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달성서씨는 대구를 관향의 기반으로 삼아 고려말 達城君(달성군)의 작위를 받으신 시조 版圖公(판도공)의 후손으로 판도공 이하 3대봉군(시조 達城君 휘 晉,2세 達川君 휘 奇俊,3세 達城君 휘 穎)과 4세 貞平公(정평공) 휘 鈞衡(균형),5세 龜溪公(구계공) 휘 沈(침)에 이르기까지 5대가 大邱邑誌(대구읍지)에 실리는 명실상부한 명문거족의 閥族(벌족)이라 하겠다. 이러한 達城徐門(달성서문)을 나는 감히 忠(충).節(절)의 후손이라 말하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의 부귀와 영달을 꾀하지 아니하고 民草(민초)들의 아픔과 고통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으셨던 龜溪先生(구계선생)의 후손이기에...
龜溪公(구계공)께서는 先代(선대)의 세거지였던 達城(달성)을 조건없이 나라에 바치며 달성군민 모두에게 그 혜택을 골고루 입혔으며,수양대군의 서설퍼런 칼날 앞에서도 斥姦疏(척간소)를 올리며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 찬탈하려는 무리들을 내치라는 직언을 하시고 귀향길에 오른 南隱公(남은공) 휘 涉(섭),不事二君(불사이군)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선비의 도의를 지키셨던 遯庵公(돈암공) 휘 翰廷(한정),遯齋公(돈재공) 휘 錫蓮(석련),南潮公(남조공)휘 錫蓂(석명),儉溪公(검계공) 휘 錫苓(석령)...
왜구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도 유린 당하며 풍전등화와 같은 壬辰亂(임진란)에 분연히 일어난 수많은 義兵將(의병장)들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선생 막하에서 칠백의사와 순절하신 忠烈公(충렬공) 휘 應時(응시),지리산 전투에서 순절하시고 병조참판을 증직하신 충렬공의 아드님이신 東巖公(동암공) 휘 致遜(치손),招募鄕兵文(초모향병문)을 지어 (大丘)대구 최초의 의병모집을 주도하고 청안현감으로 제수되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규휼하고 학문을 일으켜 후진양성을 기하셨던 임란충의공신 대구의병대장 文康公(시호) 樂齋(낙재) 徐思遠(서사원)선생은 한강 정구선생,여헌 장현광선생과 더불어 嶺南三賢(영남삼현)으로 추앙을 받았고,望潮堂(망조당) 휘 仁忠(인충)과 휘 夢虎(몽호)는 임란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의병모집 한 달여 만에 3,000여명의 의병을 집결시켜 수많은 전투에서 연전연승 하였으며,휘 인충께서는 부신진 첨사,휘 몽호는 훈련원 주부를 제수 받았으며,망우당 곽재우장군과 창의하여 아금암전투와 화왕산전투에 참전하신 竹溪公(죽계공) 휘 再謙(재겸)과 아우인 죽계공과 함께 아금암전투에 참전하여 순절하신 휘 得謙(득겸),충무공 이순신 막하의 선봉 수문장이었던 挽湖堂(만호당)휘 壽千(수천)[初 諱 수천,족보명 壽立]은 대나무 뗏목을 만들어 노량해전에서 무공을 떨쳤으며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하였고,禮浦(예포) 萬戶(만호) 挽河堂(만하당) 휘 慶立(경립)은 임진란에 순절하여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하였고,直齋公(직재공) 휘 方慶(방경)은 경주에서 창의하여 경주판관,해주판관을 제수 받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하였고,종질 克仁(극인)은 봉사를 제수 받았고,晩窩公(만와공) 휘 景沚(경지)는 영천에서 창의하여 이조참판을 증직하였고,耕齋公(경재공) 휘 承後(승후)는 망우당과 창의 하였고,낙재 서사원선생의 막하에서 창의하신 怡齋公(이재공) 휘 思進(사진)은 북산의병장,樂山公(낙산공) 휘 思述(사술)은 초동의병장,이동의병장에 휘 行遠(행원),복병장에 휘 期遠(기원)등...수많은 선조들께서 보여주신 애국.애민 정신이야말로 모든이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과 음덕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자랑스런 徐門(서문)의 후손임을 다음 세대에게 각인 시켜 줄 의무 또한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재덕님 감사,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훌륭한 선조님들이 많이 계신 것을 몰랐습니다.
빠진분도 있다고 봅니다. 찾는다고 찾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