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5일 (마4 갈릴리의 성탄).hwp
2017년 12월 25일 평화목교회 성탄예배 설교
성탄절 * 홍지훈 목사
이사야 9:1-7
마태복음 4:12-17
갈릴리의 성탄
오늘 본문 이사야 9장1-7절과 마태복음 4장 12-17절은 평행구절입니다. 마태가 성경을 기록하면서 이사야 9장 말씀을 인용한 것 이지요. 여기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 가버나움에 가서 예수가 살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 이라고 하였습니다.
15-16절로 내려가 보면 “스불론과 납달리 땅 이방사람들의 갈릴리”라고 하면서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구약을 인용한 것이 나옵니다. 인용된 본문인 이사야 9장을 찾아보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9장 1절에서 “옛적에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 당하게 내버려 두었지만, 이제는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억압자의 멍에,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게 하였다”는 구체적인 설명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러고 나서 6절에 우리가 잘 아는 성탄의 말씀이 나옵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통치자)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을 해석하면,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을 항아리와 횃불로 꺾었듯이, 스불론과 납달리 땅의 압제자를 멸하실 날이 오는데, 이것은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그 아기는 평화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제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어디인가, 그리고 거기에 갈릴리라는 지명도 덩달아 나오는데, “이방인들의 갈릴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들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도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지파를 중심으로 땅이 배분되었을 때에,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차지하고, 중앙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반지파가 차지하고, 북쪽과 요단 동편은 나머지 지파들이 차지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의 중심은 중앙 에브라임 지파의 땅 “세겜”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왕국이 형성되고 다윗 왕이 등극하면서 이스라엘의 중심이 남쪽으로, 유다 지파의 땅으로 옮아갑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왕궁과 성전이 건축되어 명실상부한 수도가 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이후 왕국이 분열되면서, 이스라엘의 국력은 약해지고 외적의 침입에 시달립니다. 주변 강대국의 침략에 특별히 시달린 지역이 북쪽과 동쪽인데, 정복자들은 이 지역에 자기들의 족속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방인과 혼합이 된 지역이 사마리아지역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갈릴리 호수 바로 왼편에 있는 지역이고,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지역이었으며, 신약시대에 “갈릴리”라고 이름을 바꾸어 불리는 땅입니다. 바로 그 땅에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비추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퀴즈 시간에 “예수님의 고향이 어딥니까?”라는 질문이 자주 등장하는데, 정답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는 별칭이 나사렛 예수이지 베들레헴 예수가 아닙니다. 달리신 십자가 명패에도 “INRI” 라고 표기 되어있는데 이는 라틴어로 “예수, 나사렛의, 왕, 유대인의”라는 말의 첫 글자입니다. 이 나사렛 이라는 동네가 있는 곳이 구약으로 말하면 스불론 지역쯤 됩니다. 그러니까 모친 마리아와 부친 요셉은 나사렛 사람입니다. 단지 명목상의 부친 요셉이 유다지파 사람이라 그의 출신지 베들레헴에 약혼녀와 함께 호적등록 하러 갔다가(인구조사에 답하려) 거기서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이 설명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입니다. 마태는 본래 출신지는 감추고 나중에 헤롯을 피해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예수 탄생의 복음은 북쪽 불행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의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어둠에 있는 백성들에게 빛이요, 그늘진 죽음의 땅에 있는 자에게 빛” 되는 것입니다. 성탄의 근본적인 의미가 이런 것이었는데, 20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불행한 사람들 대한 복음이 만민에 대한 복음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저는 성탄의 의미를 개인적인 의미에서 집단적인 의미로 전환시켜야 본래적인 뜻과 일치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나”에게만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탄생하여 우리에게 그리스도라고 고백되어지는 것은 “공동의 기쁨”이 되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즐거운 성탄인사는 혼자 즐거운 것이 아니라, 같이 즐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merry라는 기쁨은 축제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축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으로 보면 220년 전, 개신교로 보면 130년 전에서야 이 땅에 예수가 소개되었으니, 그때에 이 땅에 예수가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 전에 갈릴리 나사렛에 오신 예수는 우리에게는 1800년 이상이나 늦게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가 처음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한국의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였다는 것만 기뻐하지, 맨 처음에 “우리”에게, “우리 민족”에게 예수 탄생과 복음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스불론, 납달리 그리고 나사렛에 오신 예수가 18세기 또는 19세기 우리 땅에 오셨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한국 개신교 130년의 역사는 한국 근대사와 그 행보를 같이합니다. 개신교사를 떼놓고는 한국역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인가하면 1800년대 말, 즉 이씨조선 말기에서 바로 오늘 이 순간까지입니다. 처음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우리의 삶은 스불론 사람들과 똑같았습니다. 압제자가 있었고 백성들은 해방되기를 원했습니다. 교회가 설립되어서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병원을 세워서 의료혜택을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양반과 상민의 차별 속에 살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서로를 형제로 여겼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교회에 모여서 논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본래 빛이었고 변혁운동인데, 이것을 교리로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그만큼 백성들의 삶이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압제와 동족간의 전쟁, 그리고 경제발전을 향한 고단한 전진 속에서 힘든 삶을 살고 있었기에 위로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점점 본래의 정신은 내어버리고 교리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교파분열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앞에 두고는 반목질시하다가 교리적 해석 차이를 두고는 그대로 갈라져 버린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입니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거부하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기독교 복음과 서양문화를 혼동하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한국교회는 역사의식이 없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보수적이고 복음적”이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복음은 존재하였고, 교리를 수호하는 것이 “보수”가 아니라, 전통과 전승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보수”입니다.
역사는 시간을 따라 흘러갑니다. 성서에서는 시간을 둘로 구분하는데. 하나를 크로노스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를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라는 절대시간이 크로노스라면, 카이로스는 “무르익은 때‘를 말하는 시간입니다. 성탄의 시간은 12월 25일이라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오실만한 무르익은 때를 말하는 카이로스입니다. 그 때는 2000년 전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도 다가오는 때입니다.
한국 교회와 사회는 지금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7년 성탄은 교회에만 기쁜 성탄이 아니라, 온 사회와 전 세계에 기쁨을 주어야만 하는 성탄입니다. 지구 한구석 우리나라로 보면, 남북분단과 반목과 불안한 세월이라는 고난이 우리를 감싸고 있고, 경제적, 정치적 위기 때문에 국론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오던 19세기 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숨조차 쉬기 어렵던 그 시대의 역사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3만 불이 넘었는데도 상대적인 빈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우리의 시대에 어떤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오히려 사회의 짐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올해 예수의 탄생은 이런 세상에 어떻게 빛이요 소망이요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세계적으로도 우리는 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독주에 대항하던 유럽연합은 유럽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정치 경제적 이익에 따라 분열과 대립이 심각합니다. 전 세계 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유럽 각 지역으로 흘러들어오지만, 여전히 난민들이 편하게 살 곳은 부족합니다.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한 지역에서 동시에 테러도 더 많이 발생합니다. 유럽의 대 도시들은 테러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아무런 잘못 없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너무도 많이 벌어집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예루살렘에 대한 미국의 수도선언 때문에 반목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둘러싼 남북 간의 긴장은 이제 세계 강대국들의 이슈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살상과 테러는 정말 인내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전쟁과 테러가 있는 곳 그 곳은 이사야서가 말하는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것들이 마치 볏짚 같이 불에 타 없어지는 그 날을 기다렸던 것처럼, 2017년 성탄은 우리에게도 평화를 선포하는 성탄이 되어야합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처음 우리에게 다가온 카이로스의 성탄을 기억하고, 오늘의 성탄을 축하해야합니다. 누구나 성탄을 기뻐하듯이, 성탄은 누구나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합니다. 외로운 사람이라면, 고난당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예수는 그 곁으로 갈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회 밖, 어느 곳이든지 메리 크리스마스를 느끼도록 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평화목교회도 그런 모습의 교회가 되시기를 2017년 성탄을 맞이하여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