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숭고함의 표현
영국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빛과 어둠을 통해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구분했다. 아름다움은 빛의 정도에 따라 강조될 수 있지만 숭고함은 빛 그 자체로서 강력한 정도에 따라 대상을 보려는 주체와 객체를 모두 없애는 신비한 특징을 지닌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온전히 발견하는 행위는 숭고하다. 숭고함은 개개인에게 유일하기 때문에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 숭고한 길은 누구도 가본 적이 없으므로 불안하고 두려운 여행이지만 숭고하기 때문에 갈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길이기도 하다.
거대한 자연과 우주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로 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사라지고 자연이 자신이 되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주에서 발견한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숭고함이 거기에 있다.
주님은 숭고함을 경험했다. 그는 우리를 숭고한 시각에 동참시킨다. “나를 따르라. 내가 느끼는 것을 느껴라. 언젠가 너도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 것이다.” 주님은 자신처럼 영적인 탐구를 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는 우리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내면의 눈이 모든 것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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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道家)에서는 자연을 내 안으로 불러들여 내가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경험을 통해 삼매경(三昧境)에 들게 된다고 본다. 불가(佛家)에서는 모든 잡념에서 벗어나 하나의 대상에 몰입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어느 관점이든 우리는 자연과 우주와 일체가 되어 자기 내면을 바라볼 때 숭고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나와 자연과 우주마저 잊을 때 도인(道人)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부처가 된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숭고함을 경험한 경지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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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린 예수
예수는 나와 너, 인간과 신, 나와 우주가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신의 아들이고 메시아라고 했다. 우리 사회의 힘없는 약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과부들, 미혼모들, 가난한 자들이 모두 신적인 존재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신의 신비와 전능과 숭고함을 인간의 내면으로 끌여들였다. 이는 로마에서 온 지배자들과 기존 유대교인들의 관점에서는 이단이었다. 예수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 신에게 부르짖는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가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로마 군인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신의 아들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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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든 예수는 위대한 존재였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개인의 신앙심 정도에 따라 그를 신이라 여기며 찬양할 수도 있다. 인간이면서 신일 수도 있다. 신인일체(神人一切)이고 인즉천(人卽天)이다. 나는 인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의 개념을 자연의 질서인 도(道)의 개념과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존재가 신(神)이라면 이를 도(道)라고도 부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