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동첩(白鹿洞牒) -주희(朱熹)
본 군(軍)의 여산(廬山)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 대하여 《국조회요(國朝會要)》와 본군의 도경(圖經)과 기문(記文)ㆍ석각(石刻)에서 살펴보니, 원래 당나라 빈객(賓客) 이발(李渤)이 은거했던 곳으로 옛날에는 누대가 있고 물이 돌아 흐르고 여러 가지 꽃나무를 심어 한 때 명승지가 되었다. 남당 승원(昇元) 연간에 학관(學館)을 세운 것으로 인하여 땅을 사들여 제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니 학자들이 크게 모여들었다. 이에 국자감 구경박사(九經博士) 이선도(李善道)를 동주로 삼아 교수를 담당하게 하였다. 본조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에 이르러 지강주(知江州) 주술(周述)이 말하기를, “ 여산 백록동에 일찍이 학도가 1백 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구경(九經)을 하사하여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 요청을 들어주라는 명을 내리고 국자감에 인본(印本)을 주어 전송하게 하였다. 7년에 또 동주 명기(明起)를 채주(蔡州) 포신현(褒信縣) 주부(主簿)로 삼았다. 7년에 비로소 남강군을 둠으로써 드디어 군 경내에 소속되었다.
상부(祥符) 초기에 직사관(直史館) 손면(孫冕)이 백록동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고, 세상을 떠나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장사지냈다. 그 아들 비부낭중(比部郎中) 침(琛)이 다시 학관 열 칸을 마련하고 ‘백록동지서당(白鹿洞之書堂)’이란 여섯 글자를 써서 기둥 사이에 걸고 자제들과 사방의 선비를 가르쳤으며, 나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또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당도(當塗) 곽상정(郭祥正)이 기문을 썼다. 후에 전쟁을 겪어서 집들이 남아나지 못하였고 그 기문(記文)과 석각(石刻)은 고을의 성에 있는 천경관(天慶觀)으로 옮겼다.
지난번 내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찾아가서는 확실한 것을 얻지 못하였는데, 근래에 연못을 찾아 직접 그곳에 가서 바라보니 사방 산수가 맑고 그윽하게 둘러쳐서 시정(市井)의 시끄러움이 없고 아름다운 천석(泉石)이 있었다. 참으로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거나 은둔하여 저술을 할 장소였다. 이에 다시 여산 일대에 1백 개 가량의 노불(老佛) 도장(道場)들은 파괴되었다가 다시 중수하지 않을 곳이 없는데 오직 선비들이 공부하던 학관은 이 한 곳뿐인 것을 개탄하였다.
이곳은 이미 전 왕조 명현의 고적이고 또 태종황제가 경전을 반사하여 한 고을 선비들을 교육시킨 큰 은덕을 입었다. 그런데 한 번 황폐해지고 나서 수년 동안 다시 진흥되지 못하였으니, 우리 도(道)의 쇠퇴함에 대하여 개탄하고 두려워할 만하다. 또한 황제께서 교화를 펴고 인재를 양성한 뜻이 이 고을에서 드러나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더욱이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여산 백록동을 응당 다시 중수하여 세워야 할 것이다. 운운.
契勘本軍廬山白鹿洞書院於國朝會要本軍圖經記文石刻。元係唐朝李賓客渤隱居。舊有臺榭。環以流水。雜植花木。爲一時之勝。南唐昇元中。因建學館。買田以給諸生。學者大集。乃以國子監九經李善道爲洞主。掌其敎授。至本朝太平興國二年。知江州周述言。廬山白鹿洞學徒嘗數十百人。望賜九經書。使之肄習。詔從其請。俾國子盛給以印本。仍傳送之。七年。又以洞主明起爲蔡州褒信鯀主簿。七年。始置南康軍。遂屬郡境。至祥符初。直史館孫冕請以爲歸老之地。及卒。還葬其所。其子比部郞中琛復置學館十間。書白鹿洞之書堂六字。揭於楹間。以敎子弟。四方之士願就學者。亦給其食。當塗郭祥正實爲之記。後經兵亂。屋宇不存。其記文石刻遂徒置軍城天慶觀。昨來當職到任之初。卽嘗詢訪。未見的實。近因接視陂塘。親到其處。觀其四面山水淸邃環合。無市井之喧。有泉石之勝。眞群居講學遯迹著書之所。因復慨念。廬山一帶。老佛之居以百十計。其廢壞無不興葺。至於儒生舊館。只此一處。旣是前朝名賢古迹。又蒙太宗皇帝給賜經書。所以敎養一方之士。德意甚 大편001。而一廢累年。不復振起。吾道之衰。旣可悼懼。而太宗皇帝敦化育材之意。亦不著於此邦以傳於後世。尤長民之吏所不得不任其責者。其廬山白鹿書院合行修立。云云。
[편-001]大 : 《朱子大全》에는 ‘美’로 되어 있다.
[주C-001]백록동첩 : 《朱子大全》 卷99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