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58년 만인 2007년 5월 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첫 성과가 이루어졌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약 9개월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자 93명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내리고 파악한 친일재산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도록 법원에 보전처분을 마쳤는데 이 중 이완용, 송병준 등 9명의 재산에 대해 국가귀속결정을 확정 발표했다. 늦었지만 국가의 도덕성 회복과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대의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반제국주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이 건국과 더불어 적극적인 친일 행위자에 대한 인적 물적 청산을 단행했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직후인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만들어진 법이 바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었다. 법률 제1호와 2호가 각각 ‘정부조직법’과 ‘사면법’ 같은 실무적인 법률이었음을 감안할 때 시대정신을 담은 첫 번째 법이 바로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법률이었던 것이다. 미군정 3년을 거치면서 친일파를 적극 중용한 이승만 정권과 미국에 의한 폭압정치가 이뤄지던 시기임을 감안할 때 당시 민중들의 친일청산 요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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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나찌 부역자 처형 모습 |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미군정이 점령한 독일의 경우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법’(1946.3.)에 따라 노동수용소 수감과 재산몰수가 이뤄졌으며 프랑스는 종전 이전에 이미 ‘국치죄’(1944.8.26.명령)를 발동해 나치부역자를 처벌하고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 몰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중국 역시 ‘징치한간조례’(1945.12.)를 제정해 친일부역자를 형사처벌하면서 동시에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몰수하도록 하였다. 여하튼 우리의 경우에도 법 제정까지 우여곡절을 거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가동 중이다.
이번 발표를 시작으로 친일로 취득한 재산이 속속 국가로 귀속될 것이다. 물론 그 액수가 어느 정도이건 관계없이 ‘불의는 언젠가 제대로 기록되고 징치된다’는 정신적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 재산조사위원회 활동이 가져다 줄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친일파 후손들과 더불어 과거를 들춰내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려하는 세력들의 저항은 여전히 우리가 돌파해야 할 걸림돌이다. 그들은 세련되고 능숙하고 지적인 언어들을 동원해 과거를 덮으려 들 것이 분명하기에 국민적 관심과 지지는 지금 이후가 더욱 절실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호에서는 친일파 재산 국가귀속에 있어 가장 빈번하게 회자되는 인물을 다루고자 한다. 최근 여러 언론을 통해서 그 후손들이 현재 남이섬과 청주의 상당산성처럼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대표적인 위락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이른바 서울 강남 8학군에 위치한 휘문중고등학교 설립자라는 점 때문에 주목받고 있는 자가 바로 민영휘(1852∼1935)다.
휘문고 누리집을 잠시 살펴보자. “(민영휘의) 교육 구국 운동의 일념으로 설립된 본교는 국가에 쓸모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건학 정신으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 “일제의 우리 국권 침탈기에 교육을 통하여 기우는 나라를 구함”을 건학정신으로 한다고 밝히면서 이어서 “본교의 설립정신에서는 근면 성실하게 역사의 운명 내지 사회의 현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신의를 존중하는 기풍이 중시되고 있다. (중략) 민족의 부강을 달성케 한다는 실천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라고 한다. 누리집의 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민영휘는 도산 안창호처럼 교육을 통해 독립을 도모한 틀림없는 독립운동가로 묘사되어 있다.
민영휘는 1852년 서울서 민두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당시는 민씨 일족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 한때였기에 민영휘의 아버지는 민두호는 세도를 이용해 ‘민쇠갈구리(閔鐵鉤)’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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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수상 기록일까? 친일화가로 이름높은 이당 김은호의 해방 후 수상 기록이다. 그들의 능력, 우리의 무능, 그 어느 것이라도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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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화가 김은호가 1913년에 그린 민영휘의 영정.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했던가. 민영휘는 아버지에 질세라 가렴주구로 재산을 모아 그가 죽기 전인 1930년대에는 조선 최고의 갑부 소리를 듣게 된다. 계산이 빠른 민영휘를 눈여겨 본 민비에 의해 주요 관직에 오른 민영휘는 경술국치 직후 일제에 의해 자작 작위를 받기는 했으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에는 청에 농민군 진압을 요청한 적도 있어 출세와 기회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갑오농민전쟁 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지내면서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헌납했다는 얘기도 있었으니 민비에 이어 고종의 총애까지 얻는 그였다.
그런 민영휘가 1904년 광성의숙을 세우자 1906년 고종은 직접 민영휘의 이름을 따 휘문의숙이라는 학교이름을 내려 주었고 또한 민영휘 자신이 아직 살아있던 1927년 휘문 교정에 자신의 동상을 설립한 것은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일제시대 제작된 대부분의 동상들이 전쟁물자로 필요한 동 공출을 위해 파괴되었는데 조선총독부로 조선의 대표적인 갑부이자 귀족인 민영휘 동상에는 감히 손대지는 못한 모양이다. 한편 대표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순종의 어진을 그리기도 한 이당 김은호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한 민영휘의 동상은 근대기 우리나라 최초의 동상이라고 하니 당시 민영휘는 왕의 자리가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이런 그에게 양자 민형식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민형식은 1907년 을사오적 암살계획 소식을 듣고 자금을 융통해 주었다가 발각되어 법정에 서기도 할 만큼 양아버지 민영휘와 는 전혀 달랐다. 따라서 첩 소생의 아들들인 대식, 천식, 규식이 민영휘의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받아 현재 민영휘를 포함해 4대까지 그 부를 누리고 있다.
현재 남이섬은 바로 첫째 아들 민대식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보도에 의하면 셋째 민규식의 후손들은 종로의 노른 자위 땅에 일제 때 세운 건물과 토지를 놓고 서로 법정 싸움 중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민규식은 일제 때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중추원의 참의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에 참여하는가 하면 인촌 김성수의 동생이자 삼양사를 설립한 친일 매판기업인 김연수 그리고 역시 일제시대 화신백화점을 세우고 현재 서울 신림동 광신상고 설립자인 친일 기업인 박흥식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에 제일 많은 기금을 제공하여 대를 이어 친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민영휘와 그의 후손들의 행적을 잠시나마 살펴보면서 요즘 불고 있는 부동산 광풍과 함께 한화 김승연 회장의 부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해방과 더불어 친일파들의 정치적 배경이던 조선총독부가 남기고 간 수많은 관직을 친일한 자들이 스스로 감투를 쓰고도 모자라 친일의 댓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강도짓으로 훔친 물건을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지도층이라는 허울 속에 민영휘 일가 못지않은 법과 제도를 농락하며 세도를 부리는 사람들 말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참여정부도 이제 레임덕이라는 수렁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그나마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활동 소식은 진정한 개혁과 사회 정의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거리가 되고 있지만 한시기구라는 태생적 한계와 더불어 호시탐탐 과거사 관련 예산 삭감을 조장하는 조중동의 목소리가 언제 또 거세질지 모르기에 결코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친일파 후손들의 땅 찾기에 한번쯤 분노해본 사람들이라면 과거사 관련 위원회에 대한 지지와 보호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주길 기대해본다. 그것은 뒤늦은 친일 재산 환수지만 우리 세대가 후손에게 결코 물려 줄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 유산이기 때문이다.
ⓒ방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