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근무처 앞산을 오른다. 위치가 외져서 우리 외엔 거의 찾지 않는 산이다. 산을 오를 때 먼저 오른 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거미 때문 자연 알게 된다. 늘 오르는 길목엔 거미가 진을 치고 있다. 거미줄에 걸려들면 그 길의 오늘 초행은 바로 나인 셈이다. 거미 녀석은 그런 헛수고를 매일한다. 아니 매일 나같이 큰 놈을 잡아 볼 것이라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얼굴에 달라붙은 거미줄을 걷어낼 때 칙칙한 기분이지만 미안함도 같이 생긴다. 그래서 밝은 햇살이 비추어 얇은 거미줄이 눈에 띠면 피해서 갈 때도 있다. 잡힌 척이라도 하여줄까.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는 녀석이지만 녀석은 게으름 없이 참으로 맹렬하게 사는 것이다. 삶의 본태가 그러니 얼기설기 거미줄이 쳐있지 않다면 녀석은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하여도 거의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거미줄은 거미에겐 바로 생명줄인 것이다.
염낭거미의 자기희생에 대해서 들은 바 있다. 자신을 먹이 감으로 새끼들에게 스스로 희생하여 종속 보존을 하는 염낭거미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 알을 낳고 죽어가듯이 본능적으로 몸을 아끼지 않는 생태보존의 자연 세계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만다. 그런 다큐 물을 나는 즐겨 보는 편이다. 삶이 본능이고 바로 처절한 항쟁이기도 한 진실이니 애절하고 감격하여 두고두고 생각도 난다. 부성애를 발휘하는 가시고기의 삶은 또 어떠한가.
얼마 전엔 아프리카에서 해마다 벌어지는 진풍경인 누우 떼의 대이동을 직장의 교육현장에서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솔직히 교육용으로서는 지겹다 느껴지는 몇 번째 보는 영상물이다. 교육현장에서는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모두 죽고 만다는 절박감을 들어 혁신하지 안 되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연출할 때 그 영상물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누우(gnu)는 소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그들은 풀을 찾아 이 초원에서 저 초원으로 이동한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벌판 일대‘야생의 초원, 세렝게티.’그들은 그곳에서 태어난다. 1∼2월에는 세렝게티가 본격적 우기(雨期)에 들어가는데, 이 시기가 그들의 출산기이기도 하다. 풀만 뜯으면 그만일 단순한 삶 일 것인데 하지만 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건조기에 들어선 혹독한 초원은 그들을 버리고 마는 것이다. 참으로 지독한 가뭄이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가뭄을 견디느라 마음속 대지가 앓은 소리를 낸다. 커다란 구름 먼지를 일으키며 생명의 땅을 찾아나서는 그들이다. 가뭄을 피해 약속의 땅으로 질주하는 그들은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도록 야위어 간다. 누가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 하는 것인가. 대장정의 길, 차라리 검은 구름이 그들의 뒤를 쫓는 것만 같다.
그들은 떠나지 않으면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떠나지 아니 한 백수의 왕 사자는 혹독하게 환경에 시달리며 죽어간다. 하지만 사자는 영역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굶주려도 풀을 뜯지 않는다. 오히려 암사자는 젖이 네 개 밖에 없는데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어린 사자들은 젖을 먹기 위해 나면서부터 먹이 때문에 치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어린 사자 또한 그들이 돌아 올 우기를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지키게 될 것이다. 왜 그들은 떠나지 않으며 또한 혹독한 시련을 참아내는 것일까.
그들은 그루메티 강을 건너고 마라강을 건너야 비로소 그들의 목적지 케냐에 당도 할 수 있다. 그 강물엔 악어 떼가 우글거린다. 과연 누우는 무슨 수를 써서 강을 건너갈 것인가? 작은 희생으로서 큰 역사가 이루어진다. 누우 떼가 200만 년 지나도록 5백만 마리의 종속으로서 건재한 것은 아마도 그런 작은 희생의 과업이 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현장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결정의 장면은 바로 그 강에서다. 클로즈업되며 그 영상물이 포착한 것은 악어에 다리를 붙잡힌 어미 누우 한 마리가 벌이는 사투장면이다. 무려 한 시간을 넘게 벌이는 악어와의 싸움이다.
동료들도 포기하여 쳐다보고 지나치는 상황에 그 어미 누우는 물속에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힘을 몰아 강기슭으로 기어오른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몇 차례인지 모른다.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식이다. 지면 죽고 마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다. 악어가 누우 한 마리를 감당하지 못 할리 없다는 생각인데 그 누우는 결코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 누우가 시간을 끄는 사이 많은 누우들은 그곳을 빠져 나갈 것이다. 결국 악어는 물은 입을 놓아버린다. 누우가 이겨 낸 것이었다.
순간 마음에서 터지는 갈채이다. 스스로를 약자로 보기 때문일까. 약자가 이겨냈다는 것을 보는 희열은 강한 느낌을 동반한다. 자연의 순리가 약육강식의 터전이라고 하지만 개체가 아닌 종족으로 말할 것이 많으며 실제 물리적 힘만으로는 아니 될 것도 많다. 의지력이란 강한 정신에서 비롯된다. 강한 열정은 하고자하는 신념에 의하여 비로소 그 목적의 실체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내와 끈기. 그들의 생존 법칙은 바로 거기서 출발하고 있다. 우두머리를 쫓아 4개월의 대장정을 이루는 그들은 리더를 믿고 열 길도 넘는 낭떠러지를 주저 없이 쫓아 뛰어내린다.나는 엄숙하기 까지 한 그들 삶의 진진한 모습을 보며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동물의 세계란 느낌을 지우기로 하였다. 누우보다 강한 것이 사자라고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초원을 누비고 돌아갈 세렝게티에는 혹독한 시련을 겨우 견뎌낸 사자가 몇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우리나라 사회를 그들 누우들에 비추어 본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가 해마다 이토록 시끄러운 것은 정작 대를 위해 과정으로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소리가 없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희생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한 사자로 착각하는 무리들이 누우 떼의 함성을 저버린 것은 또 아닐까. 그들은 그 좋은 말 ‘국민의 뜻에 따라’ 라는 말을 그야말로 약골의 빈약한 의미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실제 그들이 민초의 뜻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이루어 놓은 것이 있었던가. 진정으로 강하면서도 어진 것은 누우떼 같은 민초들이다. 나는 숙명적인 누우의 함성을 곱씹으며 그렇게 인내하는 끈기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을 강하게 마음속에 그려 넣는다.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방법을 소재로 해서 쓴 복효근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이란 시가 있다.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 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 복효근 詩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전문