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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의 멜로디
종달새 한 마리가 푸른 하늘을 빙글빙글 돈다. 길을 걷는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가며 노래를 부른다. 자기 새끼에서 먼쪽으로 꼬마들을 이끌고 간다. 꼬마가 지나고 나면 금방 부화한 자기 새끼 곁으로 다가간다. 아직 맨살인 채로 직사광선을 받고 있는 자기 새끼가 안타까운지 날개를 펴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주변의 검불을 물어다 새끼들을 은폐시킨다. 엉성하지만 바람에 쉬이 쓸리지 않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다. 어미의 온기를 느끼는지 새끼들은 작은 모래둥지에서 꼬무락거린다. 검불 틈새로 기어 들어오는 봄볕의 기운을 귀기우려 듣는다. 두려운 것이 없어 보인다. 천진난만해 보인다. 거침이 없어 보인다.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니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알에서 나와서 일주일이 지났다. 어미는 지나가는 바람을 툭툭 쳐서 경쾌한 멜로디를 만들어 새끼들에게 들려준다. 호기심이 새끼들은 재잭재잭 한다. 발을 살짝살짝 들어 앞을 내딛으라고 시킨다. 여기까지 와야 먹이를 준다고 한다. 몸이 천근만근인지 앞으로 나아가려 몸뚱이를 뭉그적거린다.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못한다. 발에 근육이 없어서 꼿꼿하게 서지도 못한다. 이게 아쉬운지 섰다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이걸 지켜보고 있는 어미는 아쉬운 듯 물어 온 먹이를 다가가서 먹인다. 다른 새끼를 위해서 먹이를 구하러 떠난다.
호기심 많은 학생이 지나가면 그냥 지나치도록 밤하늘의 별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지지~지~지~’ 라는 가사에 자기가 작곡한 음률을 노래를 읊는다. 지금은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먼저이지만 경쾌한 멜로디로 힘들게 공부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의 귓전을 즐겁게 해준다. 학생들에게 집 생각이 나게 하는 멜로디에 한껏 취하게 한다. 터벅터벅 걷던 발걸음이 어느새 사뿐사뿐해졌다. 종달새는 애들의 혼을 쏙 빼 간 것이다. 자기 새끼들도 안전해졌다.
밭을 매면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안 해도 될 행동을 하면서까지 지저귈 리 없다. 무언가 숨겨 놓았을 거라 생각하면서 보리밭에 나 있는 깜부기를 뽑아낸다. 종달새들은 어제도 오늘도 같은 삶의 패턴으로 행동하고 있다. 보릿고개가 다가올 때쯤에는 달궈진 모래땅은 종달새 차지가 된다. 이때만이라도 이곳을 빌려 쓰자는 듯 종달새는 하늘을 선회하면서 지저귄다. 그 모습, 그 멜로디를 지나가면서 듣는다. 어떻게 보면 와 주어서 기쁘다는 소리 같고, 어떻게 들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소리 같다.
“여기에 무언가를 숨겨 놓았지. 들킬까 봐 당황해하는 행동 같은디. 떨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을 거여. 모래땅에서 애절함과 행복함이 묻어나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날 이유가 없잖아.”
무슨 비밀을 숨겨 놓은 듯하다.
“너희들이 지금 위험에 빠져 있어.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찍소리 내지 말고 쥐 죽은 듯 있어야 해.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어.”
꼼짝하지 말라는 소리를 새끼에게 전해 주는 말이다.
“이상한디. 모래밭에 풀 몇 포기 외에는 보이는 거라고는 모래밭에 난 발자국과 그 그림자뿐인디.”
발자국만이 숭글숭글 나 있는 모래마을이다.
“종달새는 이른 봄 허허벌판에서 무얼 먹고 살아 간댜? 모래밭을 기어 다니는 벌레도 안 보이는디.”
중얼거려가며 신발에 걸리는 길가 검불을 걷어 차가면서 혼자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나만의 여유를 만들어가며 걷는다. 배가 고파서 쓸데없이 움직일 힘도 없다.
“모래땅을 좋아하는 것들도 있나 본디.”
“깔끔하고 구질구질한 느낌이 없어서 좋아하겄지.”
“병균은 습하고 지저분한 곳을 좋아하잖아.”
“아버지는 무어라도 벌여 놓아야 먹을 게 생긴다고 하셨는디. 얘들은 아닌가 본디.”
사람들은 봄이 오니 보릿고개가 온다고 난리던데 종달새는 그래도 좋은지 푸른 하늘과 모래밭을 번갈아 보며 이곳이 지상낙원이라며 찬양한다.
“쪼그만 종달새가 무어가 있어 숨겨 놓을라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한참 가서 보면 종달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래밭에서 모래욕을 한다. 몸에 묻은 이를 씻어낸다. 한껏 달구어진 모래찜질도 한다. 그러다 한 무리의 학생이 오면 또다시 하늘을 선회하면서 절규하기 시작한다.
“왜 저럴까?”
되돌아가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다. 그럴 때마다 별 특이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오려 하니 오목하게 파인 곳에 갓 부화한 맨살의 종달새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덤벼들어서 봤자 이길 수도 지저귀면서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돌리려 했다. 고요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종달새는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하루를 무사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느끼기에는 아름다웠는데 사실은 그 반대 상황이었다. 저쪽은 더 좋은 것이 있다며 그쪽으로 선회해 가면서 시선과 발걸음을 돌려놓으려 애를 썼던 것도 새끼의 생존과 같은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생들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서 더 애절한 마음으로 절규한 것이다. 음에 자신들의 간절함을 담아 호소하는 것만큼 날갯짓도 힘껏 한 것이다. 죽고 사는 문제이니 사생결단한 것이다. 이게 삶이다. 사람이 보릿고개를 넘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도, 종달새가 목청이 터지도록 지저귀는 것도 삶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이런 삶이 한데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자기보다 힘이 세어 보이는 포식자가 다가오면, 자기 새끼를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을 가진다. 길을 지나는 어린아이 손에 자기 새끼의 목숨을 내맡겨야 하는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종달새는 지저귐으로 하늘거리며 떠노니던 구름마저도 믿을 수 없는지 밀쳐내더니 푸름만 남아있다.
모래밭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있다. 그곳에 사는 개미들도 삶의 고개를 넘고 넘는다. 풀도 이곳에서 살다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살기 꺼려 한다. 한마디로 이런 곳은 어떤 천적도 달려들지 못한다. 모랫바닥에 난 발자국에 둥지를 튼다. 버려진 땅이 도리어 침입자가 적어서 새끼 키우기에 안성맞춤이다. 여기에 알을 낳는다. 품어서 부화하게 한다. 모래밭 위 하늘을 선회하면서 주변의 동태를 살피기도 좋다. 장애물이 없는 곳이니 새끼에게 주변의 상황을 수시로 전해줄 수도 있다.
종달새는 애써 가꾸어 놓은 곡식을 탐내지 않는다. 많다고 해도 양이 적어서 많이 쪼아 먹지 않는다. 많이 먹어봐야 날아다니기만 불편하다고 한다. 심심하면 높은 톤으로 지저귄다. 힘들어 주저앉아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길을 걷는 나그네의 피로를 씻어준다. 주위에 있는 것들도 같은 덕을 본다. 고마움을 느끼는지 그들의 새끼에게 누구하나 해코지하지 않는다. 모래밭도, 풀잎도, 나뭇잎도, 검불도 나서서 어린 새끼를 감춰주고 그늘을 만들어주기에 바빠한다. 모두가 함께하면 좋은 보금자리가 된다며 서로 돕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덕에 새끼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꼼지락거리기만 하면 된다. 상대방은 해코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꼼지락거리기는 새끼의 보금자리를 부술 이유가 없다. 더구나 목숨까지 끊어 놓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꼬마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이들의 모래 둥지를 보게 되었다. 눈을 뜨지 않은 채 서로의 체온으로 버티고 있는 종달새 새끼를 만나게 된다. 새끼들은 몸으로 말한다.
“어떻게 알고 왔어유? 우리 엄마 아빠가 꼭꼭 숨어 있으라고 했는디. 옷도 아직 챙겨 입지 못했는디 잠시 눈을 돌려 주실래유? 신사라면 그렇게 해주실 수 있지유?”
종달새는 배가 고파 축 쳐져 걷거나, 할 일이 없어서 늘어진 마음으로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푸른 하늘을 빙글빙글 돌면서 지저귀어 준다. 푸른 하늘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음의 고저, 길고 짧음, 음 사이의 쉼의 길이로 하나의 음률을 만들어 가며 지저귄다. 도돌이표에 따라 빙빙 돌면서 반복한다. 마음만이라도 음률의 파도를 타고 넘고 넘기를 반복하다 보면 노곤했던 학교생활도 잠시 잊는다. 종달새 자신도 하늘하늘 나는 것도 힘이 든다며 쉰 목소리로 지저귄다. 허공에 작은 날개로 큰 원을 그려가며 날갯짓도 한다. 지나가는 사람은 이들의 모습에 화답이라도 하려는 듯 빙그레 웃어준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고 싶은지 종달새는 하늘에 나도는 향기를 물어다 귓전에 놓아주고는 간다. 향기는 힘들게 하던 고난을 사르르 녹아내리게 한다. 힘든 일이지만 종달새처럼 리듬을 타가며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평화로울 텐데, 하는 마음에 오늘의 일을 엮어서 내일을 만들어간다.
봄의 노래를 들으며 산등성에 평평한 땅을 골라서 괭이로 파 제친다. 구슬땀을 한참 흘리고 나면 콩 갈 정도가 밭으로 바뀐다. 황토 흙이다. 밭에서 한참을 일하고 나면 옷도 얼굴도 발개진다. 철부더기 주저앉아서 풀을 뽑아준다. 첫해는 거름기가 적어서인지 수확한 것이 별로이다. 땅임자에게 콩을 조금 주고는 밀을 간다. 종달새가 지저귈 때쯤에는 가시덩굴, 무릇, 원추리를 뽑아서 나물해 먹는다. 고랑 흙을 긁어서 겨우내 흙과 뿌리가 들떠있는 밀 위에 뿌려준다. 밭 일굴 때 뿌리를 깊게 내린 잔디와 억새를 곡괭이로 뽑아내느라 고생했던 지난해의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때는 어깻죽지가 빠지고 삭신이 들쑤셔댔지.”
그렇게 만든 밭고랑에 앉아서 밭을 매고 있다. 봄의 문턱에 들어설 즈음이니 좀 싸늘하기는 했어도 춥지는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철푸더기 주저앉아서 내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풀과 씨름해봐. 라디오도 없는데 이렇게라도 해야 덜 심심하지 않을 거 아녀.”
종달새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듯 들린다.
“그때는 네 노래만 들어서 시골 사람 마음은 순백색이었는디. 그때가 가끔 그리워질 때가 있지.”
“내 노래 많이들은 사람은 촌뜨기라는 소리를 많이들 들었지. 그만큼 순수하다는 소리이라구. 소리꾼은 내 흉내를 못 내서 얼버무려가며 떠들어댔지.”
종달새는 창공을 외롭게 곡예 비행한다.
“나 따라 해 봐. 그러면 돈 벌 테니까.”
굶주린 사람을 보고는 약 올리듯 주위를 선회한다. 행복은 여럿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서 만들어간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의 새끼가 편안하도록 보살피며 사는 과정에서 행복이 묻어나오는 거여. 행복은 소박한 마음에 피는 꽃이거든.”
“행복은 어떤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야.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거지.”
“그려. 나는 행복이 엄청나게 큰 것인 줄 알고 작은 일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거든. 알고 보니 품안에 들어 와 있는 행복마저 내팽개칠 뻔 했구먼. 나는 이렇게 바보스러운 면이 있다니까.”
“행복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있어. 행복은 돼지 목에게 걸린 진주 목걸이가 될 수도 있지.”
“무덤덤하게 생각 했던 것에도 행복이 깃들어 있겄는디.”
“그렇지. 나 같은 새가슴에도 행복이 있는데 뭘.”
종달새와 대화를 나누면서 행복을 조금씩 깨우쳐 갔다.
종달새는 하늘을 선회하면서 사소한 일에도 일희일비하는 새가슴을 녹여준다. 새장에 갇혀있는 새는 주는 먹이만 받아먹지만 종달새는 자기가 먹고 싶은 이 있으면 자기 힘으로 찾아야 먹을 수 있다. 이런 생활이 좀 부족하지만 행복하다.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울컥해진다. 자기를 지켜봐 주는 사람에게는 땅에서 푸른 하늘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선으로 상형문자를 만든다. 이걸로 통하지 않으면 쐐기문자로 자기 삶의 이야기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새끼에게서 떠나와 하늘을 날면서 거꾸로 세운 원추형을 그려 놓고는 그 안에 수없이 많은 문자로 자기 이야기를 저장해 둔다. 자기 새끼의 안전이 확실하지 않으면 오르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규칙에도 없는 선을 무한히 그려가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지금 만들어 놓은 원추형 모양이 겹치고 또 겹쳐서 감정의 선을 점점 더 굵게, 진하게 새긴다. 선으로 만든 원추형이 넘어지지 않도록 선회를 다시해서 새로운 원추형을 만들어 받쳐놓는다. 이런 행위를 멈추는 순간 행복도 멈춰 선다. 선이 갈 곳을 잃는다. 그 자리에는 악이 터전을 잡는다. 이때부터 불행의 촉이 튼다.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답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행복하게 사는 거다. 행복으로 가는 과정을 두고는 말이 많다. 선이 행복하게 한다. 아니 악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틀린 이야기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단번에 여러 계단을 뛰어넘으려는 나의 욕심 때문이다. 어느 것에도 능력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능력의 한계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악이 가는 길을 막아서기 때문이다. 종달새처럼 상대방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재주를 활용해서 새끼를 지켜낼 수 있다. 사람은 멜로디를 좋아한다. 새로운 멜로디,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푸른 하늘이라는 배경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서, 오물오물 꼼지락거리는 것을 귀여워하는 사람의 감성에 호소해서 자기 새끼를 보호한다. 이런 일을 해냈을 때 종달새는 행복해 한다.
일이 크든 작든 행하고 나면 결과가 생긴다. 결과를 보고 보잘것없는 것을 보고도 이게 어디여, 하며 행복해 한다. 많은 것을 얻었으면서도 한 됫박 얻었으면 아귀가 딱 맞을 건데, 이에 미치지 못한 것이 좀 아쉽네, 하며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뱁새가 긴 다리를 가진 황새를 따라 가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면 불행해진다. 황새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뱁새는 열 걸음 스무 걸음 떼어야 황새를 딸라갈 수 있다. 뱁새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순간 뱁새는 행복을 느낀다. 자기에게 맞는 기준 설정과 자기 주제를 알고, 그에 맞추어 일하고 수확하는 순간 행복해진다. 까치가 자기 집을 지을 때 나뭇가지를 하나씩 물어 날라 서로 엮어 집을 지어갈 때 언젠가는 준공을 한다. 사람이 보면 하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까치는 행복해 한다. 한 푼 두 푼 모일 때마다 만족스러워한다. 목표에 다가가면 작은 행복으로 만족해하던 더 큰 것을 얻어야 행복을 느낀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은 작은 행복을 쌓아가면서 행복을 느낀다. 사람이 보기에는 종달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는 말한다.
“저렇게 해 가지구 언제 행복한댜. 미물이 행복이 무언지나 아는지 모르겄어.”
좀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종달새는 창공을 비행하면서 작은 행복을 만들어간다.
종달새는 목청의 바이브레이션을 최대한 살려 공기를 떨게 한다. 공기의 울림은 풀잎에, 보리밭에, 울퉁불퉁한 모래밭에 부딪치면서 잔잔한 메아리를 일으킨다. 그게 노래로 들리고 선율로 느낀다. 이런 성질을 이용해서 종달새는 털레털레 걷고 있는 나그네 발길을 위로한다. 사실 자기 새끼가 있는 곳을 기웃대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는 애원이다. 구슬픈 노랫가락이 펼쳐지는 것 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자기 행복을 지키기 위한 애틋한 몸짓이다.
행복을 망가트리는 순간, 나도 너도 슬퍼질 거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한다. 욕심의 꼬임에 빠지게 되면 행복은 헤어날 수 없다. 종달새도 자기 행복이 깨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들어 쪼아댈 것이다. 온갖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구슬피 울어댈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슬퍼진다. 이것은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선이 악으로 바뀌어서다. 이렇게 생긴 악은 나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
남을 괴롭게 하면 가지고 있던 선이 악으로 바뀐다. 종달새는 작은 체구지만, 선의 마음이 악으로 바뀔까봐 온갖 날갯짓을 다한다. 조그마한 행복의 씨를 쪼아대기 위해서 대지를 흐르고 있는 공기에 대고 독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 잘났다고 뻐기기만 하면 종달새처럼 유연하게 날갯짓을 하지 못한다. 종달새처럼 노래도 부르지도 못한다. 고요를 만들 줄도 모른다. 유연한 날갯짓은 나를 비웠을 때 가능하다. 빈자리 없이 다 채워 놓으면 날갯죽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바닥에 주저앉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날고 있는 동료 종달새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이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나를 비우자. 그러면 오래 더 멀리 날아갈 것이다.”
종달새의 가르침을 받고 밀밭 고랑의 흙을 퍼서 밀 위에 뿌려준다. 그럴 때마다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인간들은 왜 이렇게도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얼마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켰으면 도덕이니, 관습이니, 법이니 하며 총총히 쳐 놓은 그물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여. 자기 양심대로, 종달새처럼 자연이 준대로 살면 안 되는 가 본디. 자기새끼 돌보고 배고프면 먹이를 구해다 먹이고 자기도 그렇게 먹고 하늘을 유유히 날면서 말이야.”
“인간이라는 말에는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어. 거기에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탐욕과 지배욕도 있지.”
“인간은 지 편한대로 지껄이구 행동하지. 남의 나라 빼앗아 살면서두 침략이니 인권이니 나불대구 있지. 지들은 가지고 있으면 평화에 쓰구, 작은 나라가 가지구 있으면 불장난을 한다구 지껄여대지. 지들이 약소국의 땅에 국가를 세원놓구 사는 것들이. 틈만 나봐라 니들두 집어삼킨다구 으름장을 놓구 있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니깨.”
“그렇지. 지는 중무장하고 있으면서 남더러 무장해제하라구 하는디 어떤 멍청이가 그렇게 한댜. 지께부터 내려 놓구 상대방에게 요구하든 말든 하지.”
“그려. 남이 자기들보다 위로 치고 놀라가는 꼴을 못본다니깨.”
“세상에는 개망난이들이 많다닌깨.”
“그거야 우리 종달새도 우두머리가 있어.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어야 안전햐.”
“그건 신사적이지. 그러면 되는 거구. 사는 게 간단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얽어 놓아가며 사는지.”
“인간은 우리보다 수명이 길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그 법에 기대어 많은 사람을 옥죄고 있는 거겠지. 지들 거 빼앗기면 안 되거든.”
“모든 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디 지 만족을 위해서 남의 행복을 짓밟는다니깨.”
“한눈팔며 살다보면 작은 것에 행복이 들어있는 걸 보지 못하지. 한마디로 못난이 짓만 하다 죽는 거여. 죽으면 없어지는 권력을 쥐고는 불나방이가 되어 불행 속으로 뛰어 꼬락서니들을 보니 한심한 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구.”
종달새와 이야기를 삶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는 가시넝쿨을 뽑는다. 한 발짝 물러서서 보니 구질구질한 것이 다 보인다.
종달새는 모래밭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가보니 비바람에 새끼들이 누워있던 둥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향이 없어졌다. 이걸 아는지 종달새는 이곳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추억이 없는 듯하다. 짧은 삶을 두고 추억이니 낭만이니 따질 여가가 없다. 그때그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의 공간도 종달새가 있을 때는 멜로디의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고요의 공간이 뒤바뀌었다. 적막함이 드리워졌다. 처량하게 느껴지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자연에 적응해 가며 살다보니 자기가 태어난 곳도 잊었는지, 고향이 황폐해 공허해져 가는 데 그대로 놓아두고 있다. 개구리처럼 올챙이 시절에 살았던 곳을 찾지 않는다. 햇볕이 반짝 들면 창공을 힘차게 가로질러 날아다니면서 겁도 없이 먹이활동을 하는 것이 보인다.
종달새가 지저귀는 공간은 클린 공간이다. 이들 나라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탁 트인다. 종달새는 적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전망이 트인 공간에 둥지를 튿다. 숨어서 자기들을 노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늘을 선회하면서 정찰한다. 지지배배는 것은 새로운 정보를 새끼들과 공유하기 위한 그들만의 언어이다. 교신을 해주어야 새끼들이 안심한다. 정보 내용에 따라 주의할 점도 알려주고 시키는 대로 행동하라는 지침을 수시로 내린다. 위험한 순간이 오고 있으니 꼬물대지 말고 조심하라는 신호도 보낸다. 이것을 멜로디로 암호화서 보내냐 적이 의심하지 않고 새끼들도 당황하지 않는다. 문제의 지역 상공에서 보면 모든 것은 평면으로 보인다. 어미는 적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새끼에게 행동 지침을 그때그때 내려보낸다. 이런 때는 새끼도 자기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미 부르는 소리를 멈춘다. 어미가 안전하다는 신호가 올 때까지는 쥐 죽은 듯 숨을 죽인다. 어미는 적의 일거수일투족이 자기의 손바닥에 있는 듯 숨어서 관찰한다. 어미 새는 창공을 날아다니면서 적이 자기 둥지에서 먼쪽으로 가도록 유도한다.
사람들도 이런 종달새의 행동을 본뜬 것인가. 조금 힘이 있는 나라라면 하늘에 정찰기를 띄워놓고 적군의 주요 시설이 시시각각으로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파악해서 아군에게 보낸다. 상대방의 국가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도 관찰한다. 정보를 과거의 것과 비교 분석하여 특이 상황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한다.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이런 일을 담당할 전문가가 필요하다. 정찰기를 띄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들 정보를 사실에 맞게 분석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데이터양이 많아져서 아날로그적 방법으로 수집해서 분석하는 일은 느리다. 정확도도 떨어진다. 지금은 디지털화한 정보를 즉시 분석해서 그 결과를 보내서 상황에 대처 시간을 벌어준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사천리로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 어미 종달새가 정찰기이면서 특이정보를 찾아내서 새끼에게 행동 지침을 내린다. 수뇌부는 전쟁상황을 손바닥 보듯 생활 터전의 상황을 파악해서 새끼들에게 전달한다. 종달새가 자기 둥지에서 먼쪽을 선회하면서 적의 동태를 직접 보고 안전 여부를 수시로 파악해서 전쟁하는 시대가 되었다.
종달새는 뱀과 같은 사악한 간신이 날름거리지 않는 청정지역이니 안심해도 된다며 삶의 길을 안내해 준다. 종달새는 적이 자기 둥지를 피해 가주는 것을 보고야 안심한다. 이때의 멜로디는 경쾌하다. 모래밭에 알을 낳고 부화한 것도 숲보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섰기에 그리 한 것이다. 새끼가 부화해서 날 수 있을 만하면 모래밭을 떠나 나무숲으로 들어간다. 아무래도 조금 높은 곳에, 나뭇잎으로나마 자기의 모습을 가릴 수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안심된다. 낮에는 독수리, 밤에는 부엉이로부터 가족을 보호할 수도 있다. 이게 종달새의 삶의 지혜다.
입신 양면을 위해서라면 무얼 못하겠냐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남의 속상한 마음을 자극해서 잠자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덧나게 한다. 하수인이 되어 출세하려는 마음이 앞서서인지 그게 옳든 그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앞뒤 맞추어 보지 않고 책임 없는 말을 만들어내서 마구 뱉어낸다. 돈을 준다고 난리다. 남의 호주머니 것까지 훑어다 자기 호주머니에 채우려는 기회를 만들겠다는 하나의 꼼수다. 놓는다. 제 식구 밥값 나가는 것도 아까워서 기관의 카드를 마구 긁어 자기 것인 양 써대는 도적의 배만 불릴 뿐이다. 말이야 국가 돈이라고 하지만, 내 호주머니 돈을 갈취해 간 것이나 다름없다.
종달새같이 어미 일을 다 하는 사랑의 마음은 세렝게티의 코끼리 무리의 우두머리가 앞장서서 무리를 지키는 모습처럼 인상적이었다. 이에 비해서 인간은 서로 못잡아먹어 으르렁대고 있다. 추접스러운지 소식이 들릴 때마다 푸른 하늘을 수놓던 종달새의 맑은 리듬을 듣는다.
“찌찍 찌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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