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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 파커 J. 파머
1. 인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라 우리는 알고 있네 저 강물 속에, 흐르는 물살이 숨겨져 있음을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침묵을 안고 수 마일을 흘러왔고 흘러갈 것을 윌리엄 스태포드의 시 ‘스스로에게 물어 보기를’ 중에서 퀘이커 공동체에 내려오는 경구 ‘Let your life speak' 이전에는 이 말을 최고의 진리와 가치가 당신의 삶을 이끌도록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자기 내면에서 밖으로 뻗어나간 삶이 아니라 바깥 세계에서 안으로 밀려들어온 삶으로 살아 왔다. 지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어떤 진리를 구현하고, 어떤 가치를 대표해야 할 지 인생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들어 보아라. 세상에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도덕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베스트셀러 처세서의 차례를 뒤적여 목록을 만들고 일일이 대조해보면서 교양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나도 한때 소명을 자기 인생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따라야만 하는 단호한 의지의 행동이자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엄숙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의 인생을 살려고 하거나 추상적인 규범에 맞추어 살려고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실패하기 마련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 모습을 이해해야 한다. 그 모습이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내면의 부름의 목소리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상에서 의식하는 나, 에고와는 다른 모습, 타고난 그릇으로서의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있다. 인생의 표면적인 경험 아래에 더 깊고 진실한 인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고생도 해 보아야 한다. 일상에서의 우리는 자기 내부의 소리만 빼고, 그 밖의 곳에서 들려오는 말에는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은 행동과 반응, 직관과 본능, 감정과 몸의 상태를 통해서 어쩌면 말보다도 더 심오한 표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지향성, 계속 이어지는 반응, 매일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가는 텍스트를 읽을 수만 있다면 더욱 진정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일상의 순간들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실체에 대한 수많은 오해는 수많은 실수를 통해 풀을 수 있다. 자기의 진실과 소명을 깨닫기 위해서는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서 조용히 기다리기도 해야 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의 소리를 들어보자. 2. 이제 나 자신이 되다 타고난 그대로 사람들은 흔히 외부에서 들려오는 도덕적인 목소리, 자기 모습보다 더 훌륭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런 태도는 자아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시작된다. 늘 부족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상과 실제 모습과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리고 지쳐간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신이 내려준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아이들은 이미 자기만의 형상을 선물 받았으며 자기만의 숭고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 토마스 머튼은 이를 참자아라고 했고, 퀘이커 공동체에서는 내면의 빛, 내면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이라 했으며, 인문주의자들은 정체성이나 본성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재능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난다. 그런데도 이 선물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감추어두기도 하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함부로 써버리기도 한다. 가정, 학교, 직장, 종교 단체는 우리에게 참자아를 버리고 사회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교육시킨다. 우리는 인생의 전반부에서 사회화과정을 거치면서 본래 타고난 재능을 잊어버리고 살아 가다가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 2차 성장을 거치면서 눈을 뜨고 깨달아 원래 가지고 있던 선물을 되찾기 위해 애쓴다. 소명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고난 본성은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데서 출발한다. 건축기사가 재료의 본성을 존중해서 건축물을 세워야 하는 것처럼 사람도 본성이 갖는 능력과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 본성을 무시하면서 무언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을 한다며 꾸며대기를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어두움과 한계를 넘어 우리는 이런 일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에 ?기며 살아간다.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에고와 도덕관념에 자신을 맡기며 영혼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까지 이끌려간다. 생활은 계속해서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렇지만 이런 약함에 의해서 진실을 발견할 여지가 생긴다. 사람들은 상호의존적이 아니라 자율적, 독립적으로 살아가도록 길러졌다. 경쟁해서 승리하도록 훈련받았으며, 포상의 맛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고 자신도 이해가 잘 안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내가 대학에서 도망친 진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연구와 저술을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두려워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의 연구에 영향받지 않고 독창적인 생각을 발전시키고 싶었다. 독서도 연구와 직접 관련된 것보다 폭 넓었다. 신선한 사고방식과 다양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힘을 얻는다. 반면에 이 분야의 다른 사람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며 약간의 게으름과 성급함도 나타난다. 하지만 장점이든 단점이든 이런 모습이 바로 나의 본성이며, 나의 한계와 재능이다. 어떤 주제에 서서히 들어가기보다는 가장 깊은 곳에 뛰어들어 수영할 수 있는지 알아본다. 전체적인 개요보다는 한쪽 구석부터 써내려 가면서 출구를 찾아내려 한다. 꽉 짜인 논리의 고리를 따라가기 보다는 하나의 은유에서 다음으로 도약한다. 그동안 학교를 떠나 자유롭게 다른 종류의 교육에 종사해 왔다. 이제 사실을 깨닫고 내 인생에서 두려움의 역할을 이해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그것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피하려고만 했던 어둠,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나는 지금 한때 두려움과 혐오에 차서 떠났던 학교에 애정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다. 문제가 저쪽 바깥뿐만 아니라 여기 내면에도 있음을 알고 나면 해결책은 분명하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어떤 문제가 생겨도 자신 외에 아무도 탓하지 않으며 소명이라고 믿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 있다. 인생의 거센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과 올바르게 관계를 맺고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함을. 내면의 기쁨과 세상의 요구가 만나는 곳 자기를 돌보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일한 재능,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재능을 잘 관리하는 책무일 뿐이다. 어느 때라도 우리는 참자아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보살핌을 줄 수 있다. 참자아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불량한 재료를 써서 집을 짓고, 악몽으로 이어질 꿈을 꾸며내어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릴 것이다. 사회제도는 종종 사람들에게 진실하지 못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려 든다. 가난한 자여, 빵 한 쪽이라도 감사하게 받아들여라. 흑인이여, 저항하지 말고 인종차별을 받아들여라. 동성연애자여, 내색하지 말고 아닌 척 살아라. 이렇듯 진실을 감추려는 유혹은 도처에 있고, 이에 따르지 않을 때 오는 불이익은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사회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더 이상 내면과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내면의 진실과 상반되는 외면의 방식을 가장하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진정한 자아를 주장하며 그것을 표출하며 살 것을 결심한다. 참자아를 주장하다가 받는 처벌이 아무리 호되다 해도 참자아를 주장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벌보다는 견디기 쉽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이 주는 그 어떤 보상도 자기 스스로의 빛을 밝히며 살아가는 데서 얻는 보상만은 못하다. 참자아는 인생의 생태계에서 강제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도록 해준다. 어떤 여정은 곧은 직선으로 뻗어있고, 어떤 여정은 빙빙 에두르는 길이다. 어떤 여행은 영웅적이고, 어떤 여행은 두려움과 혼란 투성이다. 하지만 모든 여행은 정직하게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세상의 절실한 요구를 만나는 어떤 지점으로 이끌어 준다. 참자아를 향한 우리의 순례는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거쳐야한다. 세상은 자신과 사회를 위해 순례에 나설 열정과 인내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나의 진리, 당신의 진리, 우리의 진리는 각자가 이 땅에 올 때 씨 뿌려진 것이다. 그 진리를 잘 경작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류의 진정한 소명이다. 3. 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 자기 앞에서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믿음을 갖고 있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려 중년이 되어서도 소명의 길은 찾지 못한다. 그동안 열렸던 길은 잘못된 길이었다. 고요 속에 앉아서 기도도 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길이 나타나기를 기다려보아도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 내 앞에서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면에 내 뒤에서 수많은 길이 닫히고 있었다. 우리는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화에서 성장한다. 이 메시지는 사람도, 세상도 한계란 없으며 충분한 에너지와 책임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신이 세상을 그렇게 창조하셨으니 우리는 그 프로그램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계에 부딪히고, 수없이 실패한다. 끝없는 변명과 비뚤어진 자기 합리화가 옳건 그르건 간에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자기 본성과 재능, 즉 관심 분야와 상관이 적은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솔직하다면 그 일을 스스로 그만 두거나 아니면 마음을 잡고 제대로 일을 해야 한다. 능력을 깨닫는 것도 그렇지만 직접 자기 한계에 뛰어들어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본성을 더 많이 알 수 있다. 우리는 장애에 가로막히거나 탈선하거나 완전한 실패에 부딪칠 때만 바짝 정신을 차린다. 그런 다음 마침내, 어쩔 수 없이 자기 본성과 마주하여, 자기의 재능과 한계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지, 없을 지를 깨닫는다. 길이 닫히는 것에서 어떤 지침을 얻는 데도 사려 깊은 판별이 필요하다. 본성을 거스르는 것들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될 수 있다는 미국 신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자명한 이치인데도 우리는 종종 그것을 거부한다. 대부분 한계가 없다는 신화에 고무되어 생태학적인 진리를 부정하며 많은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되어야 할 의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자기 능력 밖의 일인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본연의 자기와 상관없는 어떤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면, 한동안은 모두에게 근사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 한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자신과, 남을,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켜 이 좋은 일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큰 해악을 끼치고 말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받아야 하지만 자신은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관계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관계도 있다. 그러지 않은 척 가장하는 것,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는 것은 자신과 상대방의 원형을 훼손하는 것이다. 빈민들에게 선행을 베풀면서 그들에게 감사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베푼 것은 얄팍하고 일시적인 것이 됩니다. 베풀 게 있을 때만 베푸세요. 주는 것 자체가 보답이라고 여기는 사람만 베푸세요. 도로시 데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주고 있다면 잘못되고 위험한 선물,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은 선물을 주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돌보기보다는 자신을 내세우려는 필요에서 나온다. 그런 베풂에는 사랑도 믿음도 없으며, 사랑의 통로가 자신 말고는 없다는 오만과 착각에서 나온 것이다. 세상은 양쪽으로 열려 있다. 자기가 가진 사랑의 용량이 한계에 다다르면 세상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맡겨 필요한 사람을 돕게 한다. 본성을 거스르면 탈진하게 된다. 탈진은 너무 많은 것을 주려는 데서 오기도 하지만,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주려고 할 때에도 온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 자신의 본성, 유기적인 실체 속에서 생성된 것이라면 그것을 주어 버린다 해도 다시 생겨날 것이다. 이러한 베풂은 탈진이 아니라 비옥함과 풍요로움이며 자신을 새롭게 할 것이다. 자기 안에서 자라지 않는 어떤 것을 주려는 행위는 자기를 고갈시키며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된다. 강요되고, 기계적이며, 실체가 없는 선물은 해악만 불러온다. 닫힌 문 앞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풍경을 본다 세상은 도덕보다 현실이 근원이다. 되어야 하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근원이다. 능력과 한계를 지닌 우리 본성의 실체에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실의 실체는 신에게 속한 것이니, 거스르지 말고 그대로 존중하며 따를 일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장 큰 재능을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낸다. 우리가 세상에서 첫 호흡을 하던 그 순간부터 갖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그저 호흡한다는 사실만 알 뿐 그런 재능을 갖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재능의 반대 면을 본다. 어떤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영혼의 구멍을 채우려는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구멍을 잘 알아서 거기에 빠지는 것을 피해 갈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나의 약점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와 함께 춤추고 싶지 않을 때는 홀로 춤추는 법을 배운다. 한사코 춤추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님 노릇을 할 수 없다. 나의 한계를 나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가능성을 남겨 둘 뿐이다. 길이 닫히는 것에서 어떤 안내를 얻지 못하고 계속 저항한다면(더 똑똑했더라면, 더 강했더라면, 더 노력했더라면 잘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 자기 본성에 있는 한계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타고난 재능을 무시하는 것이며 참자아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 우리는 닫힌 문을 두드리는 걸 그만두고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뒤쪽에 있는 다른 문에 다다른다. 그러면 넒은 인생이 우리 영혼 앞에 활짝 열려 있다. 우리는 열리지 않음에 대한 걱정 때문에 얼마나 계속 닫힌 문을 두드렸는가. 그 걱정에 가려 숨겨진 비밀을 보지 못하곤 했다. 이제 새로운 인생의 땅을 딛고 서서 여행의 다음 행보를 내딛을 준비가 되었다. 그저 몸을 돌려 우리 앞에 놓인 풍경을 보기만 하면 되니까. 우리는 한계와 능력 사이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본성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타고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믿어야 한다. 길이 닫힐 때면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 길이 열릴 때면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인생의 가능성에 화답해야 한다. 4. 모든 길은 아래로 향한다 우울증을 겪으며 나는 사십대에 들어 두 번이나 몇 달씩 영혼의 수렁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하루하루, 매 시간 죽고 싶은 욕망과 싸웠다. 인생은 괴롭고 고달프다는 생각뿐이었다. 삶을 지탱하려는 모든 노력도 쓸데없는 것으로만 보였다. 우울증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의 힘의 영역으로 이동하게 해준다. 그것은 기다림이며 지켜보는 것이다. 귀 기울이는 것, 고통을 겪어내는 것, 그리고 무엇이든 가능한 대로 자기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는 과정이다. 그런 다음 그 지식을 바탕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매일 매일 자기 자아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버림으로써 다시금 건강한 삶으로 한 걸음씩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혼의 고통에 다가서기 나를 도와 내 문제를 찾아내려는 어떤 친구의 감동적인 시도는 오히려 지나치게 나를 까발려 놓아서 나를 더 깊은 고립감에 빠져들게 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충고를 해줌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해줄 것이 없으며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고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나의 경우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 그는 나의 내면을 거짓 위로나 충고로 침범하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경계선에 가만히 서서 나와 내 여행을, 그리고 모든 상황을 그냥 그대로 놔둘 수 있는 용기를 존중해 주었다. 다른 사람의 고독의 가장자리에서 존경과 믿음을 갖고 서 있음으로써 우리는 신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다. 나는 잠 못 이루던 한 밤중에 그 사랑의 신호를 받았다. ‘너를 사랑한다. 파커.’ 그 말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내면에서 조용히 우러나오는 소리였다. 설명할 수 없는 은총의 소리였다. 아래로 가는 길 이 때 나의 여행은 지옥 구덩이의 내부를 향해가며 그 곳에 있는 괴물과 차례차례 만나는 식이었다. 나는 내가 기반이 없는 땅, 안전하지 않은 높은 곳에다 발을 딛고 살고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산다는 것은 곧 미끄러지면 길고 긴 추락의 시간을 거쳐 바닥에 떨어지며 간혹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으로 내려서는 것이 축복이다.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곧 회복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살게 된 이유 ① 나는 지성인으로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 중 땅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머리속에서 살도록 훈련받아 왔다. ②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신을 체험하기 보다 신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에 더 열중했다. 그것 때문에 좌절감을 느낀다. ③ 높아진 나의 에고, 우쭐해진 나의 에고는 실제보다 나를 더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도록 했다. ④ 왜곡된 도덕률. 진실하고 현실에서 가능하며 내게 참된 생명을 주는 나의 진짜 모습을 살펴보기보다는, 내가 되어야 하는 사람, 내가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의 이미지에 따라 살도록 이끌었다. 이런 이상에 나를 맞추지 못하자 스스로를 나약하고 믿지 못할 사람으로 보게 된 것이다. 나의 이상들이 나의 본성에 맞는가 하고 질문을 해본 결과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들이 내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우울증은 나를 안전한 땅, 한계와 재능, 약점과 강점, 어둠과 빛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나의 진실, 나의 본성의 땅 위로 내려서게 하는 더 큰 소리로 외쳐댔지만 나는 계속 피하기만 했다. 어깨를 두드려도 계속 피했다. 그리곤 우울증이라는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마침내 내가 돌아설 수 있게 되고, 자기 인식을 하게 되자 나는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참자아이다. 이것은 우리를 우쭐거리게 부풀리고 싶어하거나, 자기 왜곡으로 우리를 위축시키고 싶어하는 에고가 아니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허공을 떠돌고 싶어하는 지성도 아니며, 추상적인 규범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 도덕적 자아도 아니다. 그것은 신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할 때 우리 안에 심어 놓은 바로 그 자아이다. 그 자아는 더도 덜도 원하는 것이 없다. 우리가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참자아는 참된 친구이다. 낮은 곳에 임하소서 겸손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이끈다. 그곳은 서 있어도 안전하고 넘어져도 괜찮은 땅이다. 겸손은 그 안에서 더 확고하고 충만한 자아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우울증에서 빠져나오면서 처음으로 내 모습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편안한 느낌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이 약함과 강함, 약점과 재능,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안다. 이제 나는 완전해진다는(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 중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임을 안다. 이제 나는 사람이 자기의 참자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결국은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전체를 받아들이는 인생은 살아가기에 더 힘들 수 있다.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인생 전체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나의 일부가 계속 우울한 상태로 남아 있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투덜대고, 비난하고, 회피하고, 부정하며. 마침내 나는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내게도 미스터리이지만 여하간 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5.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다 의식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우리가 우주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맞다면 리더십은 모든 사람의 소명이다. 이 땅에 살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어떤 환경에서나 진정한 리더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데에 목표를 둔다. 세상의 구원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내적인 어떤 부분을 누르면 우리를 짓누르던 거대한 돌덩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가 생겨나서 변화를 일으킨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은 모두 물질이 의식보다 더 강력하며, 경제가 정신보다 더 중요하며, 현금의 흐름이 비전과 아이디어의 흐름보다 더 많은 현실을 창조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모자이다. 좋든 나쁘든 세상에 우리의 의식을 투사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 데 일조하고 있다. 사회제도의 변화 거부는 우리 마음이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 의식속에서 다른 것보다 승리에 큰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경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교육은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 진정한 인간적 행복에 관심이 없다. 당신의 의식과 나의 의식은 세상을 창조할 수도, 해체할 수도, 개혁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을 끔찍하고 때로는 괴로운 책임의 근원지,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절실한 희망의 근원지로 만드는데 공모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유이며 우리 모두를 만드는 진실이다. 올바른 리더의 영성 스스로 드리운 그림자를 보지 못함으로써 리더들은 자주 위험한 착각에 빠진다. 자신의 노력은 언제나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능력도 충분한데, 문제는 자신이 인도하려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또 대중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외향적인 기질이 있어 종종 자기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그래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보다는 억압하는 리더가 된다.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는 하나로 통합된 장(場)이 있다. 여기에서는 서로에 대한, 또한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학습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1975년 하벨은 체코 공산당 대표에게 공개 항의 서한을 썼고 그로 인해 투옥되었다. 그 편지는 하벨이 자살(분열된 삶) 대신에 선택한 자기 치유 행위였다. 넬슨 만델라는 28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절망에 빠지지 대신 내적으로 리더십을 준비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험난하고 어려운 안으로의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가? 왜냐하면 자기가 처한 내적 상황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그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안으로, 아래로 향하는 영적 여행길의 과정 속에 있다. 리더가 갖기 쉬운 5가지 그늘 ① 자기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이다. 외향적인 리더들은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어떤 외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그러다 그 역할을 빼앗기면 우울증에 빠진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방편으로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빼앗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부모가 자녀를 지배, 조직이 직원을 지배, 교사가 학생에게 강요, 의사가 환자를 물건 취급) 지배관계를 벗어날 때 모두에게 생명을 준다.
② 세상은 전쟁터이며 사람에게 적대적인 곳이라는 믿음이다. 회사 일은 경쟁으로 일관하고 변화 대응은 전쟁을 방불한다. 경쟁이 아닌 합의, 협동하며 공동으로 일을 추진하는 방법도 있다. ③ 모든 일에 대한 최후의 책임이 인간의 몫이라는 믿음이다. 우리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며, 관계를 지나치게 압박해서 때로는 단절에 이르게 한다. 어떤 소리라도 내지 않고 있을 때는 아무런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뭔가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 믿는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화가 난 나머지 탈진, 우울증, 절망으로 끝나기도 한다.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힘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짐을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때로는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을 누릴 수도 있다. 우주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맡기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④ 인생의 혼돈에 대한 두려움이다. 혼란은 의견 차이, 혁신, 도전과 변화를 의미한다. 가정, 학교, 종교, 기업에서 이 그늘은 규칙과 절차를 엄격히 하여, 권한 부여가 아닌 구속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내적 여행에서 우리는 혼돈이 창조성의 전조라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 모든 창조 신화와 같이 인생도 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미 창조된 것도 가끔 혼돈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더욱 생기 있는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⑤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심리 뒤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오래 전에 끝냈어야 할 과제와 프로그램이, 죽음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리더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과학은 가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는 진리에 이르는 데 필요한 길을 더 분명하게 입증해 준다. 훌륭한 리더들에게 죽음은 언제나 새로운 배움의 원천이 된다. 내적 여행을 통해 모든 것에는 죽음이 다가옴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생명이 다한 것을 죽게 함으로써 새로운 삶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 내면 활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가정, 학교, 종교 단체, 사회 각 방면에서 내면 활동이 외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활동에는 일기 쓰기, 책 읽기, 명상과 기도처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내면 활동이라는 말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온통 서로 바로잡아 주기를 실천하는 공동체들이 많다. 이 공동체 내에서는 고쳐야 할 점에 대한 제안이나 조언은 금지되어 있고 다만 개방적인 질문을 통해서 당신 스스로 자신의 내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관계를 맺되 그 안에서 서로 혼자일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되 각자 영혼의 고독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필요를 채워 달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지배적인 역할을 서로에게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다. 내면에서 리더십을 발견한 사람들은 더 많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두려워 말라는 것은 두려움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두려움의 공간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내부에 두려움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뢰와 희망, 믿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공간들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공간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거기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지탱해 줄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시작해서 더 믿을 만하고, 더 희망차고, 더 충실한 존재의 길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다.
출처;꿈꾸는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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