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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8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인터셉트, 간절함, 터치
애가3:22~33; 막5:21~36
(우리가 다 읽지를 못했지만) 오늘 우리의 신약본문은 마가복음 5장 21절부터 43절까지 좀 깁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 속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이야기가 샌드위치 구조로 엮여져 있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간너가셨을 때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간청을 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같이 가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열 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끼어드는 겁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재산을 다 없앴지만 아무 효력 없이 병세는 더 악화되어 가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는, 27절에 보면,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가로채기, 인터셉트를 한거죠. 이 여인은 오로지 내가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터인데! 하는 일념만 있었습니다. 그녀는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고 자신의 몸이 나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 주변을 에워싸고 떠밀고 하는 와중에 여인이 무리 속에 끼어들어 예수님의 옷에 살짝 손을 댄 경우였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계속 갔다면, 아무도 여인이 한 행동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태여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묻고는 기어이 여인을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는 두려워 떨면서 앞에 나와 사실대로 다 실토하게 하고는 (아마도, 여기서 많이 지체가 되었을 겁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말씀하시며, 그녀가 다 나았음을 확인해 줍니다.
이러는 사이에(“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전갈이 옵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말은 이렇지만, 이 말은 “이제 선생님이 와도 아무 소용없이 되어버렸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말씀하신 후에, 가던 길을 계속 가셔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릅니다. 거기엔 사람들이 이미 울며 통곡하며 떠들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다 내보낸 후에, 부모와 제자 셋만 데라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 쿰”(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소녀는 곧 일어나 걸었는데, 그때 그 소녀의 나이는 12살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치유 이야기가 샌드위치 구조로 엮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야기에서 몇 가지 이야기의 초점을 모을 수 있습니다.
우선 두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병을 고치려는 이야기였고, 둘 다 너무 간절했고, 병자가 모두 이름도 없는 여자였고, 두 병 다 부정한 병으로(여성의 출혈, 소녀의 죽음) 사람들이 가까이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되는 병이었고, 당시 여인은 12년을 앓고 있었고, 소녀의 나이는 12살이었습니다.
물론 차이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이 한 사람은 종교지도자요 명망 있는 회당장이었고, 한 사람은 아무 이름도 없는(12년 혈루증을 앓아오던,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겨오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예수님을 만나는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래서 떳떳하게 예수를 찾아뵙고 청을 넣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신분과 맞지 않는 시골 목수요 떠돌이 설교자에게 간청을 합니다),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도 모르게) 접근을 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회당장이 이 이름도 없는(부정한)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일종의 가로채기를 당했을 때 마음이 어땠을까요? 오죽하면 지위고 체면이고 가릴 것 없이 예수의 발 앞에 엎어져 제발 내 딸 살려달라고 통사정을 해서 얻어낸 기회였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간곡히 청했을 때, 뭐라고 했지요?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그저 수사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 지금 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한시가 급한 응급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이름도 없는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행로를 방해하고, 예수님이 구태여 그 여인을 찾아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 집으로 급하게 가던 발길을 잡아 놓게 되는 사건을 만나면서 회당장은 매우 초조해졌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집안사람들이 와서 “따님이 죽었습니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회당장이 가졌을 심정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때 회당장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회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회당장의 표정이 무거워보였던지, 예수님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난데없이 나타난 혈루병 여인은 완전히 방해꾼입니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고, 하필이면 이리 급할 때, 새치기를 당한 것입니다. 아마도 회당장의 입장에서는 여인에게 부글부글 화가 났을 것이고, 예수님에게는 야속했을 것입니다.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칠 것이지...
여러분, 우리도 살다보면 이렇게 가로채기를 당하는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동생이 있는 사람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했을 일입니다. 부모를 독차지하던 사랑을 뭔 생면부지의 꼬마가 와서 가로채 버리는 것이죠. (우리가 의식을 했든 못했든, 이것은 황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서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 내가 하려던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경우는 사실 특별한 경우에 불과하고, 많은 경우 엉뚱한 장애물이 튀어나와 일순간 일이 엉망이 되기 일쑤입니다. 자기의 스케줄대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딤돌을 만나기보다는 걸림돌을 만나는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는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아멘!” 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저 인간은 왜 이 시간에 내 인생에 튀어나와 이렇게도 나를 힘들게 할까? 저 짓을 꼭 이때 했어야 할까?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의 일이랍니다. 영국인들이 여가생활을 하기 위해 캘커타에 골프장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골프를 칠 때마다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나타났습니다. 원숭이들이었습니다. 원숭이들은 영국인들이 쳐올린 골프공이 필드에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달려가 얼른 집어서 엉뚱한 곳에다 떨어뜨려 놓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경기가 지연되고,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요?
화가 난 영국인들은 골프장의 담장을 두 배로 높여보지만 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들에게 그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덩치 큰 인간들이 이 작은 공에 그토록 집착하는 모양새가 재미있었는지 원숭이들도 집요하게 골프공에 손을 댔습니다. 결국 포기한 쪽은 인간이었습니다. 골프는 치고 싶고, 원숭이는 막을 도리가 없고... 마침내 영국인들은 골프 규칙을 바꾸었답니다. “원숭이가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 경기를 계속 진행한다” 원숭이의 방해도 경기의 한 요소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규칙 덕분으로 골프 경기는 한층 더 스릴 넘치게 되었습니다. 공을 잘 못 쳤는데 원숭이가 그 공을 홀 컵에 떨어뜨려 주는 때도 있고, 간신히 홀 컵 가까이 공을 보냈는데, 원숭이가 재빨리 집어다 물속에 빠뜨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복불복이 교차하고 승패가 엇갈립니다.
우리가 많이들 착각을 하며 사는데,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 돌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내 시간표와는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당하게 되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라며 분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회당장의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방해받는 시간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진리를 똑바로 보는 시간입니다. 방해받는 시간은 그럼에도 이 세상 속에서 나의 삶을 주님깨서 붙잡고 계시다는 믿음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방해받는 시간은 내 삶의 바닥을 다지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이것은 “이미 끝났습니다.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간청도 간절함도 소용이 없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36절에 보면, 이때 예수님은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곁에서 듣다”라는 단어는 “흘려듣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귀담아 듣지 않는거죠. 무슨 일이 생기면, 옆에서 하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원인을 분석해주고, 처방을 내려주고, 조언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들을 소리만 들으십시오. 정말 영양가 있는 소리만 들으십시오. 나머지는 흘려보내십시오. 그런데 보면, 영양가 있는 소리는 흘려버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는 정말 잘 듣습니다. 이때가 정말 우리의 믿음이 테스트를 치루고 있는 시간입니다. 정말 들어야 할 소리를 들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오늘 예례미야 애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예례미야 애가는 바벨론 임금 느부갓네살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는 다섯 개의 시를 모은 책입니다. 자신들의 끔직한 재난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 가운데서, 정말 하나님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신 게 아닌가 하는 의문 속에서 탄식하는 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저는 오늘 회당장과 혈루증 여인, 이 두 사람의 “간절함”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비록 신분은 다르고, 삶의 배경이 다르고, 아픔도 다르겠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고, 그로 인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들의 문제 해결은 병이 낫고 죽은 딸이 살아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치유 사건, 그 죽음에서 건짐 받는 경험하면서, 그들의 삶에 새로운 전환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터치가 있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간절함으로 예수님에게 손을 대자, 예수님은 놀랍게도 그녀를 더 깊이 터치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이 변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에서 복받은 여인으로! 주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한 여인으로!
회당장은 엉뚱한 사건으로 자신의 딸이 죽음에까지 이르지만, 예수님께서 그 딸을 잡아 일으켜(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달리다 쿰!) 세우는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죽임에서 살림을 경험했습니다. 회당장은 손을 얹어 고쳐주시기를 바랐지만, 주님은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며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혈루증으로 부정한 여인에게도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부정한 주검조차도 일으켜 세우십니다. 주님이 만지면 변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터치가 예수님의 부드러운 터치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주님의 터치를 경험한 우리가 만지는 모든 사람, 모든 사물들에게서 새로운 삶을 일으켜 세우는 사건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주님이 지금, 내게 터치하시는 터치에 민감해지도록 저를 열어 주소서 ~ 아멘 !!
열 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이야기를 읽으면 항상 우물가의 오후 한 낮에 물 길러 나온 남편이 다섯인 여인이
떠오른다. 그녀들의 한 맺힌 인생을 예수님은
어찌 저리 잘 위로하실까...
군중앞에서 자신의 억울한 얘기를 늘어놓게 하시고 뜬금없이 남편을 데려오라 말씀하신 예수님..
나조차 모르는 나의 가장 아픈 곳을 만지
시는 주님..그 곳에서 주님과 함께 일어나겠습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