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네로나 도미티안같은 악질 황제들에
의해서 같가지 방법으로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가브리엘과 라파엘 그리고 천사장 미가엘이 모여서 이런 토
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가브리엘이 하나님께선 어떤 방법으로
순교를 당한 사람을 가장 충성스레 여겨 주실까 하자 라파엘이
그야 놋솥안에 산채로 갇혀 태워죽임을 당한 안디바라고 하였습니
다. 요한계시록에 그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는 버가모 교회의 순교
자 이었습니다. 그러자 미가엘이 나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힘을
당한 베드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로 나아갔습니다. 가브리엘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예수님
은 어떤 사람이 더 주님앞에 충성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지를 아뢰
었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선
자신에게 가장 충성된 사람은 바울이었노라고 말씀을 하시었죠.
천사들이 약간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서 고작? 참수형을 당하였을 뿐인데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바울은 다른 사도들에 비하여 편한 죽음으로 내게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보거라. 그의 삶은 매순간 순간
나와 복음을 위하여 죽음에 직면하여 있었으며 무었보다도 나의
고통과 나의 고독을 나누어 가진 자니라. 그의 삶은 다른 사도
들에 비해서 더 나의 위로가 되었단다"
저는 찰슨 블론슨과 알랭 들롱을 좋아합니다. 중 2때인것 같은데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친구여 안녕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대충
의 줄거리는 외인부대를 전역한 두 사람이 금고 털이를 하다 함정
에 빠지게 되는데 경찰에 잡혀서도 서로의 우정을 변치않는 다는
이야기 입니다. 영화를 가득메운 두 사나이의 카리스마--- 그
배경엔 두 사람이 뿜어내는 고독의 힘이 넘쳐 있었습니다.
실제로 두 배우의 삶이 빈민가에서 고아원에서 자라났고 블론슨은
아내를 사별하였으며 알랭은 해군과 공수부대에서 무려 7년 가까이
있었고 또 이혼을 4차례나 하여 얼굴만 보아도 짙게 베어오는 고독
의 냄새를 맡을 수가 있습니다. 첫 데뷰작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였던 제임스 딘의 삶 역시 고독 그 자체이었지요. 실존주의 철
학 하면 사람들은 키에르 케고르를 떠올립니다.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과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기독교 서적가운데 고전으로
꼽히지요. 그 역시 참으로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그 가치가 위의 영화배우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고독은 하나님을 위해 바쳐진 고독이었기 때문이었
습니다. 그는 매우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청년 시절일때
레기나라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그를 좋아하고 그도 그녀가 마음
에 들어 결혼을 하기로 하였으나 키에르 케고르가 그녀의 신앙이
미숙함을 보고 마침내 헤어졌다고 합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다소 방탕한 생활마저도 일삼
았죠. 그러나 그 댓가로 그는 실존주의 철학과 유명한 한계상황
이데아론을 기독교 진리와 융합시키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
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었던 것입
니다. 예레미야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선 살구나무가지의 환
상을 보여 주시며 선지자에게 두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는 살구나무라는 히브리원어는 순종한다는 단어와 음이 비슷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1장 12절 말씀에 살구나무는 이른 봄에
꽃이 피기에 겨울에도 살아있는 것같이 쉬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쉬지않고 반듯이 이루실
것을 피력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셨고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셨던 것이죠.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
명을 감수하기 위한 그의 십자가는 역시 고독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만큼 고독한 선지자는 아마도 드물 것입니다. 신약시대
의 세례 요한도 아마 예레미야보단 덜 고독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 보인
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독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이
죠. 그런데 왜 하나님께선 안쓰러운것 차마 보지 못하시는 성품
이시기니와 특별한 자기의 군사요 또한 자신이 좀 사랑한다 하는
사람들을 고독속에 빠뜨리시는가? 그 해답은 친히 우리의 모든
고통을 체휼하신 주님께서 극심한 고독을 체험하시었고 또한
지금도 여전히 느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시던 주님과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을 생각하여 보십시요.
아니 그보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무려 33년 간이나 당신이
지으신 세상에 오셔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항상 함께
하셨지만) 이 지상에서 당신의 피조물 행세를 하셔야 하였던
주님이셨습니다. 또한 여전히 디모데 전서 2장 4절 말씀에서
당신이 택하시지 않은 육에 속한 자라 할지라도 차마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음을 지옥에 갈줄 알고는 계시지만 그러나
못내 그들을 아쉬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보아 지금도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시지만 동시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리고 떨어지
고 있는 영혼들을 보시며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진정한 고독속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고독을 나누어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볼것도 없이 그는 주님의 전사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 마지막 시대에 최후의 전사인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이야 말로 순교인 것입니다. 결혼을 하였던 하지 않
았던 상관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앞에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드린다면 그분은 주저없이 당신의 대양과도 같은
무수한 고통의 바다가운데 특별히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고독을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옛날 궁궐의
무수리가 성은을 입는것 과도 같은 엄청난 영광입니다. 주님의
고독을 나누어 같는자 얼마나 멋있습니까? 자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고독을 나누어 가질 수가 있을까요? 성격이 모나서 친구
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귀한 고통입니다만 그런
고통보다는 주님의 사랑안에서 즉 주님안에서 당하는 고독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 열납하시는 제물인 것입니다.
다윗은 말년에 아비삭이라는 절세 미인을 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살아보니 하나님 뿐이
더라는 것이죠. 시편을 보십시요. 그는 경겁중에 모든 사람을
거짓말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극단적으로 모든 세상위로
가 헛되다는 말씀이죠. 전도서에도 세상일은 그저 헛되다고 하였
습니다. 이 말씀을 현대적으로 풀자면 핑클이나 쥬얼리등과 결혼
해도 장동건이나 한재석같은 사람들 사귀어 봤자 얼마안가 말짱
꽝이라는 것이죠. 지금도 하나님께선 당신의 고독을 나누어 가지
기를 원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의 제사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단지
기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 그분의 제자가 되길 원
한다면 주안에서 그분의 고독을 나누어 가지십시요. 그러나 먼저
주안에 거하셔야 합니다(계시록 3:20) 명십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명화를 보셨죠? 거기 바깥에서 문을 열수
가 있던가요? 세상은 갈수록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학부는 끝까지 주님앞에 순결을 잃지 않고 주님으로만
만족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지길 소원합니다
카페 게시글
♦생명의 양식♦
최후의 전사
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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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6.07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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