적들을 보면서 구원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의 흔적들을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받은 고난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눈물 흘리며 말못한 속알이 흔적들을 우리는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의 몸에 지닌 흔적들이나,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과 허리에 창자국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작은 흔적들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 흔적들, 교회를 떠나지 않고 끝가지 자리를 지켰던 흔적들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에 지니고 있는 예수의 흔적들은 영광스러운 흔적들입니다. 여러분의 몸에 지니고 있는 ‘예수의 흔적’은 무한한 영광이요 무한한 축복입니다. 바울처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자랑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