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발자취] <25>함평고구마사건 9일간의 단식농성
'고구마 수매' 약속어긴 농협에 분노
農心폭발…현대적 농민운동 '첫발'
생존권 보장을 위한 피해보상 요구였던 ‘함평 고구마 사건’은 이후 농정 전반에 대한 ‘정책 투쟁’을 거쳐 자주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 투쟁’으로 이어지는 70, 80년대 농민운동의 효시로 자리 잡는다. 농민들이 고구마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처음으로 머리띠를 둘렀다. /자료제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6년 가을 고구마 수매를 둘러싼 전남 함평군 농민들의 피해보상 투쟁은 현대적 농민운동의 출발이다.
‘함평 고구마 사건’은 지역 농민들의 단순한 피해보상 투쟁으로 시작됐으나 가톨릭농민회(가농) 등의 적극적인 참여로 기도회와 시위, 단식농성을 통해 전국적 이슈로 사회문제화 했다.
이 사건은 79년 경북 안동지역의 감자 투쟁(일명 오원춘 사건)과 함께 70년대 농민운동의 효시로 자리했다.
해방 후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은 전국적으로 330여만명의 조합원을 갖고 반제ㆍ반봉건ㆍ민주변혁을 추구했으나 단독정부 수립과 농지개혁,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와해됐다. 5ㆍ16 쿠데타 이후 저임금ㆍ저곡가를 기반으로 독점재벌 고도성장 정책으로 오랫동안 농민의 침묵이 강요되고 있었다.
가農주도로 기도회ㆍ시위ㆍ단식
농협측 수매자금 유용 드러나며
피해액 309만원 보상받아
民이 官을 이긴 최초의 사건
76년 9월 전남도 농협은 그 동안 건(乾)고구마(얇게 썰어 말린 것) 형태로 수매하던 것을 이번부터 생(生)고구마 상태로 수매한다고 발표했다.
시가 1,000원(가마 당) 정도 하는 생고구마를 1,300~1,400원 수준의 건고구마 값에 전량 수매한다는 것은 농민들에게는 복음이었다. 농협 직원들은 고구마 농가를 찾아가 농협이 자체 제작한 PD포대까지 나눠 주었다.
그러나 생고구나 수매는 40% 정도 밖에 이뤄지지 않았고, 나머지 고구마는 포대 채로 썩거나 홍수 출하로 덤핑 처리됐다. 당시 생고구마 57가마를 수확했으나 반 이상을 썩혀버리고 피해보상 대책위원회를 이끌었던 서경원(徐敬元ㆍ66ㆍ현 범민족울타리운동본부 대표)씨의 회고.
“농협은 이런저런 핑계만 대고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액을 조사했다. 4개 면 1개 읍 9개 마을 160농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총 309만원(호당 18,000~19,000원)의 손해가 확인됐다. 함평군 전체의 피해는 1억4,000여만원으로 추산됐다. 나중에 단식농성 기간 협상 과정에서 당시 전남도지사는 ‘수매자금 가운데 1억6,000만원이 유용됐다’고 고백했다. 결국 중앙에서 내려온 수매자금을 공무원들이 유용하고 그 손실을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덮어 씌운 것이었다.”
대책위는 77년 4월 22일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가진 기도회를 시작으로 서울과 대전 부산 등 대도시와 농촌을 돌아다니며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했다. 이듬해 4월 24일 광주 북동 성당에서 60여명이 모여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당국은 비로소 대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농성 9일째인 5월 2일 대책위가 최초에 조사했던 피해액 309만원을 보상했다. 당시 가농 전남지부 조사담당으로 농성에 참가했던 조계선(趙啓善ㆍ53ㆍ자영업)씨의 설명.
“현금으로 309만원을 만들어 주면서 농협측은 ‘돈의 출처는 묻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의심은 했지만 받았다. 어쨌든 농민이 정부를 상대로, 이른바 민(民)이 관(官)에게 이긴 최초의 사건이었다. 희망과 활기를 찾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가농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연이은 농민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단식농성이 마무리 되자 감사원은 국세청과 함께 농협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농협이 고구마 수매자금 415억원 중 80억원을 부정 유출시켰다는 것을 밝혀냈고 이와 관련된 농협 도지부장 1명, 군조합장 62명, 단위조합장 139명 등 658명을 해임ㆍ징계했다.
함평 고구마 사건에 이어 이듬해 경북 안동에서 감자 사건이 터진다. 정부와 농협으로부터 받은 감자 씨앗을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았다. 썩거나 말라버린 씨앗을 농민에게 나눠준 것으로 드러났다.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섰고, 여기에 앞장섰던 당시 영양군 청기면 가농 분회장 오원춘씨가 납치ㆍ감금(5.5~5.21)되어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가톨릭 안동교구 사제단에 알려졌고, 결국 오씨의 양심선언으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후 안동 교구청에 사복 경찰이 난입해 신부와 가농 지도부를 강제 연행했다.
8월 6일 안동 목성동 성당에서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주례하는 특별 기도회가 열렸다. 구속자 석방과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28일간 농성에 들어갔다. 8월 2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안동 사태 관련 기도회가 열려 전국적인 사건으로 확대됐다.
함평 고구마 사건에 웰옛홴?감자 사건은 농민운동이 단순한 ‘생존권 차원의 피해보상 투쟁’에서 벗어나 ‘정책 투쟁’과 ‘정치 투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정책 투쟁’은 81년 충북 음성군 부당농지세 시정 투쟁(2,000여명 대중집회, 84년 농지세법 개정의 계기)을 시작으로 82년 농협 민주화 100만인 서명운동(조합장 선거 관련)을 거쳐 85년 소몰이 투쟁(소값 투쟁)으로 이어졌다.
미국 소 과잉 수입으로 인한 소값 폭락으로 7~8월 전국 20여개 시ㆍ군에서 수만명의 농민이 참가, 소떼와 경운기 트랙터 등을 몰고 가두 시위를 벌였다. 구호는 ‘소값 보상, 농가부채 해소, 수입개방 저지’였다.
이후 86년 1월 22일 전남 강진 지역에서 일어난 ‘쇠똥물 투척 시위’에 이어 4월 19일 무안 지역에서의 시위는 그 명칭이 ‘수입개방 저지 및 미국예속 정권 타도 무안 농민 실천대회’였다. 최초의 ‘정치 투쟁’이었다. 87년 초 전국농민협의회(전농)가 결성됐다. 60여명의 9일간 단식투쟁이 10년만에 발아한 것이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입력시간 : 2003/11/0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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