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역대의 의학자들이 건강의 개념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시도를 했지만
기껏해야 '질병의 부재상태가 건강'이라는 정도로 결론이 났을 뿐입니다.
의외로 건강의 개념은 객관적인 수치가 아닌
주관적인 그 무엇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에 정의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건강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면 곧 건강이 근접해오는 법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나 사랑이 아닌 것을 제거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사랑을 알게되는 이치나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건강의 적(敵)을 알면
어느덧 건강의 길을 알게 되겠지요.
배움에는 네 가지 적이 있습니다.
인디안 성자(聖者) 돈 후앙에게 사사받은 카를로스 카스타네타는 네가지 적이란
첫째는 두려움, 두번째는 명석함, 세번째는 힘,
네번째는 휴식 혹은 늙음이라고 전합니다.
건강의 적도 그 네가지에 대비해 봅니다.
병에 대한 '두려움'과 제법 안다는 '명석함',
건강하다는 자부심의 '힘'과 '게으름과 피로감'입니다.
두려움을 상대하는 법에는 정면 도전과 회피 두 가지 길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과거 정신과에서 권유하던 인위적으로 연상하는 즐거운 상상 요법 등은 일종의 회피에 불과합니다.
정면도전하여 두려움을 직시하는 명석함이 필요합니다.
명석함은 용감함의 산물입니다.
정면으로 두려움을 대하는 용감함 말입니다.
예를 들어 번개와 천둥에 대한 공포는 실상을 아는 순간 저절로 사라집니다.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는 번개 천둥이 두려울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면 도전이 이를 악물고 버티는 법은 아닙니다.
질병의 통처(痛處)나 가려운 곳을 지긋이 응시하는 정심주(定心住)라는 수행법과 같이
선입관 없이 통처를 관(觀)하는 명상적 도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명석함은 또한 버려야 할 적들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석함은 얕은 지혜로서 어디까지나 머리로만 알고 이해하는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스스로 안주할 수 있는 의지처를 실제로 체득한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힘을 얻었다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의 힘이란 스스로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는 힘입니다.
어쩌면 '내 스스로가 그대로 원래 있었으며 멸(滅)하지 않는다'는 신념 같은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나는 스스로 있는 존재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암시적 건강의 계시입니다.
이 자재(自在)한 힘이 있으면 명석함도 하찮게 보이는데
대부분의 명석한 사람들은 힘을 얻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을 가진 건강한 사람들은 의외로 건강의 지식과 약의 지식에 무지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힘의 세계쯤에 도달하면 대단한 초자아 같은 매력 있는 경지를 느끼게 되어서 교만이 생기기 쉽습니다.
'호승자필패(好勝者必敗)요 시장자필병(視壯者必病)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즉 '승리를 좋아하는 자는 필히 패하기 마련이요,
자신을 건장하다 생각하는 이는 필히 병들게 마련이다'라는 뜻이지요.
내가 강하다는 교만이란 얼마나 무서울 수 있습니까.
우주의 무상(無常) 법칙에 의해서 힘 또한
어느 날 휴식하고 싶은 늙음이라는 적에 부닥치면 무력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두려움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자기 소유가 아닌 것들을 자기 소유처럼 생각해서 오는 두려움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마음을 비워 명석해졌다해도 힘과 휴식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니 곰곰이 헤아려 볼 일입니다.
두려운 죽음이 매일 코앞에 있는 전쟁의 지구촌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삶을 성찰할 기회를 주는 현장일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혼자 있어도 생사의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솔직하고 예민한 사람은 구태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무딘 사람들이야말로 바깥의 경계인 인간관계나 애정과 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내재된 두려움이 다 드러나는 사건이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순간으로 여기고 두려움과 직면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생겨나는 자신의 반응을 살피다보면 어느 날 자신이 질투와 두려움의 소유자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질투와 탐욕 등을 스스로 이해하여 스스로 해방되는 길!
이것은 배움의 길이요, 지혜의 길이요, 질병을 대적하는 용감한 전사(戰士)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