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숙 현감공 묘갈명(族叔縣監公墓碣銘)
공의 휘는 만형(晩亨)이고 자는 사순(士順)이며 우봉(牛峰) 사람이니 형조 정랑 휘 분(翂)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스승이 애써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정랑공이 여러 번 고을의 수령으로 나갈 적마다 공은 따라갔는데, 두문불출하며 독서하느라 관리들이 공의 얼굴을 거의 알지 못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으나 정랑공 곁에서는 감히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랑공이 관소에서 세상을 떠나자 밤낮으로 울부짖어 그 슬픔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에 온 고을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예법대로 장례를 치렀다.
3년상을 치르는 동안 내내 죽만 먹고, 슬픔에 몸이 극도로 상하여 생명을 거의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성묘하는 예법을 폐하지 않았다. 묘 앞에 나무를 심고는 새끼줄을 매어서 여막까지 연결시켜, 새끼줄을 부여잡고 오르내렸다. 상복을 벗은 다음 대과와 소과에 연달아 합격하였지만 회시(會試)에 모두 합격하지 못하여 사우(士友)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이조에서 천거로 공을 경릉 참봉(敬陵參奉)에 제수하였고 규례대로 승진하였다. 평시서(平市署)에 있을 적에 두곡(斗斛)을 공정하게 하여 간교하고 속이는 행태가 사라지니 도성의 백성이 편안해졌다. 우리 외조부 여양(驪陽) 민 문정공(閔文貞公 민유중)이 당시 평시서의 제거(提擧)로 있었는데 여러 번 사람들에게 공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제대로 된 낭료(郞僚)를 얻었으니, 나는 이제 걱정할 게 없다.”
하였다.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가 평시서 영에 올랐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가 일변하여 군흉들이 정권을 잡자, 공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화전(花田)으로 돌아가 농사일에 힘써 봉록을 대신하였다. 또 후학들을 이끌어 도와주는 것을 좋아한지라 친구의 자제들이 공에게 수학하기를 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종가의 자손 가운데 먼 고을을 떠돌며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다. 집안에서는 법도가 있어 아랫사람을 매우 엄히 다스렸으니, 한여름에도 자제들은 감히 버선을 벗을 수 없었다. 한 집에서 형님을 공경히 받들어 즐겁고 화목하게 지내니 사람들이 이간하지 못하였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는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어버이의 기일이면 항상 재복(齋服)을 입고 단정히 앉아 바깥일은 접하지 않고, 노복들에게도 입을 다문 채 일을 보라고 하였으니 안팎이 정숙하여 감히 떠드는 자가 없었다.
경신년(庚申年,1680, 숙종 6) 조정이 맑고 밝아졌다. 여양 민공이 그때 판의금부사로 있었는데 자벽(自辟)하여 공을 도사로 삼았다. 얼마 뒤에 은진 현감(恩津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술년(壬戌年,1682) 양구 현감(楊口縣監)이 되어 마음을 다해 공무를 수행하니 아전들은 외복(畏服)하고 백성은 편안해졌다.
을축년(乙丑年,1685) 10월 9일 관아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9세였다. 뒤에 고양(高陽) 고봉(高峰)의 임좌(壬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초취(初娶)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월정(月汀) 근수(根壽)의 증손이고, 부친은 동돈녕 정지(挺之)이다. 두 딸은 사인 유한오(柳漢五), 안시성(安時聖)에게 시집갔다.
계실(繼室)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여해(汝諧)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다. 장남은 경(絅)이고 차남 집(䌖)은 진사에 합격하여 정랑을 지냈다. 승문원 정자 강준부(姜浚溥)와 사인 홍우저(洪禹著)는 사위이다. 장방(長房) 경의 아들은 제언(濟彥)이고 차방(次房) 집의 계자는 제령(濟寧)이다. 사위 강준부의 아들은 주화(柱華), 주태(柱泰)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우리 족조께서는 / 嘻我族祖
덕은 크지만 지위는 미미하였네 / 德鉅位細
누리지 못한 보답이 / 不食之報
공의 세대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네 / 謂在公世
공의 온갖 선한 행실을 따져보면 / 原公百善
효제에 근본하였네 / 本於孝悌
녹봉을 위해 마지못해 벼슬했지만 / 雖從祿仕
명분과 행실을 모두 닦았네 / 名行俱礪
시운이 변천하는 가운데 / 時運平陂
조정의 상황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났네 / 行止潦霽
자신의 집에 살며 / 吾守吾廬
불우한 생활 달게 여겼네 / 自甘侘傺
소자들이 성취한 바 있었으니 / 小子有造
향숙의 옛 제도였네 / 鄕塾遺制
일어나 고을 수령이 되니 / 起佩縣紱
골짜기 백성이 공의 은혜 사모하였네 / 峽氓懷惠
은혜로운 정사 끝내지 못했으니 / 惠政未究
온 고을 사람들 눈물 흘리며 영결하네 / 百里送涕
집안을 번창하게 만드는 / 昌大門戶
그 계획 어그러졌네 / 謬悠其計
유풍은 차츰 멀어져도 / 流風寖邈
아름다운 덕에 묵묵히 계합하네 / 懿德潛契
명을 지어 / 載作銘詩
후손들에게 보이노라 / 用眎來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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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족숙 현감공 묘갈 :
저자가 이만형(李晩亨, 1627~1685)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소자들이 …… 있었으니 :
인재들이 공부하여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시경》〈사재(思齊)〉에 “이러므로 성인들은 덕이 있으며 소자들은 일함이 있으니, 옛
사람이 싫어함이 없는지라 선비들을 칭찬하여 준걸스럽게 하셨도다.[肆成人有德, 小子有造, 古之人無斁, 譽髦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