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가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의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 고건무(高建武)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고건무는 나중에 영양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7대 영류왕(榮留王)이 되는데, 왕자 시절에 그는 유능한 장수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보면 당시 ‘수륙군의 대원수는 왕의 아우 건무요 육군의 원수는 을지문덕’이라고 나온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의 <<고구려사>>에도 ‘평양성 전투를 지휘한 고구려 장수가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수나라 양제는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자 수륙군을 총동원하여 수륙양병작전을 구사하였다. 즉 철의 요새인 요동성은 그대로 놔둔 채, 별군인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 등의 육군을 충동시켜 육지를 통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진격케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수군을 총지취하는 수사총관인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에게 명하여,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 지금의 대동강)로 들어가 곧바로 평양성을 치게 하였다.
당시 내호아가 거느린 수군의 경우, 바다 위에 뜬 함대의 대열이 수백 리를 뻗쳤을 정도로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바다를 건너 패수로 진입한 내호아의 수군은 평양성에서 불과 60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 수군을 만나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 내호아가 승세를 몰아 곧바로 평양성으로 향하려고 하자,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말렸다.
“요동 방면의 우리 육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수륙양병작전을 구사하려면 육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초반전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른 내호아는 자만심에 의기가 충천하여 주법상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군이 내호아의 수군과 벌인 전투에서 패한 것은 일종의 유인작전이었을 것이다. 당시 수륙군 대원수였던 고건무는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이 곧 평양성으로 진격할 것을 알고 나곽(羅郭), 즉 평양성 외성 안의 절에 복병을 숨겨두었다. 이는 그 전에 벌인 전투가 유인작전이었음을 명백히 해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내호아는 이미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의 외성으로 쳐들어갔다. 수나라 군사들은 약탈을 일삼는 등 대오가 흐트러져 있었다. 이때 고건무가 절에 숨어 있던 고구려의 복병은, 일제히 수나라 대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수나라 장수 내호아는 겨우 몸만 빠져 달아났으며, 그의 뒤를 따르는 사졸들도 불과 수천 명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군사는 쫓기는 수나라 군사를 추격하여 패수에 정박한 수나라 함선이 있는 곳까지 갔다. 그러나 함선을 지키고 있던 수사부총관 주법상이 군사를 정돈하여 대항할 태세를 취하므로 고구려 군사들은 일단 물러났다.
이 글은 엄광용 선생님의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